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멈춘 야구, ‘진화’의 계기될까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19세기 중반 영국의 맨체스터 지역은 산업혁명의 중심지였다. 얼룩나방(peppered moth)은 이름처럼 흰 바탕에 후추를 뿌려놓은 듯한 날개가 특징이었다. 흰 나무에 붙어 있으면 나무줄기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보호색이었고, 천적인 새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코로나19로 미국 메이저리그 개막이 연기된 상황에서 LA 다저스의 홈구장 다저스타디움이 텅 빈 채로 있다. / UPI연합뉴스

코로나19로 미국 메이저리그 개막이 연기된 상황에서 LA 다저스의 홈구장 다저스타디움이 텅 빈 채로 있다. / UPI연합뉴스

산업혁명은 석탄을 주원료로 발전했다. 맨체스터 지역의 대기는 석탄을 태울 때 나오는 연기로 점점 더 탁해졌다. 19세기 중반, 기존 얼룩나방과 색이 다른 ‘검은 얼룩나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맨체스터 지역을 중심으로 검은 얼룩나방 개체수는 점점 더 늘었다. 나무가 검게 변했고, 얼룩나방보다 검은 얼룩나방이 살아남기 더 좋은 환경이 됐다. 검은 얼룩나방은 자연선택에 따른 진화론의 대표적 증거였다. 환경의 변화와 이에 따른 선택압(選擇壓)은 종의 변화를 가져온다.

메이저리그 8월 개막도 알 수 없어

2020년 봄, 코로나19는 전 세계를 덮쳤다. 사람들이 모이면, 바이러스는 더 쉽게 퍼졌다. 거리 두기가 필수였다. 한데 모여서 즐기던 스포츠는 모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19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은 스포츠에 치명타였다. 그렇다고 코로나19가 스포츠 자체를 멸종시키지는 못한다. 결국 이겨낼 테고, 스포츠는 돌아온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코로나19가 가져온 선택압은 스포츠에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코로나19가 만든 야구의 진화다.

메이저리그는 지난 2월 15일 스프링캠프를 시작했고, 23일부터는 캠프 시범경기에 돌입했다. 아직까지 미국 본토에 코로나19 관련 상황이 심각하지 않았을 때였다. 2월 29일,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의 위협 단계를 ‘매우 높음’으로 격상시키면서 위기감이 고조됐다. 3월 10일 메이저리그 사무국과 30개 구단은 화상회의를 열어 코로나19 관련 대책을 논의했다. 일단 클럽하우스의 출입을 제한하고, 보건 당국과 긴밀한 연락을 이어가는 수준에 합의했다.

이후 상황이 급격하게 변했다. 미국 내 코로나19 확진자 숫자가 크게 늘었고, 워싱턴주가 단체행사 금지 명령을 내렸다. 메이저리그도 3월 13일, 스프링캠프 중단을 선언했다. 시범경기가 모두 취소됐고, 선수단은 해산했다. 2020시즌 개막은 당초 5월이었다가 6월 이후로 미뤄졌다. 8월에도 개막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야구가 멈췄다. 세계대전과 파업 말고는 이렇게 길게 멈춘 적이 없었다. 2001년 9·11테러가 벌어졌을 때도 야구는 약 1주일 정도만 멈춘 뒤 재개됐다. 전 세계인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코로나19는 야구에도 상당한 규모의 변화를 강제한다. 강력한 선택압이다.

야구는, 특히 메이저리그는 매우 보수적인 스포츠다.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원칙과 전통을 지키는 것에 큰 가치를 둔다. 작은 변화도 ‘야구를 해치는 일’, ‘야구를 야구답지 않게 만드는 일’로 규정된다. ‘야구 위기론’은 오랜 얘기지만, 위기 대응을 위한 변화 가능성 앞에서는 정작 “이게 야구냐”는 대응이 무조건반사처럼 튀어나온다. 아메리칸리그가 지명타자 제도를 도입한 것이 1973년이었지만 여전히 많은 팬은 ‘지명타자 제도’가 야구의 순수성을 해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시애틀을 대표하는 강타자 에드가 마르티네스는 18시즌 동안 통산 타율 0.312, 514홈런, 1261타점 등 누구 못지않은 화려한 타격 기록을 남겼지만 2019년 1월, 간신히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었다. 은퇴 뒤 5년부터 10년 동안 명예의 전당 후보 자격이 주어지는데, 마지막 기회인 10수만에 간신히 이름을 올렸다. 마르티네스가 선수생활 대부분을 지명타자로 보냈기 때문에 ‘반쪽 선수’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었다.

단단한 메이저리그의 ‘껍질’을 코로나19가 깰 수 있을 전망이다. 코로나19에 대한 리그 축소가 현실로 다가온 가운데 2020시즌을 치르기 위한 파격적인 아이디어가 쏟아지고 있다. 아이디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야구라는 스포츠의 ‘생존’ 문제가 걸리면, 변화가 받아들여질 공간이 열린다.

류현진이 소속된 토론토의 로스 앳킨스 단장은 지난 3월 26일 ESPN과의 인터뷰에서 ‘7이닝 더블헤더’를 제안했다. 2020시즌을 치르기 위해 남은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가운데 짧은 기간 동안 많은 경기를 소화하기 위한 대안이다. 야구는 원래 9이닝 동안 승부를 내는 경기지만, 이를 줄여서 7이닝까지만 하고, 하루에 2경기를 치르는 더블헤더를 운영하자는 계산이다. 앳킨스 단장뿐만 아니라 뉴욕 양키스의 애런 분 감독도 ‘7이닝 더블헤더’를 언급하며 수용 가능성을 내비쳤다.

162경기 하려면 ‘7이닝 더블헤더’ 제안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언급조차 되기 어려운 일이다. ‘야구=9’라는 도그마는 야구팬은 물론 메이저리그 종사자들에게 불가침 영역이다.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이 야구 경기시간 단축을 위해 7이닝 경기를 도입하려고 했을 때 대부분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치부했다. “야구는 9의 종목”이고, “7이닝짜리 경기는 야구가 아니다”라고 저항했다. 스트라이크 3개, 아웃카운트 3개, 1번부터 9번까지의 타순 등 야구는 ‘9’로 이뤄진 경기가 맞다. 9이닝을 7이닝으로 바꾸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으로 여겨졌다. 코로나19는 그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균열을 내는 중이다.

메이저리그의 한 부녀 팬이 지난 3월 27일 문 닫힌 뉴욕 메츠 홈구장 시티 필드 입구 근처 바닥에 앉아 있다. / AFP연합뉴스

메이저리그의 한 부녀 팬이 지난 3월 27일 문 닫힌 뉴욕 메츠 홈구장 시티 필드 입구 근처 바닥에 앉아 있다. / AFP연합뉴스

메이저리그는 한 시즌에 162경기를 치른다. 1주일에 6~7경기를 소화하는 정상적인 일정이라면 162경기를 치르는 데 26주가 소요된다. 6월에 시작하면 정규시즌이 12월에 끝난다. 7이닝 더블헤더를 도입해 1주일에 9경기 이상 소화한다면 18주 이내에 162경기를 모두 소화할 수 있다. 이 경우 포스트시즌을 포함해 연내 시즌 종료가 가능하다.

물론 넘어야 할 산은 많다. 선발과 불펜 운영의 기본틀이 바뀌어야 한다. 마무리투수가 7회에 등판하면 선발투수가 굳이 5이닝을 던질 필요가 없다. 5회를 채우지 못한 선발투수는 ‘승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여전히 선발투수의 능력을 평가하는 데 가장 많이 쓰이는 기록인 ‘승리’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선수들도 팬들도 당황할 가능성이 높다.

거꾸로 말 많고 탈 많은 ‘승리투수’ 기록을 이 기회에 뜯어고치는 것도 방법이다. 형식의 변화는 내용의 변화를 가져온다. 야구 통계를 분석하는 세이버메트리션들은 투수의 승리 기록이 지나치게 과대평가돼 있다고 주장해왔다. ‘승리’라는 기록 대신 선수의 가치를 더욱 효율적으로 평가하는 다른 기록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런 변화가 야구를 더 재미있게 만들지도 모른다.

포스트시즌이 꼭 ‘가을의 고전(Fall classic)’일 필요도 없다. 류현진의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는 “크리스마스에 월드시리즈를 치르자”고 제안했다. 메이저리그는 전통적으로 9월까지 정규시즌을 마친 뒤 10월 한 달 동안 포스트시즌을 치른다. 월드시리즈에서 맹활약을 펼쳤던 뉴욕 양키스 레지 잭슨의 별명은 그래서 ‘미스터 옥토버’였다. 2001년 9·11테러로 포스트시즌이 늦춰졌을 때, 월드시리즈 4차전이 연장에 접어들면서 자정을 넘겨 11월 1일이 됐다. 뉴욕 양키스 데릭 지터가 끝내기 홈런을 때리는 순간 중계진은 “미스터 노벰버”를 외쳤다. 처음으로 11월에 열린 경기였다. 그때 그 홈런을 맞은 투수가 애리조나의 마무리투수 김병현이었다.

“크리스마스에 월드시리즈를 치르자”

보라스는 아예 크리스마스에 월드시리즈를 치를 것을 제안했다. 리그가 늦춰진 만큼 굳이 10월의 가을야구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 추운 날씨도 문제없다. 넓은 미국 땅은 12월에도 따뜻한 곳이 많다. 홈 앤드 어웨이를 고집할 게 아니라 중립경기로 치르면 된다. LA 다저스 홈구장 다저스타디움이 월드시리즈 중립경기의 유력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한겨울에도 야구를 할 만큼 따뜻하다. 만약 다저스가 월드시리즈에 오른다면, ‘중립경기’가 아니니까 근처의 에인절스타디움이나 샌디에이고의 펫코 파크에서 치르면 된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크리스마스에 치른 월드시리즈의 우승은 그 어떤 산타클로스의 선물보다 값질 수 있다.

연장 규정에도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쏟아진다. 메이저리그는 끝장 승부 방식이다. ‘야구에는 무승부가 없다’는 게 또 오랜 원칙이자 고집이다. 연장전에서 주자를 1·2루에 두고 이닝을 치르는 ‘승부치기’는 올스타전에 도입됐지만 정규시즌 적용은 언감생심이다. LA 다저스 3루수 저스틴 터너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연장에 들어가면 승부치기 대신 ‘홈런더비’로 승부를 낸다. 터너는 “각 팀에서 강타자 3명씩 나와서 5아웃짜리 홈런더비를 펼쳐서 더 많은 홈런을 친 팀이 이긴 것으로 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굳이 불펜투수를 낭비할 필요가 없고, 경기가 빨리 끝날 수 있다. 경기를 끝까지 지켜본 팬들에게 새로운 재미를 더해줄 수 있다. 홈런더비 전문 스타 탄생도 기대된다.

이들 아이디어는 단축 가능성이 높은 2020시즌에 한시적으로 적용된다는 전제지만, 이참에 아예 메이저리그의 체질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월드시리즈 중립경기, 연장 홈런더비 승부는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낸다. 특히 연장 홈런더비는 정규시즌 적용에 새로운 재미를 안겨줄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7이닝 더블헤더를 야구의 근간을 흔드는 무리한 변화 같지만, 7이닝 야구는 경기시간을 극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다. 사라져가던 크리켓이 다시 영연방 국가들 최고 인기 스포츠가 된 것은 경기시간을 2시간으로 단축한 혁명적 변화 덕분이었다. 경기당 평균 연봉으로 따지면 전 세계 스포츠 리그 중 인도 프리미어 크리켓 리그가 가장 높다.

산업혁명은 얼룩나방의 생태계를 흔들었다. 외부 충격은 종 생태계의 변화를 가져온다. 코로나19는 스포츠를 멈춰 세웠지만, 거꾸로 ‘야구 진화’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야구가 훨씬 재미있어질 수 있는 기회다.

<이용균 스포츠부 기자 noda@kyunghyang.com>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