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이야기

봉준호 영화에는 ‘인간 봉준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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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386’이라고 했다. 감독 자신과 기자 모두. 왜 “우울하다”고 했을까.

2013년 <설국열차> 개봉 후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카페에서 봉준호 감독과 마주 앉았다. 인터뷰였다. 열차 안 폭동 장면에서 ‘도끼를 든 진압군’의 복장을 거론하며 기자는 “감독의 개인사가 녹아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진압군의 복장이나 싸우는 방식에서 1980년대 말이나 90년대 초반 폭동진압 경찰의 기본 복장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들은 전문 시위 진압복 같은 것이 아닌 청조끼에 청바지, 그리고 하얀 헬멧을 썼다. 그래서 별명이 ‘백골단’이었다. 영화 속 진압군의 복장은 가죽옷이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 우울한 386들은 가만히 있읍시다. 젊은 애들이 마음껏 즐기게. 그런 것 설명하려 들지 말고. 하하. 우리 세대나 그런 것을 알지, 요즘 대학생들은 모르는 이야기 아니겠어요?” 자신의 영화에 대해 개인사적, 혹은 정치적 해석은 가급적 피하고 싶다는 의사로 읽혔다.

아카데미 영화상 4개 부문을 거머쥔 영화 <기생충> 기자회견이 열린 2월 19일 오전 서울 웨스틴 조선호텔 그랜드볼룸에서 봉준호 감독이 턱에 손을 괴고 질문을 듣고 있다. / 박민규 선임기자

아카데미 영화상 4개 부문을 거머쥔 영화 <기생충> 기자회견이 열린 2월 19일 오전 서울 웨스틴 조선호텔 그랜드볼룸에서 봉준호 감독이 턱에 손을 괴고 질문을 듣고 있다. / 박민규 선임기자

봉준호 감독이 기억하는 학창시절

<옥자>(2017)가 개봉한 뒤 인터뷰는 서울 강남구에 있는 감독의 집 인근 커피숍에서 진행했다. 자신의 단골가게라고 했다. <기생충> 해외영화상 인터뷰에서 그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커피숍을 집필장소로 애용한다고 했다. 영화작업을 마친 다음 그 커피숍을 찾으면 이미 문 닫아 없어진 경우가 태반이라고 덧붙였다. <옥자> 인터뷰 커피숍도 문을 닫았을까.

아카데미상 4개 부문을 휩쓸기 며칠 전, 기자는 그의 학창시절과 얽힌 기억을 개인 소셜미디어(SNS)에 올렸다. 기자는 봉준호 감독의 대학 1년 후배다. 이제 봉 감독은 기자와 학창시절 인연이 있던 사람들 중 가장 유명한 인사가 되었다.

대학 3학년이었던 1990년 6월, 그는 교문 앞 집회현장에서 연행돼 구속됐다. 집회는 오후에 열렸다. 기억 속 그날 오전엔 비가 왔고, 오후엔 햇볕이 쨍쨍 내리쬐었다. 교문 앞 도로 곳곳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물웅덩이가 있었다. 이른바 ‘전투조’로 참여해 화염병을 들고 나가던 그는 끝내 자신이 들고 있던 화염병을 던지지 못했다. 물웅덩이에 미끄러져 넘어진 것이다. 진압하러 진을 치고 있던 백골단들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다. 슬랩스틱 코미디 같았다. 훗날, 과 동문이 모인 자리에서도 그날의 기억은 계속 소환되어 술안주로 오른다. 그대로 끌려가 감옥에 간 상황은 분명 분노나 슬픈 장면이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묘하게 웃기는 상황이다. 웃지만 웃을 수 없는, 요즘 말로 ‘웃픈 기억’이다. 봉 감독의 영화를 보다보면 그런 묘한 블랙코미디가 바탕에 깔려 있다. 이른바 ‘삑사리의 미학’이다. 영화 <괴물>의 절정부에서 박해일이 화염병으로 괴물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는 결정적인 순간, 그의 손에서 화염병이 미끄러진다. 감독의 개인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장면의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장면은 또 있다. 영화 <기생충> (2019)에서 기정네 가족은 가사도우미 문광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문광의 심한 복숭아 알레르기를 이용한다. 이 역시 지인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실제 이야기다. 감독은 지난해 11월 레딧 영화팬들과의 AMA(Ask Me Anything), 그러니까 영화에 대한 질의응답 코너에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대학동기 중 한 명이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모두 그게 농담인 줄 알고 그에게 던지려고 복숭아를 샀는데, 실제 그 친구의 온몸이 빨개졌습니다. 다들 충격을 먹었고, 굉장히 미안해했습니다. 아, 저는 복숭아를 던지지 않았어요. 제 이야기는 아닙니다.” 88학번 동기 MT 일화다. 봉 감독이 내놓는 이야기에서 많은 부분은 실제 있었던 사건에서 비롯된다. 실화는 봉준호의 영화 세계에 들어가선 변주되어 재구성돼 배치된다.

영화 <기생충>을 만든 봉준호 감독과 배우들이 20일 오전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기생충> 제작진 및 출연진 격려 오찬 시작 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오른쪽 둘째는 봉 감독이 어려웠던 시절 도움을 받은 대학 동기 육성철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 행정관이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영화 <기생충>을 만든 봉준호 감독과 배우들이 20일 오전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기생충> 제작진 및 출연진 격려 오찬 시작 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오른쪽 둘째는 봉 감독이 어려웠던 시절 도움을 받은 대학 동기 육성철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 행정관이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일단 이야기가 만들어지면 최선을 다한다. 그는 페이스북·싸이월드·블로그와 같은 개인 SNS 활동은 아예 안 한다. 대부분의 시간을 영화 공부에 쓴다. 단순 영화광은 아니다. 자신이 구축한 작품세계의 디테일을 채워 넣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영화만이 아니다. 봉 감독의 세계 구축에서 현실세상에 대한 취재는 필수다. 어찌보면 기사작성과 비슷하다. <괴물>을 찍을 때 미군기지 오염실태를 알기 위해 취재수첩을 들고 문제를 제기한 환경단체 녹색연합을 방문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2월 19일 <기생충> 기자회견에 참석한 한진원 작가는 “감독의 지휘 아래 가사도우미·운전기사·아동심리학 교수 등을 만나 취재했다”고 밝혔다. 그는 봉 감독과 함께 <기생충>의 시나리오를 썼다.

촬영 앞서 구축한 ‘봉준호 월드’

봉 감독은 기자와 인터뷰에서 실제 영화를 찍을 때 “거의 1000커트를 넘은 적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괴물>은 800여 커트, <마더>는 600여 커트 만에 찍었다. 촬영 회차 수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괴물>과 <살인의 추억>은 100회 차를 넘겼지만, 최근작 <옥자>와 <기생충>은 둘 다 77회 차로 마무리되었다. ‘제법 잘 찍는다’는 유명 감독의 절반 정도 수준이다. 2018년 5월 촬영을 시작한 <기생충>은 그해 9월 마무리됐다. <기생충> 기자회견에서 봉 감독은 “영화 개봉 후 각종 영화제 캠페인이 영화촬영 기간보다 더 길었던 셈”이라고 말했다.

봉준호 감독이 학창 시절인 1990년 그린 만화 <농활야사>. 훗날 봉 감독 영화연출 형식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 지인제공

봉준호 감독이 학창 시절인 1990년 그린 만화 <농활야사>. 훗날 봉 감독 영화연출 형식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 지인제공

커트 수나 회차가 적다는 것은 영화를 찍기 전에 이미 영화 속 세계가 그의 머릿속에 완벽히 세워져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완벽성을 추구하는 내면의 강박성을 밖으로 드러내는 경우는 실제 별로 없다. 그는 기자와 예전 인터뷰에서 “대부분 테이크는 5번에서 10번 사이에 다 결정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현재까지 가장 많이 찍은 테이크는 <마더>에서의 30테이크다. 김혜자 배우가 분노하며 “우리 아들은 아니거든요” 하는 장면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답은 콘티다. <플란다스의 개> 인터뷰 때 그는 “영화감독이 되지 않았다면 평론가나 만화가의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연출 스타일은 영화감독마다 다 다르다. 봉 감독은 콘티를 배우들에게 제시한다. 콘티엔 기본적인 동선과 동작들이 다 들어가 있다. 일반인도 확인 가능하다. 지금까지 나온 영화들 대부분의 콘티나 각본은 출판돼 시중에 나와 있다. 콘티를 읽다보면 영화의 전체 제작공정과 세부 디테일을 감독이 거의 완벽히 통제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서 주제는 “어떤 스토리와 사건에 꽂혀 막 가다보면” 자연스럽게 나온다고 말한다. 주제를 먼저 정해놓고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작품 구상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캐릭터 설정이다.(그는 영화 속 캐릭터들을 ‘내 새끼들’이라고 표현했다) 캐릭터 설정은 구체적인 사람들을 떠올리며 한다. <설국열차>의 박두만이나 <기생충>의 기택은 처음부터 배우 송강호를 염두에 두고 작업했다.

기자는 지난해 <기생충> 리뷰에서 그의 학창시절 작품 <농활야사>(1990)를 박스기사로 소개했다. 14페이지짜리 만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작화 실력은 상당하다. 지금에 와서 이 작품을 다시 보면 봉준호 감독 영화연출의 어떤 원형이 들어 있다. 농활에 간 대학생들이 끓이는 찌개 속에서 삶아진 개구리. 밥을 먹던 학생들은 모두 경악하면서 인트로가 시작된다. 개구리는 어떻게 찌개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을까. 미스터리는 살짝 감춰지고 농활 활동 에피소드들이 이어진다. 만화의 마지막 부분, 개구리 사건의 진실 폭로는 저지되지만 작가는 힌트를 덧붙인다. 페이지를 넘기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게 만드는 힘, 그러니까 연출력이 돋보이는 만화다.

영화 <살인의 추억> 촬영 현장. 대학가 시위 장면에 봉준호 감독의 선후배 동기들이 엑스트라로 참여했다. / 지인제공

영화 <살인의 추억> 촬영 현장. 대학가 시위 장면에 봉준호 감독의 선후배 동기들이 엑스트라로 참여했다. / 지인제공

중흥면 산양리 37-2번지. 영화 <옥자>에서 옥자와 주인공 소녀가 살던 집 주소다. 화면에 스치듯 노출된다. 감독에게 실제 있는 집의 주소냐고 물었다. 감독의 답이다. “원래 그런 데 전화번호나 주소는 실제 없는 것을 쓰는 것이 예의다. 실제 있는 것을 쓰면 피해가 간다. 옛날 드라마나 영화에서 실수로 스태프가 자기 휴대폰 번호를 썼다가….” 꼼꼼하게 준비된 디테일이다. ‘봉테일’은 그에 붙은 대표적인 별명이다.

봉 감독은 기자와 인터뷰에서 “봉준호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장면이나 소재는 다 의미가 있다”고 하는 신화가 ‘봉테일이라는 별명의 대표적인 폐해’라고 했다. “매사에 다 모든 것이 의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니까 나오는 폐해다. 영화는 사실 육체적으로 느껴야 한다. 내가 만드는 영화는 무슨 의도를 가지고 만드는 퍼즐이 아니다. 물론 풍부하게 해석해주는 것은 감사하다. 그렇지만 그렇게 상징이나 의도가 개입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옥자>의 영화 인트로에서 주인공 소녀가 입으로 바람을 불어 하수오 열매가 날아가는 숏이 있는데, ‘아, 아름답구나, 나는 언제 저런 것을 해봤나’ 그렇게 관객들이 느끼길 원했는데 엉뚱한 해석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봉테일’이라는 별명이 주는 부담

봉테일, 그러니까 봉준호 감독 영화에 대한 과도한 해석의 폐해는 정반대로 이른바 블랙리스트 논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MB·박근혜 정부 때 작성된 ‘문화계 균형화 전략’ 등의 블랙리스트 문건을 보면 그가 연출한 <살인의 추억>은 “경찰을 비리 집단으로 묘사, 부정적 인식을 주입했다”고 되어 있고 <괴물>은 “반미 정서와 정부 무능을 부각해 국민의식을 좌경화”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감독은 문건 논란 당시 블랙리스트에 등재된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바쁜 사람들이 할 일도 없이 그런 것을 왜 만드느냐”라며 “<괴물>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괴수영화일 뿐인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봉 감독 스스로가 관객이나 평론가들과 일종의 게임을 하는 것 같다.” 만화·영화평론가 나호원씨(단국대 영화전공 강사)의 말이다.

“봉준호 감독이 내놓는 영화를 보면 영화는 일종의 즐기기 위한 텍스트로 만드는데, 모든 사회적 맥락을 빼놓고 보더라도 그 영화는 즐거워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보다가도 어느새 ‘뭔가 메시지가 있네’라고 느끼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다빈치 코드식 디코딩이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영화 <괴물>에서 괴물이 단순히 괴물이 아닌 권력이나 부조리, 국가시스템이나 자본, 자궁이나 자궁콤플렉스 등 온갖 유비로 읽는 것이 대표적이라는 것이 나씨의 설명이다. “오스카 수상소감에서 ‘텍사스 전기톱’을 거론한 것도 자기 작품에 대해 너무 심각한 해석을 하지 말아달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봉 감독의 작품들은 처음부터 블랙코미디로, 미국 기준으로 보면 외국 감독이지만 2000년대 한국상황을 몰라도 10년 후나 20년 후에도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남기를 감독은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봉 감독 수상에 열광하는 현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여 꼬집었다. “사실 이번이 아니더라도 봉준호 감독의 수상은 국내외 영화계에서는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칸 영화제 때부터 한국에서는 봉 감독이 수상하면서 국위선양 되었다고 갑자기 호들갑을 떨었는데, 봉준호 영화들이 꼬집었던 것들이 한국사회의 그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아니었나.” 아카데미 수상 이후 급작스레 일어난 신드롬이 오히려 봉 감독이 풍자했던 영화 속 세상 같다는 지적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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