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은 한·일전’ 프레임이 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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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서 오프라인 현수막 사용은 불허, 온라인 사용은 가능

“특정정당이 연상된다고 하는데, 현수막에 적용된 빨간색이 미래통합당의 상징색도 아니지 않습니까. 100년 친일청산 현수막은 쓸 수 있다고 했지만….”

4월 9일 오전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아베규탄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21대 총선, 친일정치인 낙선대상자 명단 발표’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친일정치인의 낙선을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권도현 기자

4월 9일 오전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아베규탄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21대 총선, 친일정치인 낙선대상자 명단 발표’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친일정치인의 낙선을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권도현 기자

박준의 광화문촛불시민연대 활동가의 말이다. 선관위 결정에 대한 불만이다. 4월 초 이 단체와 국회국산화운동본부 등이 제작한 ‘투표로 100년 친일청산! 투표로 70년 적폐청산!’ 구호가 적혀 있는 현수막이 광화문과 세종로 일대에 일제히 내걸렸다. 구호 좌측에는 안중근 의사, 오른쪽에는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가 실려 있다. 현수막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이 현수막은 공직선거법상의 제58조 제2항의 ‘누구든지 투표참여를 권유하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규정을 근거로 유권자들이 자발적 성금으로 게시한 것”이라며 “4월 16일 자진 철거할 예정”이라고 적혀 있다. 현수막에는 단체 이름들과 함께 문의처로 휴대폰 전화가 안내되어 있다. 전화를 거니 박 활동가가 받았다.

‘총선은 한·일전’ 현수막 불허, 온라인 가능

지난 3월 30일 단체들의 문의에 선관위는 앞서 ‘친일청산’ 현수막은 특정정당이나 후보에 해당하지 않는 보편적인 내용으로 보고 사용할 수 있다고 결정했지만, 같이 제출한 ‘총선은 한·일전’ 문구는 “해당 문구가 사회적으로 특정정당을 반대하는 내용으로 쓰이고 있어 공직선거법에 위반된다”고 결정했다. 선관위가 제시한 법은 공직선거법 제90조 제1항. 제1항에는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행위를 ‘정당의 명칭이나 후보자의 성명·사진 또는 그 명칭·성명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을 명시한 경우’로 규정하고 있다. 실제 ‘한·일전’이라는 규정이나 관련 현수막 시안을 보면 미래통합당이나 다른 정당을 연상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 선관위의 최종 유권해석이지만 논란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총선은 한·일전이다’라는 문구는 오프라인상 현수막은 사용할 수 없지만 온라인에서는 사용할 수 있다. 공직선거법 제58조 제2항에 규정되어 있는 투표참여 독려행위에서 제한하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에 치러지는 총선을 두고 ‘한·일전’이라는 프레임이 등장한 것은 1년 전이다. 누가 맨 처음 만들어쓴 말인지는 확실치 않다. 검색엔진 등에서 연원을 추적해보면 지난해 2월 즈음부터 온라인에서 폭발적으로 등장했다.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일본상품·관광 불매운동이 시작되기 반년 전부터 나온 표현이다.

엄밀히 말해 선거에서 한·일전은 성립하지 않는다. 공직선거법 제16조에는 국적과 연령, 주소요건을 피선거권의 적극적 요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공직선거 피선거권이 있으려면 대한민국 국민이어야 한다. 외국인은 영주권 취득 여부를 불문하고 피선거권이 없다. 선결요건은 국적을 가져야 한다. 일본과 같은 외국에 살거나 체류하는 재외국민에게 선거권이 주어지지만 역시 대한민국 국적자만 가능하다. 결국 한·일전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국익에 반하는 활동을 하는 자’를 선거를 통해 낙선시키자는 뜻이 된다. 이들을 지칭하는 말로 수년 전부터 등장한 말이 토왜·토착왜구다. 실제 입후보 후보자 중 그런 사람이 있을까.

기자는 지난 2월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을 다루면서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친일후보 청산운동 사례를 언급했다. 기사를 쓸 당시 막 개설된 이들의 낙선운동홈페이지(nonohubo.com)에는 이들이 제보받아 검증한 친일 발언 국회의원 출마자들의 명단과 행적이 공개될 예정이었다. 홈페이지를 체크해봤다. 총 8명의 명단이 선정되어 있었다. ‘싫어요’를 많이 받은 숫자를 기준으로 1위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부터 8위 정미경 전 의원까지 8명은 모두 통합당 후보들이었다. 선정 근거는 언론보도 등을 통해 공개된 이들의 발언이다.

황교안 후보의 ‘상세친일행적’을 보면 국무총리 재임 당시 국회 외교통상위 답변에서 ‘일본이 집단자위권을 발효해 자위대를 파견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구체적 결단이 필요하면 허용할 것’이라고 답변한 사례가 적혀 있다.

명단 가운데 부산에서 출마한 인사는 서병수 전 부산시장(부산진갑)과 이언주(남구을) 의원이다. 서 전 시장의 경우 2017년 12월 언론인터뷰에서 “일본영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설치는 도로법을 위반한 것이고 적절하지 않다”고 발언한 것이 ‘친일행동’으로 꼽혔다. 이 의원은 지난해 개인 페이스북에 올린 “지금 그 시대 사시던 분 다 돌아가셨는데 또 친일파 청산하자고 난리 치며 반일감정을 부추긴다” 등의 정권을 겨냥한 비판 글이 ‘상세친일행적’ 사례로 거론됐다.

이번 선거에서 ‘한·일전’은 정당 간 싸움의 공식의제는 아니다. 최배근 더불어시민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 인터넷방송 ‘다스뵈이다’에 출연해 “이번 총선은 국내 총선으로 위장한 한·일전”이라고 언급한 정도가 전부다. 그러나 바이럴 마케팅 전략에서는 십분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월 5일 <연합뉴스>가 입수한 민주당 ‘21대 총선 전략홍보유세 매뉴얼’ 대외비 보고서에는 “국민이 이번 선거를 ‘한·일전’이라 부른다”며 “통합당은 일본 아베 정권을 옹호하며 일본에는 한마디 비판도 못 한다. 일본 정부에는 한없이 굴종적이고 우리 정부는 비난하기에만 급급한 통합당을 심판해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 3월 초 온라인 단체 국회의원국산화운동본부가 공개한 ‘총선은 한·일전이다’ 현수막 제작용 이미지/김태영 제공

지난 3월 초 온라인 단체 국회의원국산화운동본부가 공개한 ‘총선은 한·일전이다’ 현수막 제작용 이미지/김태영 제공

일본 불매운동 전부터 나온 ‘총선은 한·일전’

타오르는 것은 온라인이다. 민주당 지지 성향 누리꾼을 중심으로 ‘총선은 한·일전’ 온라인 포스터와 문구는 널리 공유되고 있다. “친일을 한 사람이 한 정당에만 있겠는가. 무소속 후보일 수도 있다. 깔끔하게 우리의 의견을 알리고 싶어서 운동을 시작했다. 공식적으로는 내가 대표를 맡기로 되었지만 어느 누가 주도한 운동이 아니다. 촛불을 들었던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가 잘할 수 있는 능력을 기부하는 형태로 시작한 운동이다.”

‘100년 친일청산’ 문구와 함께 ‘총선은 한·일전이다’의 ‘원소스’가 되는 자료를 제작한 국회의원국산화국민운동본부(국국국)의 대표를 맡고 있는 김태영씨(47)의 말이다. 김씨에 따르면 단체의 형식을 띠었지만 엄밀하게 말해 사무실도, 온라인 카페도 없는 개인의 ‘자발적 네트워크’다. 홍보문구 디자인이나 그림, 캘리그래피 등은 관련 업계에서 전문성을 쌓은 사람들이 재능기부로 해결했다. 앞서 광화문촛불연대 등과 현수막 제작에 들어가는 소스는 공유했지만, 그것도 ‘누구나 자유롭게 퍼가서 제작할 수 있는 형태로’ 게시판에 원본 자료를 올리는 형태로 진행했다고 말했다. 단체의 존재나 활동은 3월 1일 서울 서대문 역사문화공원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알리려 했지만 “코로나 정국에서 ‘물리적 거리 두기’를 강조하는 정부 시책에 호응해 온라인 출범으로 대체했다”고 덧붙였다.

울산에 거주하는 김씨는 과거 운동권 출신이거나 사회운동가가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깨달은 것이다. 정의로운 세상이 온 줄 알았는데 여태까지 안 왔던 것이고, 봄이 온 줄 알았더니 혹독한 겨울이 다시 시작된 것이었고….” ‘시민이 깨어나도록’ 촛불을 들고 박근혜 탄핵운동에 참여했다. 세월호 추모리본 달기 운동을 하다가 지난해 드루킹 구속 이후 김경수 지사 재판을 감시하는 사법적폐청산 범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해 몇몇 사람들과 걸어서 대법원까지 간 것이 본격적인 운동의 시작이다. “개인적으로는 그 참여가 노재팬(일본상품 불매운동)이나 소녀상 지키기 운동까지 이어졌다”고 그는 덧붙였다.

“보편인권 인식 없는 낡은 구호” 비판도

‘총선은 한·일전’이라는 규정에 대해 시민사회 진영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광화문촛불연대에 참여하고 있는 주권자전국회의의 한 인사는 현수막의 주장과 관련해 “엄밀히 말하면 국민의 반일감정에 기댄 대중 추수 노선이며 인권보다 계급이나 민족을 우선시하는 과거 진보노선으로, 퇴행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국회의원 국산화라는 비유가 담고 있는 논지는 이해하지만,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허용될 수 있는 구호인지 내부 문제제기가 있었다. 간단히 말해 이자스민 전 의원은 국산화된 국회의원인가 아닌가. 한국에 들어와 있는 수많은 해외 국적자나 귀화자, 이주노동자 인권 문제는 이번 총선에서는 제기되지 말아야 할 이슈인가.”

김태영 대표는 “동전도 양면이 있듯이 사람마다 보는 시각이 다를 것”이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분명 일본과 더불어 잘사는, 공존해야 한다는 시각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내부의 문제다. 과거를 잊자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이것을 ‘반일주의 선동’으로 매도하며 호도하는 사람들이 불행히도 정권을 담당하겠다는 정치세력과 한 뿌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것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부산 시민사회단체와 별도로 전국조직인 아베규탄시민행동도 4월 9일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총선에서 낙선시켜야 할 친일정치인 8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명단은 앞서 노노후보 측과 대동소이하다. 7명이 미래통합당 소속이고 1명이 무소속(윤상현)인데, 그 역시 미래통합당에서 탈당해 이번 총선에 출마했다.

현재까지 미래통합당 측은 공식 대응을 안 하고 있지만 온라인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한·일전 여론은 경계하는 모양새다. 미래통합당의 비례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은 비례 1번 후보로 윤봉길 의사의 손녀인 윤주경 전 독립기념관장을 공천했다. “한국 보수세력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친일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비판에 맞서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윤 후보는 4월 7일 언론인터뷰에서 “언제부터인가 보수의 가치는 친일, 진보의 가치는 항일로 이분법적으로 간주하는데 독립운동은 보수·진보와 무관한 최고의 가치”고 말했다. 그는 “일본 마지막 총독이 한국을 떠나며 친일과 항일이라는 두 개의 대립구도를 만들어 싸울 것이라고 봤는데, (우리 정치가) 일제가 만든 프레임을 아직도 못 벗어나는 것 같아 화가 난다”고 덧붙였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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