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전기차 배터리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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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핵심산업으로 한국의 주력 수출품 차지할 듯

최근 재계의 굵직한 이슈들 한복판에는 ‘전기차 배터리’가 있었다. 지난 5월 13일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총괄수석부회장이 삼성SDI 천안사업장을 찾았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최고경영진이 방문단을 맞았다. 재계 서열 1·2위 그룹 총수의 첫 공식 회동으로 이목을 끌었던 이날 만남의 주제는 전기차 배터리였다. 양측은 차세대 배터리인 전고체 배터리 개발 현황과 방향에 대해서 논의했을 뿐이고 당장 함께 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아니라며 말을 아꼈지만, 업계에서는 현대차가 삼성SDI와 협력해 배터리 공급선을 다변화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현대차는 한화큐셀과도 손잡고 전기차 배터리에서 회수한 배터리를 재사용한 에너지저장장치(ESS)를 개발하는 사업을 함께 추진하기로 하는 업무협약(MOU)을 지난 5월 29일 맺었다. 완성차 업체로서 배터리를 단순 수급받는 데 그치지 않고 유관산업에도 진출하며 ‘배터리 밸류체인’을 구축해나가는 모양새다.

이보다 앞선 지난 4월 28일, SK이노베이션은 8900억원을 투자해 2023년까지 미국 조지아주에 전기차 배터리 제2공장을 추가 건설한다고 밝혔다. SK이노베이션이 미국 공장에 투자하기로 지금까지 결정한 금액만 3조원에 달한다. 정유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SK이노베이션은 코로나19로 인한 저유가의 영향으로 지난 1분기 1조7752억원에 달하는 창사 이래 최악의 영업적자를 냈다. 경영환경이 극도로 나빠졌음에도 배터리 관련 투자는 예정대로 진행한 것이다. SK이노베이션은 올해 4조원 안팎으로 예상하고 있는 설비투자비 중 60%를 배터리와 배터리 소재인 리튬이온분리막(LiBs) 설비 증설에 쏟아부으며 배터리 사업 키우기에 올인하고 있다.

5년 뒤 ‘포스트 반도체’ 가능성

국내 기업들이 잇따라 전기차 배터리에 자금과 역량을 쏟아붓고 있다. LG화학과 삼성SDI, SK이노베이션 등 배터리 3사는 물론, 배터리 소재를 생산하는 포스코케미칼과 SKC, 두산솔루스 등도 배터리를 핵심산업으로 보고 있다. 배터리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각국의 환경규제를 동력으로 전기차 시장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은 올해부터 판매되는 신차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대당 평균 95g/㎞가 넘으면 1g마다 95유로의 벌금을 물리는 초강력 환경규제를 시작했다. 그린뉴딜 중심으로 코로나19 이후 경기부양책을 추진 중인 EU는 최근 전기차 생산량 확대 지원, 부가세 면제 등 전기차 부양안을 발표했다. 중국도 차종별 판매량의 10%를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차 등 친환경차로 채우지 못하면 제재를 받는 친환경차 의무판매제를 지난해부터 시행했다. 지난해 전 세계 신차 판매량 중 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2.5%에 그쳤지만, 블룸버그NEF는 이 비중이 2040년까지 31%로 급상승할 것이라는 예측을 최근 내놨다.

전기차 배터리는 전기차 가격의 40%를 차지하는 핵심 중의 핵심이다. 아직까지는 배터리 수요보다 공급이 많지만, 2025년쯤이면 수요가 공급보다 많아져 완성차 업체들이 배터리 공급 부족 사태를 맞을 거란 전망도 나온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IHS마킷은 전기차 배터리 시장규모가 연평균 25%씩 성장해 2025년이면 16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성장이 정체된 상태인 메모리반도체 시장은 같은 해 1490억 달러 규모로 예측된다. 5년 뒤면 한국의 주력 수출품이 반도체에서 배터리로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코로나19 여파로 전 세계에서 자동차 공장과 판매점이 문을 닫아 신차 판매량이 반토막 났던 올해도 전기차는 승승장구했다. 유럽 전기차 시장조사업체 EV세일즈에 따르면 올해 1~4월 유럽 내 전기차 판매량은 전년보다 40% 늘어난 26만982대였다. 같은 기간 전체 자동차 판매량은 전년 동기보다 26.3% 줄었다.

전기차 배터리 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지만 반도체와 마찬가지로 기술과 규모의 장벽이 워낙 높아 신규 업체들은 진입하기가 어렵다. 완성차 업체들도 대체로 배터리를 직접 생산하기보다는 주요 배터리사들과 합작법인을 만드는 방식으로 공급을 안정화시키려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현시점에서는 한·중·일 3국이 전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한국 배터리 3사 중 LG화학이 중국 CATL, 일본 파나소닉과 1위를 다투고, 삼성SDI와 중국 BYD 등 중위권 기업들이 그 뒤를 잇는다. 후발주자로 급격히 덩치를 키워가고 있는 SK이노베이션도 최근 10위권으로 진입했다. 전기차 및 배터리 전문 시장조사기관인 SNE리서치에 따르면 LG화학은 지난 1분기 전 세계 전기차 배터리 사용량 중 27.1%를 차지해 처음으로 분기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그동안은 미국 테슬라의 전기차에 탑재되는 배터리를 대부분 공급해왔던 파나소닉이 1위를 달리고, 중국 내수를 기반으로 한 CATL이 뒤를 따르는 형국이었지만, LG화학이 최근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해 시장점유율을 높이면서 순위가 역전됐다. LG화학은 현대차와 폭스바겐·아우디·포르쉐·재규어·르노·테슬라 등 글로벌 전기차 업체 대부분에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다. 삼성SDI(6.0%)는 점유율 4위, SK이노베이션(4.5%)은 7위를 기록했다. 국내 3사의 글로벌 점유율만 37.5%에 달한다.

한국 LG화학, 중국·일본과 1위 다퉈

아직 시장이 성장 초기 단계라 변동성이 높지만, 업계에서는 결과적으로 현재 글로벌 톱10 기업들이 5개 안팎으로 추려져 시장을 과점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국내 배터리사들이 초기 시장점유율을 높여 톱5에 들기 위해 신·증설 투자에 공격적으로 나서는 이유다.

LG화학은 지난해 중국 난징공장 증설을 결정했고, 중국 지리자동차와 합작법인 계약을 맺었다. 미국에서도 GM과 합작법인을 맺고, 오하이오주에 배터리공장을 짓기 위해 준비 중이며, 유럽에서는 폴란드 공장 증설을 준비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말 중국 창저우에 해외 첫 배터리 생산기지를 완공했다. 내년에는 헝가리 코마롬 1공장이, 2022년에는 코마롬 2공장과 미국 조지아 1공장이 각각 양산을 시작한다. 삼성SDI는 세부적인 증설 계획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시안 배터리공장 생산라인을 증설 중이고, 헝가리 공장 증설도 추진하고 있다. SNE리서치는 지난 5월 세미나에서 2030년이면 LG화학이 493GWh, CATL이 496GWh의 배터리를 공급하는 등 두 회사가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BYD·SK이노베이션·삼성SDI·파나소닉 등 4개 업체가 그 뒤를 이을 것으로 예상했다.

한병화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코로나19 대응 경기부양안으로 그린뉴딜을 선택한 유럽에서는 전기차 고성장세가 유지될 것”이라며 “그간 전기차 성장이 정체됐던 미국에서도 11월 대선과 상원의원 선거 중 하나 이상에서 민주당이 승리할 경우 전기차 시장이 급성장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LG화학 오창공장에서 생산한 배터리를 점검하고 있는 임직원들 / 각사 제공

원통형 소형 전지를 생산하는 삼성SDI 천안사업장 전경

SK이노베이션이 미국 조지아주에 짓고 있는 전기차 배터리 공장 공사 현장

<남지원 산업부 기자 somni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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