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제약사 설립 꼭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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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제약사들, 수익성 떨어진다는 이유로 신종 감염병 연구·개발 외면

신종 감염병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1976년 콩고에서 처음 발견된 에볼라 바이러스는 나라에 따라 치사율이 90%에 달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2014~2016년 서아프리카에서만 1만1325명이 에볼라로 숨졌다. 지카 바이러스는 남미에서 100만 명 이상을 감염시켜 수천 명의 소두증 신생아를 낳게 했다. 2009년 신종플루, 2015년 메르스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3월 12일 박원주 특허청장(왼쪽 두 번째)이 서울 금천구에 있는 코로나19 치료제 개발기업 유틸렉스를 방문해 기업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 연합뉴스

3월 12일 박원주 특허청장(왼쪽 두 번째)이 서울 금천구에 있는 코로나19 치료제 개발기업 유틸렉스를 방문해 기업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 연합뉴스

감염병 치료제와 백신이 절박하지만 민간 제약회사는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연구·개발을 외면했다. 이 때문에 에볼라와 지카, 메르스는 여전히 이렇다 할 치료제나 백신이 없다. 연구개발 단계에 있는 치료제 후보 물질들이 있지만 대부분 전염병 관련 국제기구나 미국 내 의료기구에서 공공 용도로 개발된 것들이다.

물론 제약사들도 할 말이 없지는 않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메르스와 사스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전염병은 언제까지 지속될지 불분명하고, 코로나바이러스도 RNA 변이가 쉬워서 개발해도 ‘도루묵’이 될 가능성이 높아 제약사가 상업적인 이유에서 개발을 꺼린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변이 쉬워 개발해도 도루묵 가능성

제약회사들은 특허권을 무기로 의약품 가격을 터무니없이 높게 책정하기도 한다. 실제 2018년 프랑스 제약회사 게르베는 간암 환자의 90%가 투약하는 필수 치료제인 ‘리피오돌’의 공급을 거부했다. 정부는 그해 8월 10㎖당 5만2560원이었던 약값을 3배 이상 올려줘야 했다. 지난해 고어(Gore) 사는 선천성심장병에 걸린 아이의 수술에 필수적인 인공혈관을 가격 문제를 이유로 공급을 거부하기도 했다. 신종플루가 유행할 때 치료제인 타미플루는 특허와 독점에 묶여 여러 나라가 확보 전쟁을 치러야 했다. 꼭 필요한 의약품을 제약사들이 수익성 때문에 만들지 않거나 너무 비싸게 팔아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이 코로나19에서도 되풀이될 수 있다. 이 때문에 필수적인 의약품의 안정적인 생산을 담당할 수 있는 ‘공공제약사’를 설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을 비롯해 민주노총·한국노총·사회진보연대 등이 속한 ‘의료민영화 저지와 무상의료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는 지난 3월 24일 총선 정책의 하나로 공공제약사 설립을 요구했다. 이들은 “코로나19 사태의 종식은 치료제와 백신 공급에 달려 있지만 백신은 감염병의 자연소멸 가능성 등 위험 요소 때문에 이윤창출과 비용회수 전망이 불투명해 민간 제약사들이 생산·공급을 꺼리는 분야”라며 “이를 적시에 안정적으로 생산하고 공급하려면 공공제약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특허는 문제가 안 되지만 수익성이 없어서 생산하지 않는 필수 의약품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공공제약사는 필요하다. 이런 생각에서 문재인 정부도 대선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지금은 사실상 폐기됐다. 정부는 공공제약사 설립보다 필요시 민간 위탁생산을 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식약처 관계자는 “의약품은 제형이 워낙 다양하고 질병의 양상도 다양해 그때마다 국가가 커버할 수 없다”면서 “일단 시장원리에 따라 제약사가 생산하도록 하거나 위탁한 후 정부가 필요하면 예산을 지원하자는 것이 보건부와 식약처의 대체적인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재헌 무상의료운동본부 사무국장은 “공공제약사가 모든 약을 다 만들라는 게 아니라 타미플루처럼 필수 약품이 특허독점으로 공급되지 않는 상황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라며 “신종 바이러스가 유행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민간 제약사가 개발하지 않는 백신이나 치료제를 국가가 책임지고 만들 수 있는 공공인프라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코로나19 치료제는 신약 재창출 방식으로 연구되고 있다. 이미 개발한 약 중 코로나바이러스에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를 찾는 방식이다. 애브비의 칼레트라와 길리어드사이언스의 렘데시비르, 후지필름도야마화학의 아비간 등이 후보로 거론된다. 보건전문가들은 이들 약의 임상시험을 공공이 주도해야 한다고 본다. 현재 길리어드는 국내에서 렘데시비르에 대한 3상 임상시험을 하고 있다. 중국은 수도의과대학이, 미국은 국립보건원 산하 알레르기 및 감염증 연구소가 렘데시비르 임상시험을 주도한다. 반면 한국의 임상시험은 제약사가 주도하는 상업적 임상시험이다.

이동근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정책기획팀장은 “에볼라 치료제로 쓰려다 실패해 거의 버려진 렘데시비르가 코로나바이러스에 효과가 있을 수 있다고 발견한 것은 공공 연구기관들이었다”면서 “그래서 현재 중국과 미국의 임상시험이 물질특허를 갖고 있는 민간기업이 아닌 공공기관 주도로 진행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과 중국의 초기 임상시험 결과가 괜찮아 보이고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퍼지면서 길리어드가 돈이 된다고 판단한 후 갑자기 자기들이 들어와 숟가락을 얹고 있다”며 “임상시험 결과가 하나의 정보이자 권한이 되고, 그 권한을 활용해 향후 강제실시를 위한 협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도 국립보건연구원과 같은 공공이 주도해 임상시험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약사의 특허권 남용 방지해야

전문가들은 최근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 강제실시에 나선 해외 선례를 따라 한국도 강제실시 제한 규정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제실시는 국가비상사태 혹은 공공의 비영리 목적 등을 위해 특허를 가진 자의 동의 없이 강제로 특허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이미 칠레·에콰도르는 코로나19에 대한 강제실시를 인정하는 법제도를 만들었고, 이스라엘은 칼레트라에 강제실시를 했다. 독일은 전염병 예방과 통제를 위해 특허권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할 계획이다. 캐나다는 기존 강제실시 제도 요건을 완화하는 방식으로 개정했다.

김선 시민건강연구소 건강정책연구센터장은 “코로나19로 강제실시가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고, 실제 여러 나라에서 이뤄지거나 검토되고 있다”면서 “한국은 그간 시민사회 주도로 몇 차례 강제실시 시도가 있었지만, 특허청이 기각 결정을 내렸고, 신종플루 이후 강제실시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나온 것은 지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의약품 특허 관련 전문가인 남희섭 변리사(지식연구소 공방)는 “특허권을 강제실시하면 국내 제약사가 약을 만들어야 하는데 국내 제약사들은 보통 신약보다 다국적 제약사의 제품을 수입해서 팔아 다국적 제약사에 찍힐 수 있는 강제실시를 꺼려 한다”면서 “이 때문에라도 공공제약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다수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정부의 공적자금이 들어갔음에도 이후 제약사가 특허권을 독점해 공공 활용의 길이 막히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다국적 제약사의 과도한 특허권 남용이 문제가 되면서 세계보건총회(WHA)는 2019년 5월 의약품을 비롯한 보건의료제품의 연구·개발·임상시험·생산비용·특허자료 등에 대한 전반적인 투명성을 개선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한국은 이를 반영한 어떠한 입장도 내지 않았다.

남 변리사는 “제약사는 자신들이 비용을 내고 특허약을 개발했다고 선전하지만 초기 개발 단계는 대부분 공적으로 이뤄지고, 시장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걸 제약사가 선택해서 임상시험이나 개발 후 단계에서 비용을 대고 특허를 가져간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미국은 공공자금으로 개발된 연구 성과에 대해 민간기업이 특허를 받으면 나중에 국가가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갖도록 법에 규정되어 있는데 국내에선 특허청이 반대해 공적자금을 지원받았다는 표시만 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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