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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뿐인 엄벌 의지 이번엔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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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에 대한 분노 뒤에 숨었던 ‘국가의 책임’ 뒷북 대책으로 끝나

텔레그램에서 벌어진 디지털 성착취 ‘n번방’ 사건에 시민의 분노가 들끓자 정부는 분주하게 대응했다. 검경은 앞다퉈 태스크포스(TF)를 만들었다. 경찰은 지방청마다 디지털 성착취 특별수사단을 꾸렸다. 검찰에선 대검찰청 간부가 직접 n번방 사건 조서를 읽고 있다. 법무부는 조주빈씨(25)를 비롯한 n번방 가담자들에게 ‘범죄단체조직죄’ 적용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범죄단체조직죄를 적용하면 무기징역까지 구형이 가능하다는 설명도 했다.

텔레그램에서 디지털 성착취 영상을 판매한 조주빈씨의 신상공개가 결정된 지난 3월 24일 서울 중구 서울역 대합실 텔레비전에 관련 뉴스가 나오고 있다. / 권도현 기자

텔레그램에서 디지털 성착취 영상을 판매한 조주빈씨의 신상공개가 결정된 지난 3월 24일 서울 중구 서울역 대합실 텔레비전에 관련 뉴스가 나오고 있다. / 권도현 기자

되풀이되는 ‘엄벌’ 의지

n번방 가담자의 신상공개가 가능하다는 발언도 이어졌다.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은 지난 3월 25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에서 “n번방 가입자 전체 신상공개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도 4월 1일 KBS 라디오 <김경래의 최강시사>에서 “책임이 중한 가담자는 신상을 공개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시민의 분노가 있었기에 나온 정부의 이례적인 조치였다. 디지털 성착취 가해자들을 향한 분노는 코로나19에 쏠린 여론의 관심을 상당 부분 잠식할 만큼 컸다. 박이대승 불평등과시민성연구소장은 “국가가 디지털 성범죄에 제대로 대처를 못 해 쌓인 분노가 디지털 성착취 피의자 신상공개 요구로까지 터져나온 것”이라고 했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지난 3월 24일 n번방 사건 피의자 신상공개와 엄벌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직접 답했다. 민 청장은 “디지털 성범죄에 무감각한 사회 인식을 완전히 탈바꿈시키고 우리 사회에 더 이상 디지털 성범죄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강력히 제거하겠다”고 말했다.

경찰이 여성대상 범죄를 엄벌하겠다고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여론의 분노가 차오르면, 경찰이 엄벌 의지를 밝히는 패턴은 반복됐다. 정부가 선제적으로 여성대상 범죄에 대응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 민 청장은 2018년 9월 ‘웹하드 카르텔과 디지털 성범죄 산업 특별 수사를 요구한다’는 청와대 국민청원에도 답했다. 당시 웹하드에 올라온 각종 불법촬영물이 웹하드 업체의 묵인 아래 공유된 사실이 드러나 여론이 들끓었다. 민 청장은 “불법촬영물 게시하고 유포한 자는 반드시 검거해 처벌하겠다”고 말했다. 민 청장은 취임 직후 1호 정책으로 여성대상범죄근절단을 신설하기도 했다.

민 청장은 경찰청 차장이던 2018년 6월에도 관계부처 합동 불법촬영물 근절 대책을 직접 발표했다. 민 청장은 “불법촬영물 공급자 수사를 강화하겠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 혜화역 인근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수사 2차 규탄 시위’가 열린 직후였다. 혜화역에는 주최 측 추산으로 여성 4만5000명이 모였다. 여성들은 불법촬영 범죄 엄벌을 요구했다.

아직 여론의 분노가 일기 전인 n번방 사건 초기에도 경찰의 엄벌 의지는 작동하지 않았다. 지난해부터 수면 위에 오른 n번방 사건 피해자들이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수사 착수는 더뎠다. 텔레그램에서 이뤄진 범죄는 추적이 힘들다며 고개를 내저은 일선 경찰서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n번방 가담자의 자진 신고에도 경찰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직접 수사 축소에 반발하며 수사권을 사수하는 검찰도 디지털 성착취 수사·공소유지에는 소극적이었다. 검찰은 n번방 사건 가담자 ‘켈리’가 징역 1년밖에 선고받지 않았지만 항소를 하지 않아 논란이 일기도 했다.

‘시민 분노→엄벌 의지’라는 무한회로가 반복되는 사이 트위터·텀블러·다크웹·텔레그램 사이를 옮겨가며 기생하는 디지털 성착취는 끊이지 않았다.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에 대한 엄벌이 이뤄진 것도 아니었다. 박 소장은 “정부는 시민의 분노가 일 때마다 엄벌 의지를 밝히지만 여성대상 범죄는 반복되고 있다”며 “피의자 신상공개의 경우 경찰이 여론의 분노에 편승해 자신들의 책임을 덜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엄벌에 ‘구체적 대안’도 더해야

초등젠더교육연구회 ‘아웃박스’가 제작한 디지털 성범죄 예방 교육안 일부 / 이웃박스 제공

초등젠더교육연구회 ‘아웃박스’가 제작한 디지털 성범죄 예방 교육안 일부 / 이웃박스 제공

정부가 엄벌 이외 대응에 손을 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정부는 2017년 9월 디지털 성범죄 피해방지 종합대책을 내놨다. 정부는 불법촬영물 유통 차단, 유포자 강력 처벌과 함께 변형 카메라 불법촬영 적발 강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보호 강화, 디지털 성범죄 예방교육 강화 등을 종합대책에 담았다. 2019년 1~2월에는 웹하드 카르텔 대책, 불법 촬영물 사이트 접속 차단 강화대책도 나왔다. 정부는 직장·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근절대책(2018년 3월), 교육 분야 성희롱·성폭력 근절대책(2018년 12월)도 내놨다.

대책은 이어졌다.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은 지난 3월 24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답하면서 디지털 성범죄 인식 개선, 피해자 지원 즉시 강화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n번방 사건 이후 정부가 디지털 성범죄 수사·처벌과 별개로 세부 대책 마련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큰 틀의 대책이나 대안보다는 티가 잘 나지 않는 입법을 챙기고, 구체적인 교육 방안을 만드는 게 지금 시점에서 필요한 정부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시민사회단체 쉐어(Share·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도 지난 3월 23일 논평을 내고 “n번방 사건을 심각한 사회구조적 문제로 인지해 가담자 전원 처벌에 그치지 말고,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며 “교육과 캠페인에 적극 나서고 성에 대한 인식을 근본부터 재편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 남성들의 문화 개선해야

쉐어의 주장은 디지털 성착취 영상을 죄의식 없이 보고 공유하는 한국 남성들의 문화를 개선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한국 남성들의 문화와 인식 개선의 대표적인 방법으로는 교육이 꼽힌다. n번방 사건 다수의 피의자와 피해자도 아동·청소년이다.

정부는 아직 이렇다 할 디지털 성범죄 예방 교육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초등젠더교육연구회 ‘아웃박스’ 소속 황고운 교사는 “아이들은 가르쳤을 때 흡수력이 좋기 때문에 성 관련된 부분도 교육하면 행동이 금방 바뀌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며 “지금은 관련 교육이 수업시수로 정해진 게 아니어서 교사의 역량에 좌우되는 측면이 크다. 제공받는 실질적인 교육 자료도 많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머뭇거리는 사이 교사들이 직접 가안 형태로 교육안을 만들기도 했다. 아웃박스는 지난 3월 30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9장의 카드뉴스 형태로 ‘피해 예방보다는 가해 방지에 힘쓰자’, ‘불법제작물 제작·소비는 성욕 해소가 아니라 중대한 범죄라는 점을 가르치자’, ‘방관자 되지 않기의 중요성을 가르치자’는 등의 내용을 담아 공유했다.

홍영선 대전 둔산경찰서 수사과장

[포커스]그때뿐인 엄벌 의지 이번엔 다를까

“디지털 성범죄 수사 확대는 여성들의 지속적 요구가 있었기에”

경찰은 텔레그램에서 일어난 디지털 성착취 ‘n번방’ 사건에 경찰력을 집중하고 있다. 4월 2일 현재 경찰이 n번방 사건에 투입한 수사 인력만 3118명이다.

경찰이 디지털 성범죄에 수사력을 대대적으로 투입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홍영선 대전 둔산경찰서 수사과장(49)은 2017년 트위터에서 일어난 디지털 성착취 수사를 했다. 그는 당시 대전경찰청 사이버수사팀장이었다. 수사에 투입된 인원은 홍 과장을 포함해 단 두 명이었다. 수사 마무리까지 6개월이 걸렸다. 홍 과장은 “사이버 수사 특성상 피의자·피해자는 전국에 있기 때문에 출장도 수십 차례 다녔다”고 했다.

11개 트위터 계정에서 320여 개의 성착취 영상·사진이 나왔다. 피해자는 30명이 넘었다. 아동·청소년 피해자도 3명이나 있었다. 그는 주범을 구속해 검찰에 넘겼다. 홍 과장은 2018년 국내 최대 규모 성매매 알선 사이트였던 ‘밤의 전쟁’ 수사도 9개월간 이끌었다. 이때 수사팀은 다섯 명으로 꾸려졌다.

홍 과장은 2018년 11월 13일 국회에서 열린 ‘사이버안전 학술세미나’에 참석했다. 그는 디지털 성착취를 엄벌하려면 성폭력처벌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성폭력처벌법상 카메라 등 이용촬영죄에서 규정한 처벌 대상은 ‘다른 사람의 신체를 그 의사에 반하여 촬영한 자’로 한정됐다. 성착취 영상은 대부분 타인의 협박을 받아 스스로 찍기 때문에 카메라 등 이용촬영죄를 적용하기 어려웠다. 2018년 11월 29일 법 개정이 이뤄져 ‘사람의 신체를 촬영대상자의 의사에 반하여 촬영한 자’로 처벌 대상이 확대됐다. 홍 과장은 “디지털 성착취 가담자를 가중 처벌하기 위한 최소한의 법 개정이었다”고 했다.

그는 경찰이 디지털 성범죄 수사에 집중하게 된 것은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한 여성들의 공이라고 했다. 홍 과장은 “경찰에서도 디지털 성착취 영상을 불과 몇 년까지만 해도 음란물로 불렀다. 여성단체의 문제제기로 지금은 디지털 성착취 영상이라고 부른다”며 “경찰이 대대적인 디지털 성범죄 수사에 착수하게 된 것도 여성 시민사회의 지속적인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홍 과장은 2019년 하반기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서 발간한 <여성과 인권>에 쓴 글에서 “청소년 시기 성범죄 피해를 겪은 여성이 있는지 세심하게 살펴봐야 한다”고 썼다. 그는 “2014년 성폭력 전담 수사팀장을 맡으면서 성범죄 피해를 입은 뒤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은 여성 피해자들을 많이 봤다”며 “외국은 살인사건만 일어나도 지역사회를 위해 심리상담가를 40~50명씩 투입하기도 한다. 우리도 피해 당사자와 피해자의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의 트라우마도 국가가 보살펴주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 과장은 경찰 수사만으로는 디지털 성착취를 근절하긴 어렵다고도 했다. 그는 “죄의식을 못 느끼는 어린 피의자들을 보면 학창시절부터 변화된 시대에 맞는 교육이 절실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며 “최근에 논란이 된 n번방 사건도 교육에서 실마리를 하나씩 풀어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원진 기자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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