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활용 뛰어넘어 이젠 ‘새활용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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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윽한 미소를 띤 배우가 커피 한잔을 들고 신제품 출시를 알린다. 때론 생년월일을 나타내는 여덟 자리 숫자와 함께 스타의 얼굴이 눈에 띈다. 여기에는 ‘생일 축하합니다’ 문구가 항상 따라붙는다. 갑옷을 입은 캐릭터들이 ‘초대형 보상’을 준다며 모바일 게임으로 유혹한다. 지하철에서 누구나 한 번쯤 마주쳤을 조명광고는 각양각색이다. 커다란 광고판에는 ‘플렉스’라는 원단을 쓴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플렉스는 잘 썩지 않아 대부분 소각·매립된다. 녹여서 다시 쓸 수 있지만 새로 만드는 게 더 저렴하다. 소각·매립 과정에서 여러 유해물질이 나온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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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보아야 예쁘다. 쓰레기도 그렇다. 자투리 플렉스 원단이 널브러져 있다. 푸른색과 쥐색이 섞인, 밤하늘 같은 원단을 골랐다. 도안을 대고 송곳으로 표시한 뒤 가위로 잘라냈다. 위, 아래, 양옆에 펀칭몰드를 대고 망치를 두드려 구멍을 뚫었다. 원단을 접어 잠금장치를 끼워주면 카드지갑 완성! 가벼운데다 방수까지 된다. 버려지는 것을 다시 활용하면 가치가 낮아진다는 것은 편견이다. 코로나19 여파로 일회용품 사용이 늘어 ‘쓰레기 대란’이 우려되는 요즘 ‘새활용(업사이클)’을 곱씹어야 하는 이유다.

쓰레기, 다시 생각하기

“선거 후 폐현수막, 새활용 기업과 연계하여 재활용 활성화.”

새활용은 환경부가 4월 초 지자체에 보낸 ‘선거용 인쇄물 분리배출 및 폐현수막 재활용 지침’에도 등장한다. 이번 총선부터 정당 또는 후보자가 현수막을 철거한 뒤 수거를 요청하면, 지자체는 이를 생활자원회수센터에 보내 지역 재활용업체나 사회적기업 등에 무료로 제공하도록 했다. 수명을 다한 현수막을 재탄생시킨다는 계획이다. 그간 일부 지자체·사회적기업에선 폐현수막으로 앞치마·줄넘기·장바구니·마대 등을 만들었다. 올해 총선에선 현수막 3만여 장이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별다른 조치가 없다면 바로 ‘쓰레기’ 신세가 된다. 환경부에 따르면 2018년 생긴 현수막 폐기물 9220톤 가운데 3분의 1만 재활용됐다.

지하철 광고판이 카드지갑으로 재탄생하는 과정. 서울새활용플라자 입주기업 큐클리프의 도움을 받아 촬영했다. / 노도현 기자

지하철 광고판이 카드지갑으로 재탄생하는 과정. 서울새활용플라자 입주기업 큐클리프의 도움을 받아 촬영했다. / 노도현 기자

“환경을 생각해서 만든 에코백이 넘쳐나 이제는 에코백이 에코백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녹색연합)는 지적처럼 현수막 규격·수량을 제한하는 등 쓰레기 자체를 줄이려는 조치가 우선돼야 한다. 다만 현시점에서 새활용 문화를 활성화하려는 시도 자체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새활용이란 버려지는 자원을 더 나은 활용가치를 지닌 쓸모있는 물건으로 만드는 자원순환의 한 방식이다. 유리병을 부수고 녹여 또다시 유리병을 만드는 것이 재활용이라면, 유리병을 눌러 접시나 벽시계를 만드는 게 새활용이다.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 소장은 “자원이 순환되는 사회를 구축하려면 자원이 가치 있게 쓰여야 한다. 자원순환의 목적과 개념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 새활용”이라고 말했다.

트럭 방수포로 가방을 만드는 스위스의 프라이탁, ‘이 재킷을 사지 마세요’라는 광고로 알려진 미국의 파타고니아 등이 대표적인 새활용 기업이다. 아디다스가 2024년부터 폐플라스틱을 재활용한 재료만 사용하기로 하는 등 의류업계에서는 ‘지속가능한 패션’ 논의가 활발하다.

국내에선 폐자동차에서 나온 가죽시트로 가방을 만드는 ‘모어댄’, 코오롱FnC의 ‘래코드’가 규모 있는 사업을 하고 있다. 2017년 9월 문을 연 새활용 복합문화공간인 ‘새활용플라자’에는 현수막·커피자루·우유팩·목재 등 폐기물을 이용해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40개 기업이 입주해 있다. 공장에서 버려지는 LED칩을 이용해 양초로 작동하는 램프를 만드는 곳도 있듯 새활용의 범위는 넓다.

하지만 ‘언박싱(unboxing·제품 개봉)’의 희열을 좇는 사회에서 새활용이 설 자리는 좁다. 허승은 녹색연합 활동가는 “자꾸 바꾸라고, 새로 사라고 소비를 조장하는 문화가 오래, 잘 쓰는 문화로 변화해야 한다. 기업들이 자사 제품을 고쳐 쓰는 게 의미 있고, 우리는 이런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소비자들이 그 제품을 선택하는 선순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러 해 전부터 새활용은 하나의 트렌드로 언급됐다. 단순 유행에 그치지 않고 실생활에 녹아들려면 갈 길이 멀다. 산업적 측면에서도 초기 수준이다. 새활용 산업을 지원할 법·제도적 근거부터 느슨하다. 새활용에 대한 개념조차 명확하지 않다. 새활용에 뛰어든 기업들이 소재나 판로를 확보하는 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서울새활용플라자가 각종 소재를 구할 수 있는 ‘소재은행’을 운영하고 있지만 체계를 잡아가는 단계다. 소량을 수공업으로 만들기 때문에 가격이 높다는 한계도 안고 있다.

새활용, 이제 시작

현장에선 기존 산업과의 연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새활용기업 대부분은 소수의 디자이너가 꾸리고 있다. 이들과 숙련된 봉제노동자들과 새활용 디자이너가 만나면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큐클리프의 이윤호 대표는 “기술적인 부분에서 대기업·대학과 연계돼 더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면서 “소재 수급 면에서도 폐기물업체·공공기관 등과 연계가 잘 이뤄진다면 생산이 원활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2016년 문을 연 큐클리프는 폐우산을 비롯해 지하철 광고판, 현수막 등으로 가방·지갑·파우치 등을 만든다. 이 대표는 “친환경이라고 어필하고 싶진 않다”고 했다. 새활용 제품이니까 통하는 게 아닌, 기존 시장에서 디자인·활용 경쟁력을 갖춰 자연스럽게 팔릴 수 있어야 진정으로 새활용이 활성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큐클리프가 판매하는 새활용 제품들 / 노도현 기자

큐클리프가 판매하는 새활용 제품들 / 노도현 기자

올해 서울·경기·전남·충북·제주 등 전국 9곳의 새활용센터가 네트워크를 구축할 계획이다. 서울새활용플라자는 코로나19의 여파로 방문체험이 어려워지면서 온라인 플랫폼 구축에 나섰다. 새활용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DIY 키트를 사고, 새활용 클래스 영상을 볼 수 있는 플랫폼을 올 하반기에 열 예정이다. 새활용플라자 관계자는 “물건이 아닌 라이프스타일을 파는 게 핵심이다. 쓰레기를 소비하는 것에서 쓰레기를 생산하지 않는 삶을 파는 것”이라고 말했다.

홍수열 소장은 “누구나 집안에서 버려지는 것을 이용해 무언가 만들 수 있는 활동이 많아져야 한다”면서 “그렇게 저변을 넓혀가는 속에서 새활용 산업의 기초체력이 강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아직까지 각 지자체의 새활용센터가 설립 초기인 만큼 활동이 불명확하다. 주민과 밀착할 수 있도록 활동을 체계화한 매뉴얼도 만드는 등 바닥부터 튼튼하게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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