홍명교의 눈

홍콩은 우리에게 수단인가 방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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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교의 눈]홍콩은 우리에게 수단인가 방법인가?

지난 5월 30일 4선 의원인 윤상현(무소속)은 홍콩 항쟁의 대표적 활동가인 조슈아 웡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고 밝혔다. <조선일보>는 이를 ‘단독’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이는 모두 거짓이었다. 최근 중국 정부가 홍콩특구에서의 국가안전법 입안을 전격적으로 결정하면서 홍콩에는 비관의 그늘이, 다른 한편에선 저항이 이어지고 있다. 홍콩 시민사회는 이 법이 집회시위나 언론·출판의 자유를 크게 제약할 위험이 크다고 비판한다.

아직 구체적인 법안은 나오지 않았다. 현재의 우려는 중국 대륙과 마카오의 사례를 통한 비관적 예측이다. 찬성론자들은 홍콩특구의 ‘헌법’ 역할을 하는 기본법상에서 만들기로 결정했던 사안이기 때문에 ‘악법’이라도 불가피하다는 점, 기본법에 ‘국가안전’에 관한 내용이 들어간 ‘제23조’가 삽입된 순간 국가안전법 실시는 당연한 수순이라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악법이라도 불가피하다는 논리는 민주주의 원칙과 부합하지 않는다. 2003년 이래 홍콩 시민은 국가안전법의 실질화를 대중적인 저항을 통해 막아왔다. 더구나 홍콩 시민은 1997년 반환 과정에서 홍콩 사회를 어떻게 건설해야 하는지, 민주주의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지에 대해 단 한 번도 말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홍콩반환협정과 기본법은 중·영 양국의 통치자 간 폐쇄된 논의를 통해 만들어진 소수 엘리트의 약속일 뿐이다. 따라서 지난 20여 년 간 홍콩에서 지속적으로 뿜어져 나온 민주주의와 노동권을 향한 열망은 단지 반환 이후의 문제가 아니다. 20세기 이후 지속된 모순이 폭발한 것에 가깝다.

국제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크게 넷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무관심’이다. 가령 이라크에서 학살이 벌어질 때 우리는 CNN이 송출하는 폭격기에 의한 학살의 스펙터클로 그것을 마주할 뿐 국제정치의 잔혹한 논리가 파괴하는 평범한 삶들이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다고 여기지 못한다. 두 번째는 무관심에 상반되는 것처럼 인식되는 태도인 ‘몰입’이다. 비극에 공감하고 그들을 돕고자 하기에 박애와 인류애를 발휘할 수 있지만, 초극할 수 없는 차이에 대한 인식을 회피하게 해 오히려 비극이 벌어진 원인을 살피는 것을 돕지 못한다. 세 번째는 ‘수단’이다. 윤상현 의원의 태도는 홍콩을 ‘수단’으로 여겨 현 정부를 비판하는 것에 집중할 뿐 어떻게 하면 홍콩 항쟁을 도울지, 그것의 역사적 모순과 해결책은 무엇인가에 관심이 없다.

네 번째는 홍콩 항쟁을 둘러싼 모순을 하나의 ‘방법’으로 여겨 우리 사회를 돌아보고 동아시아 전역과 연대하는 것이다. 홍콩 사회의 극심한 불평등과 부동산 버블, 인종주의와 이주노동자 인권, 선거제도의 결함 등 제도와 문화, 사회적 모순 전반을 우리에 비추어 사고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홍콩이 마주한 문제가 결코 그곳만의 문제가 아님을, 자본주의가 낳은 불평등과 국가주의에 의한 정치적 억압이며, 나아가 국제정치의 대결이 낳은 불행한 귀결임을 알 수 있다. 비판과 무기력에 빠지지 않고 출구 없는 홍콩 사회를 바라보자. 그곳에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연대의 길이 있을지 모른다.

<홍명교 동아시아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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