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뉴딜’의 공정한 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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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 고등학교 정치 수업에서 배우는 ‘정치’의 정의 가운데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의 표현입니다. 대공황의 여파를 수습하려 1930년대 미국의 루스벨트 행정부가 ‘원조 뉴딜’ 정책을 내걸었던 상황이 이 표현과 잘 들어맞습니다. ‘큰 정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한쪽에서는 시장에 개입하는 정부를 비판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직 정부가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함에도 손을 놓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위기가 닥치면 민간 자본이나 시민사회에서 하지 못하는 일을 정부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때가 옵니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바탕으로 막대한 돈을 풀고 미래를 향한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그 역할입니다. 하지만 과연 어느 방향으로 어느 선까지 진행해야 할지를 두고 쉽게 정답이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답은 시간이 내려주는 것이어서 루스벨트의 1·2차 뉴딜도 이후 역사의 평가를 받았습니다.

‘한국판 뉴딜’이 아직 자세한 경로와 이정표를 내놓은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윤곽은 드러났습니다. 갑작스러운 감염병 확산으로 생존의 위기를 맞은 사람들을 돌보고, 이참에 전환의 계기로 삼으려는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인공지능과 데이터산업 등 디지털 경제로 발 빠르게 이행해 나아가야 코로나19 이전부터 닥쳐온 일자리 문제를 정면돌파할 수 있다는 기조도 유지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어느새 경제위기가 때가 되면 돌아오는 정례행사처럼 일상이 된 이 시대, 아직 한동안 버틸 자금력이 있어 약삭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이 나라 곳간에서 풀려나오는 큰돈을 호시탐탐 노리는 일도 충분히 예상됩니다. ‘재난자본주의’라 이름 붙은 익숙한 장면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원조’인 루스벨트의 뉴딜을 되돌아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당시 막대하게 풀린 재정의 물줄기로 가장 먼저 혜택을 본 자본가들을 향해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본을 보였던 조치들, 이를테면 노동관계법이나 사회보장법을 정비해 수혜에 걸맞은 책임도 반드시 져야 함을 알려줬던 정책들을 눈여겨봐야 하지 않을까요. 위기에 한몫 챙기는 누군가가 어쩔 수 없이 생긴다면, 가능한 한 모두가 그 누군가의 자리를 나누면 좋을 테니 말입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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