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란·이탈리아, 코로나19 ‘데자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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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록콜록…. (항간에 사망설이 떠도는) 50명의 절반만 숨졌어도 차관직을 내놓겠다. 콜록콜록.”

지난 2월 24일(이하 현지시간) 이란 테헤란에서 열린 공식 기자회견에서 이처럼 기침을 해대며 이마에 흐르던 땀을 연신 닦아내기 바빴던 이라즈 하리르치 이란 보건부 차관. 이란 정부가 꾸린 ‘코로나19 대응 실무단’ 단장을 맡고 있는 그가 기자회견에서 내뱉은 기침 소리를 두고 소셜미디어에는 “아무래도 증세가 수상하다”, “코로나와 싸운다더니 코로나에 걸렸네”라는 등의 농담조의 글이 올라왔다. 아니나 다를까. 회견 다음 날 그는 두 차례 검사 끝에 결국 확진 판정을 받고 격리 조치됐다.

2월 26일(현지시간)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운행 중인 시내버스에 탑승한 한 여성이 마스크를 착용한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 EPA연합뉴스

2월 26일(현지시간)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운행 중인 시내버스에 탑승한 한 여성이 마스크를 착용한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 EPA연합뉴스

‘코로나19 발병국’이 아니었던 이란에서는 2월 19일 60대 남성 확진자 2명이 처음으로 확인됐고, 불과 4시간여 만에 2명 모두 사망했다. 사실상 죽을 때가 다 돼서야 코로나19 진단검사가 실시됐을 정황이 유력해 보인다. 더 나아가 21일 이란 전역에서 실시 예정인 총선을 앞두고 코로나 확산과 방역 실패를 은폐한 것이란 ‘음모론’까지 횡행했다. 첫 발병 확인 일주일 만인 26일 현재 이란은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가 19명에 달해 중국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국가다.

곰, 성지순례객 몰려드는 시아파 성지

이란 내 진원지는 중부 종교도시 곰(Qom)이다. 곰은 이슬람 시아파의 성지 가운데 한 곳으로 8대 이맘 레자의 동생 파티마가 묻혀 있는 곳이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을 이끈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1960년대까지 이슬람 율법을 가르친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란 최대의 이슬람 신학교가 있는 교육도시이기도 해 성지순례객은 물론 유학생이 중동 전역에서 모여드는 땅이기도 하다. 시아파의 맹주답게 이란에는 중동 곳곳의 시아파 무슬림이 성지순례와 신학 공부를 하러 모여드는데 그 중심도시가 곰이다.

이런 곳에서 바이러스가 퍼지다보니 불과 일주일 사이에 이란 31개 주 가운데 절반가량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할 정도로 전염병은 삽시간에 번졌다. 이뿐만 아니라 바레인·쿠웨이트·이라크·오만·레바논 등 인접국에서도 확진자가 40여 명 속출하는 등 곰은 바이러스 확산의 ‘진앙’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코로나19의 발원지인 중국 우한(武漢)은 인구 1100만 명 가운데 약 130만 명이 대학생이고, 시내에 자리 잡은 대학교 숫자만 89개교에 이르는 명실상부한 중국의 교육도시다. 세계 각국의 시아파 유학생들이 모여드는 이란의 곰과 묘하게 겹쳐보이는 풍경이다.

유럽에서는 이탈리아가 무섭게 급증하는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알프스산맥 인근 북부부터 남부 시칠리아섬까지 반도 전체로 바이러스 확산이 진행되고 있다. 그중에 2월 26일 현재 전국 발병자 373명 가운데 258명이 발생한 북부 롬바르디아주가 진원지로 지목된다.

이탈리아는 자국 내에서 중국인 관광객이 확진자로 확인된 1월 말부터 곧바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중국과 연결되는 항공노선을 폐쇄하는 극단적인 조치까지 취했다. 더구나 환자 수가 많은 한국·일본·싱가포르·태국 등과 같이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깝지도 않은 나라다. 이후 2월 중순까지만 해도 독일·프랑스에서 환자가 간간이 발생할 때마다 이탈리아는 ‘무풍지대’로 남는 듯했다. 선제적인 봉쇄 조치가 ‘특효약’이었다는 섣부른 분석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지난 2월 21일 원인불명의 전파 사례 몇 건이 북부 롬바르디아주와 베네토주에서 보고되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환자 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다.

역학조사가 진행 중이지만 뚜렷한 ‘0번 확진자(최초 전파자)’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롬바르디아주 코도뇨에 거주하는 38세 환자로 초점이 모아졌지만 그는 최근 중국을 다녀온 적이 없었다. 중국을 다녀온 친구와 접촉 이력은 있지만 정작 그 친구는 코로나19 검사에서 음성 반응을 보여 전파 경로로 단정하긴 어렵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 로이터연합뉴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 로이터연합뉴스

발병 경로를 거슬러 찾아 올라가는 것은 힘들어도 확산되는 과정은 쉽게 눈에 띈다. 특히 이탈리아 최대의 상공업 도시 밀라노가 있는 롬바르디아주는 예부터 유럽 서부와 동부 그리고 이탈리아반도를 잇는 교통 요충지로 유명한 지역이다보니 바이러스 확산세가 더욱 가팔라진 것으로 보인다. 불과 며칠 새 코로나19 확진자는 롬바르디아주에서 알프스산맥을 넘어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로, 아드리아해를 건너 크로아티아로, 지중해에 떠 있는 이탈리아 최남단 시칠리아섬에까지 전파됐다.

다시 중국 우한으로 돌아가 보자. 우한은 시내를 관통하는 창장(長江)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9개 성으로 길이 뚫려 있어 ‘구성통구(九省通衢)’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사통팔달 뚫린 길을 따라 오가는 사람들과 함께 옮겨다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모습은 유럽 한복판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중국 우한에서 폐렴으로 사람들이 쓰러져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두 달여 만에 세계는 어느 대륙이고 안전한 ‘청정지대’가 사라진 상태가 됐다. 아프리카의 이집트, 남미의 브라질에서도 확진자가 나오면서 이제는 어디서고 갑자기 환자가 급증해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롬바르디아, 유럽 잇는 교통 요충지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2월 26일 “아직 팬데믹(pandemic·세계적 대유행)에는 이르지 않았다”면서 “팬데믹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아무런 실익이 없다. 비합리적인 공포와 낙인을 증폭해 각국의 시스템을 마비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WHO가 그 말에 걸맞게 어떤 일을 해왔는지 돌아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WHO는 세 차례 긴급회의를 개최한 끝에서야 ‘국제공중보건비상사태(PHEIC)’를 선포했는데, 그마저도 중국 눈치보기에 급급해 ‘이동·교역 중단 조치’를 일절 취하지 않아 세계 언론의 질타를 받았다. 이후에도 굳이 앞세울 필요가 없는 “중국의 신속하고 강도 높은 대응을 높이 평가한다”는 식의 칭찬을 줄곧 늘어놓았다. <워싱턴포스트>가 “중국 정부에 대한 극찬으로 일관한 WHO는 ‘신뢰의 위기’를 자초했다”고 지적한 것처럼 WHO를 바라보는 세계 곳곳의 눈길에는 의구심이 어려 있다.

한 달 전으로 돌아가 보자. 2월 3일 스위스 제네바의 WHO 본부에서 열린 기자회견. 이 자리에서도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은 “WHO는 중국의 전염병 통제 능력을 지속해서 신뢰할 것”이라며 “중국 외 지역에서 바이러스의 확산은 아주 적고 (속도가) 느리다”고 했다. 닷새 전인 1월 28일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을 마치 ‘알현’이라도 하듯 만나고 온 직후였다.

그런데 이날 회견 도중 거브러여수스 총장은 몇 차례 “콜록콜록”거리며 기침을 했다. 기침을 진정시키기 위해 물을 벌컥 들이마신 뒤 그는 웃음을 보이며 “괜찮다. 이건 코로나가 아니다”라고 했고, 현장에 있던 WHO 관계자들은 ‘재치 있는 농담’에 폭소를 터뜨렸다.

기자회견장에서 연신 기침을 해대다 확진 판정을 받은 이란 보건부 차관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한편, 한 달 사이 코로나19를 대하는 확 달라진 분위기가 감지된다. 거브러여수스 총장이 상주하는 스위스에는 알프스산맥을 넘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이미 상륙해 있다.

<정환보 국제부 기자 botox@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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