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째 바뀌지 않는 ‘닮은꼴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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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부산 국제고무공장 화재… 2020년 이천 한익스프레스 화재와 판박이

경기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센터는 왜 불에 탔을까. 정확한 화재 원인은 규명되지 않았다. 다만 전문가들은 ‘인화성 유증기가 가득한 작업 환경’을 주요 원인으로 지목한다. 밀폐된 공간의 고농도 유증기는 공사현장을 화약고로 만든다. 작은 불씨는 물론 정전기만으로도 폭발할 수 있다. 2008년 1월 이천 코리아2000 냉동창고 참사도 다르지 않다. 냉동창고는 ‘언제 불이 나도 이상할 것 없는 장소’였다. 배관에 보온대를 싸매는 과정에서 사용한 150㎏의 본드가 화근이었다. 본드에서 나온 고농도의 인화성 물질(톨루엔)은 밀폐된 공간에서 폭발 하한치에 다다랐고 불이 붙었다. 노동자는 폭발 직전의 현장에서 일했다.

경기도 이천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화재 현장에서 경찰과 국과수 관계자들이 합동감식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경기도 이천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화재 현장에서 경찰과 국과수 관계자들이 합동감식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익스프레스·코리아 냉동창고 참사와 유사한 재해는 전에도 있었다. 1960년 3월 2일 부산 국제고무공장에서 불이 났다. 이 불로 노동자 62명이 사망하고 39명이 부상을 입었다. 공장 노동자들은 밀폐된 작업장에서 톨루엔을 용매로 하는 고무풀(접착제) 작업을 했다. 공장 내부는 위험한 유증기로 가득 찼다. 일촉즉발의 작업 환경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화재 원인을 ‘노동자의 안전불감증에서 비롯된 과실’로 결론 내린 뒤 수사를 종결했다.

현장 노동자 안전불감증으로 결론

신입 노동자 한 명이 무심코 켠 성냥 하나가 참사를 불렀다는 것이다. 성냥을 켠 것으로 지목된 노동자는 구속됐다. 폭발하기 십상인 작업장에 직원을 방치한 회사는 처벌을 면했다. 60년이 지났지만 화재·폭발 등 산재 발생 위험이 만연한 노동자의 일터는 바뀌지 않았다. 안전설비는 미흡했고, 노동자들은 보호받지 못했다. 그때도 지금도 사고 책임은 현장 노동자가 나누어 짊어졌다.

한익스프레스 참사 이후 ‘묵은 법’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2017년 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발의한 ‘재해에 대한 기업 및 정부 책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안(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다. 인명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한 경우 사업주와 경영자·관리감독기관을 형사처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업주와 관리·감독기관의 처벌을 강화하고 책임을 묻겠다는 취지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20대 국회 내내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5월 말 20대 국회가 종료되면 자동 폐기될 처지다. 한익스프레스 참사 이후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시급히 처리해야 할 노동개혁 법안”이라며 법 제정을 요구했다. 고 노회찬 의원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공동발의한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해당 법안의 제정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사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오래된 법안이다. 20대 국회 이전에도 수차례 논의됐고 발의됐다. 2013년 19대 국회에서 옛 통합진보당의 김선동 의원은 기업살인처벌법을 발의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 정부는 ‘기업책임법’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2016년 6월 경기 남양주 지하철 공사현장 폭발 사망사고가 발생하자 정치권에서 ‘기업처벌법’ 논의가 이어졌다. 2017년 5월 6명의 노동자가 사망하고 25명이 부상당한 삼성중공업 크레인 충돌사고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발의된 법안은 폐기됐고, 정치권의 도입 논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번에는 다를까. 노동계는 정치권에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접근할 경우 결과는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대한 미래통합당 등 보수 야당과 경영계의 반대는 상수다. 경영계는 사업주와 경영자 처벌을 물을 수 없는 현행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로비를 벌이고 국회·정부 부처에 전방위적인 압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김용균법)도 이런 과정을 거쳐 완화됐다. 당초 정부는 김용균법에 경영책임자에 대한 형사처벌 하한선(징역 1년 이상)을 두려고 했지만 경영계와 자유한국당(현 미래통합당)의 반대로 무산됐다.

처벌 수위를 높이고 처벌 대상을 명확하게 규정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그래서 더 심한 경영계의 반발에 부딪힌다. 한익스프레스 참사 이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대한 여론 관심이 높아지자 경영계는 종전의 ‘기업 규제 족쇄론’을 내세워 맞서고 있다. 지난 5월 3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1981년 183.6이었던 기업가정신 지수가 2018년 90.1로 절반 아래로 하락했다는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전경련 측은 “규제 완화를 통한 친기업적 경영환경을 조성하는 한편 기업규제 법안은 신중하게 발의할 것”을 요구했다.

2008년 1월 7일 소방관들이 경기도 이천 냉동창고 화재 현장을 수습하고 있다. / 남호진 기자

2008년 1월 7일 소방관들이 경기도 이천 냉동창고 화재 현장을 수습하고 있다. / 남호진 기자

‘기업에 책임 묻는 법’ 논의 지지부진

정부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미온적이다. 사망사고 발생 시 담당 공무원을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이견이 나온다. 실효성 문제를 제기한다. 민주당 관계자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롤모델이 영국의 기업살인법이다. 그런데 영국에서 기업살인법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기업은 대부분 중소기업이다. 기업살인법을 적용하는 비율도 5% 정도에 불과하다. 사업주 처벌은 법 제정 문제가 아니라 법 집행의 문제다. 사업주 처벌 수위를 높이려면 새 법을 만들 게 아니라 기존 산안법을 재개정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전수경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세월호 참사 특조위 조사관은 “현실적으로 몇몇 국회의원의 의지만으로 통과시키기 어려운 법안”이라며 “꼭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수준의 법이 나오려면 정부 여당이 흩어지지 않고 함께 나서야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법이 아니라면 어떻게 안전한 일터를 만들 수 있을까. 강태선 세명대 보건안전공학과 교수는 ‘징벌’보다 ‘예방’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한다. 강 교수는 “행정조직이 주도면밀하게 예방활동을 전개하고 잠정적인 범죄자, 악덕 사업주를 미리 적발해야 반복되는 사망사고를 막을 수 있다”며 “그러려면 전문 인력이 있는 노동자 안전전문기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도 현장 관리·감독 인력의 전문성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영국 기업살인법의 처벌 조항만 볼 게 아니라 전문 기관인 영국 보건안전청(HSE)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현장 전문가가 안전문제를 지적해야 기업도 움직인다”며 “철저한 관리 감독망을 짜놓고 거기서 빠져나간 기업을 강하게 처벌해야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 4월 27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산하 산업안전보건위원회는 중장기적으로 ‘산업안전보건청’의 설립을 포함한 조직 구조 개편을 추진할 것에 합의했다. 산업안전 행정의 전문성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은 과거 노사정위원회 시절에도 한 차례 논의됐다가 합의에 이르지 못한 사안이다. 경영계는 ‘합의는 했지만 확대해석을 하지 말라’는 입장이다. 경영계는 한익스프레스 산재로 규제 기관 신설 논의가 급속도로 진행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경영계 관계자는 “당장 산업안전보건청 도입을 찬성한다는 의미는 아니다”라며 “합의안에는 ‘제재 위주의 사후감독을 지양하고 기업의 자율적 재해 예방 능력 제고할 수 있도록 산업안전보건법을 개편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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