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 빈민가 ‘테라스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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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일(현지시간) 베네수엘라의 페타르. 바리오(barrio)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원래 스페인어로 ‘구역’을 가리키는 말인 바리오는 도시의 한 지역을 뜻하는 단위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에서는 대개 빈민가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코로나19에 미국의 봉쇄와 경제난이 극심한 베네수엘라에서, 슬럼 주민들이 모여 영화를 보는 일은 흔치 않다. 석유 대국이라지만 미국의 제재 때문에 수출길이 막힌데다 낙후된 정유시설을 고칠 수도 없어서 툭하면 정전되기 때문이다.

6월 1일(현지시간) 베네수엘라 북부 도시 페타로의 슬럼가에 주민들이 모여 미국 디즈니 영화 <알라딘>을 보고 있다.

6월 1일(현지시간) 베네수엘라 북부 도시 페타로의 슬럼가에 주민들이 모여 미국 디즈니 영화 <알라딘>을 보고 있다.

이날은 달랐다. 허름한 바리오의 벽돌집 앞에 하얀 스크린이 세워졌다. 주변에 사는 이들은 스크린 앞에서, 혹은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부엌의 작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화면을 응시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집들에서도 지붕 위 테라스에 주민들이 플라스틱 의자를 꺼내놓고 앉아 영화를 봤다.

6월 1일(현지시간) 페타로 주민들이 멀리 화면에 비치고 있는 영화 <알라딘>에 시선을 모으고 있다.

6월 1일(현지시간) 페타로 주민들이 멀리 화면에 비치고 있는 영화 <알라딘>에 시선을 모으고 있다.

수백 명의 시선이 모인 영화는 미국 문화의 상징인 디즈니의 <알라딘>이었다. 코로나19 봉쇄와 미국의 압박에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는 주민들에게 역설적이지만 할리우드 영화가 위로가 돼준 것이다. 아드리아나 카리요라는 여성은 다섯 살 딸과 함께 문간에 앉아 영화를 봤다. “팝콘을 좀 튀겼어요.” 아란사 소피아 게레로라는 주민은 “아이들에게 특히 좋은 오락거리가 됐다”고 AP통신에 말했다.

미국의 경제 제재에 코로나19까지 겹쳐 삶이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는 베네수엘라 사람들에게, 지붕 위 테라스는 유일한 안식처가 되고 있다. / AP연합뉴스

미국의 경제 제재에 코로나19까지 겹쳐 삶이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는 베네수엘라 사람들에게, 지붕 위 테라스는 유일한 안식처가 되고 있다. / AP연합뉴스

미국은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미국 관리들은 마두로 정부를 “베네수엘라 옛 정권”이라 부른다. 베네수엘라와 거래하는 러시아 석유기업을 제재하고, 베네수엘라에서 영업 중인 미국 석유회사 셰브론에는 사업중지 명령을 내렸다. 지난 3월에는 마두로 대통령을 ‘마약 테러’ 혐의로 기소하고, 1500만 달러(약 184억원)의 현상금을 걸었다. 미국 용병 회사에 고용된 이들이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북부 해안으로 침투하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북부 미란다주에 있는 페타르는 가난한 도시이고, 폭력 범죄가 많은 것으로 악명 높다. <알라딘>이 상영되기 직전에도 며칠 동안 밤마다 갱들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제재 때문에 주민들이 즐겨 보던 디렉TV의 위성신호도 끊겼다. 미국 통신회사 AT&T 베네수엘라 지사는 제재 때문에 방송을 중단한다고 지난 5월 19일 발표했다. 주로 위성TV로 영화를 보던 바리오 사람들은 영화를 볼 길이 없어졌다. 갈수록 팍팍해지는 삶에 위안을 주겠다고 나선 것은 몇몇 시민활동가들이었다.

이 활동가들은 지역 자선단체들의 지원을 받아 스크린과 프로젝터, 스피커를 설치하고 3월부터 페타로 시내에서 거리 영화관람회를 열어왔다. 그러다가 디렉TV 방송이 중단되자 바리오로 장소를 옮겼다. 이날 행사를 만든 지미 페레스는 지붕 테라스가 베네수엘라 사람들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테라스에 모이고, 테라스에서 꿈을 꾼다. 축제 때면 테라스에서 폭죽을 터뜨리고 연을 날린다.” 경제난에 더해 코로나19까지 퍼지면서, 집마다 저녁이면 온 가족이 테라스에 올라가 한 조각 삶의 여유를 나눈다. 바리오의 영화 상영회는 테라스의 관람객들이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 해주는 위안거리다.

<구정은 국제부 선임기자 ttalgi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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