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보다 실감나는 ‘안방 VR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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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은 텅 비었지만, 무대는 활기차다. 강강술래 공연을 선보이는 단원들이 앞뒤 사방에서 관객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 모습에 절로 흥이 오른다. 사물놀이 공연에선 꽹과리와 징, 장구, 북을 두드리는 실연자들의 표정과 박자까지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진다. 국립국악원이 유튜브를 통해 공개한 가상현실(VR) 공연 감상 서비스는 보통의 온라인 공연으로는 뭔가 부족했던 부분을 다른 측면에서 충족시켜준다. 실제 공연장에 가서도 객석에 앉아 무대 쪽 한 방향만 바라봤던 관람 방식 대신 마치 관객이 무대 위에 올라가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해상도가 최대 8K까지 지원되고 촬영 지점도 무대 위이기 때문에 먼 객석에서 보는 것보다 더 또렷하기까지 하다.

국립국악원이 가상현실 영상 콘텐츠로 공개한 ‘설장구춤’의 공연 장면 / 국립국악원

국립국악원이 가상현실 영상 콘텐츠로 공개한 ‘설장구춤’의 공연 장면 / 국립국악원

코로나19 확산으로 급격히 침체한 공연예술계가 첨단 신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360도로 방향을 바꿔가며 무대 위 공연을 코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는 VR 기술이 대표적인 사례다. 국립국악원이 3월 19일 처음 공개한 VR 영상 콘텐츠에는 국악을 다채롭게 경험할 수 있는 사물놀이나 시나위 같은 기악을 비롯해 승무·부채춤·장구춤 등의 전통무용, 판굿·사물놀이 같은 연희, 그밖에 창극과 씻김굿 등 모두 37가지 레퍼토리가 포함됐다. 임재원 국립국악원장은 “향후 공연장을 벗어나 고궁이나 자연경관이 좋은 장소에서 국악공연 VR을 촬영해 이용자가 한국의 주요 장소와 국악공연을 동시에 감상하는 VR 콘텐츠 제작을 기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해상도 8K 지원에 3D 촬영기술 활용

코로나19가 공연계에 불러온 파장은 현재진행형이다. 상반기 국공립과 민간 공연장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신규 공연이 취소 또는 연기됐고, 이미 진행 중이던 공연도 관객 급감으로 일찍 막을 내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국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 통계를 보면 사태의 여파가 본격적으로 미친 3월부터 3주 동안 전국 공연 총매출은 63억원을 겨우 넘겼다. 상대적으로 비수기인 2월 첫 3주간 총매출이 163억원을 넘은 것과 비교해도 크게 못 미친다.

실제 공연을 관람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게 실시간 VR 생중계를 시작한 곳도 있다. 경기아트센터는 당초 2020 레퍼토리 시즌 공연으로 기획됐으나 무관중으로 전환한 공연을 생중계로 공개하고 있다. 5G 통신기술을 활용해 데이터 전송량이 많은 VR 콘텐츠도 생중계가 가능해진 덕택이다. 머리에 써야 하는 VR 전용 장비가 없어도 된다. 3D 촬영기술을 활용했기 때문에 일반 스마트폰으로도 입체감 있는 관람이 가능하다. 스마트폰 화면에 손가락을 대거나 기기를 움직이면 화면 속 시선도 따라 움직여 여러 방향으로 실연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난 3월 21일 열린 경기팝스앙상블의 공연 실황 중계는 얼핏 봐선 TV를 통한 중계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3D 촬영기술이 활용됐기에 더욱 입체적이다. 전자악기와 브라스밴드, 보컬리스트들이 화려한 무대 조명을 배경으로 선보이는 연주와 노래가 라이브 공연을 방불케 한다.

VR 기술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첨단 영상기술을 활용해 공연장 객석 관람과는 차별화된 콘텐츠를 제공하는 시도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안방 1열’이 가장 선호되는 예술 감상 공간이 됐지만, 획일적인 공연 영상으로는 눈이 높아진 관객들을 사로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의전당이 ‘싹 온 스크린(SAC On Screen)’이라는 이름으로 제공하는 공연 영상 콘텐츠는 카메라 10여 대로 촬영한 공연 영상을 편집해 다양한 각도에서 공연 실황을 감상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공연예술 불모지인 지역의 문예회관 등에서 상영하기 위해 영상을 제작했으나 코로나19 확산을 계기로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어디서든 쉽게 접할 수 있다. 안방에서 즐길 수 있는 공연이라 공연장 객석수에 구애받지 않고 더 많은 인원이 색다른 감상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예술의전당이 ‘싹 온 스크린’ 서비스를 시작한 첫날부터 사흘간 진행한 공연에 총 8만4555명의 시청자가 몰렸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피아노 리사이틀>과 연극 <인형의 집> 등 최대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제공하는 시도에 호응이 뒤따르면서 앙상블 디토의 갈라 콘서트와 뮤지컬 <웃는 남자> 하이라이트 영상 등도 추가로 공개된다.

‘랜선 공연’ 또는 ‘모바일 공연’의 장점은 직접 가기에는 먼 지역이나 해외의 유명 공연을 쉽게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국립국악원이 공개한 VR 공연 콘텐츠에 각 지역의 특색을 살린 진주검무·동래학춤 등의 전통예술 공연을 다수 포함된 것도 이 점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국립국악원·예술의전당·경기아트센터 등

해외 유명 오케스트라나 오페라단의 사례도 눈에 띈다. 공연 영상화를 선구적으로 시도했던 베를린 필하모닉은 자국은 물론 전 세계에 공연 영상을 무료로 즐길 수 있게 공개했다. 베를린 필 디지털콘서트홀에서는 회원가입 후 무료 이용 코드를 입력하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시절인 1960년대 후반부터 지난해 취임한 지휘자 키릴 페트렌코의 최신 공연까지 약 600편의 동영상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도 매일 공연 한 편을 무료로 제공하는 ‘나이틀리 메트 오페라 스트림스’ 서비스를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의 빈 국립오페라단도 오페라 영상을 무료 공개했다.

당장은 공연장을 찾기가 꺼려지지만 향후 코로나19가 잦아들면 공연계가 다양한 첨단기술을 활용해 더욱 진보한 공연기술을 선보일 가능성이 크다. 네트워크를 통한 영상·음향 전송에 국한되지 않고 실제 무대를 더욱 다채롭게 꾸며줄 기술을 속속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6일 열린 융복합 무대 기술 매칭지원사업 성과발표회에서는 무대용 실시간 3D 렌더링 기술과 가상 프로덕션·스튜디오, 증강현실(AR) 중계방송 등 공연 제작과 관람의 폭을 넓히는 시도가 소개됐다. 무대 배경이나 극 중 배우의 대화·심리를 홀로그램 등 입체 영상으로 구현하기도 하고, 공연 중인 연주나 무용에 맞춰 다각도의 영상을 동시에 보여주는 등 관객의 몰입도를 높이는 기술이 공개됐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온라인 공연을 비롯해 신기술을 적용한 공연들이 별도의 수익을 만들어내기 어려운 구조라 국공립 공연단체나 공공 지원사업 중심으로만 이 같은 시도가 이어진다는 한계도 있다. 민간 공연예술단체로서는 추가로 투입될 제작비 부담과 당장 손에 들어오는 수익이 미미하다는 점 때문에 시도 자체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위기의 돌파구를 찾기 위한 적절한 지원만 뒷받침되면 공연계 전반의 기획·제작 수준을 높이고 저변을 넓힐 수 있는 반전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온라인 공연을 검토 중이라는 한 공연기획사 관계자는 “당장은 적자를 볼 수밖에 없겠지만 장기적으로 필요한 투자라는 인식이 보편화되고 양질의 공연에 대한 지원이 충분해진다면 공연계 전체가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 있고 상생하는 발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 사태로 취소된 공연 10편을 선정해 온라인 중계와 공연 제작비 등을 지원하는 <힘내라 콘서트> 사업을 진행한 세종문화회관 관계자도 “한국의 대표적 문화예술기관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게 이 사업을 통해 예술단체와 상생과 공존의 발걸음을 이어나가고자 한다”고 밝혔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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