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한·러 수교 30주년을 맞아

(3) 동아시아를 넘어 유라시아 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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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지역통합론에 한국이 두 대륙 평화공동체 다리가 되어야

한·러 수교 30주년 기념 칼럼의 마지막에 좀 큰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러시아 전문가들은 큰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는데, 이는 다분히 러시아 탓이다. 모스크바에는 ‘차르 종’이라는 게 있다. 무게가 무려 200톤, 세계에서 제일 크다. 그래서 울릴 수가 없다. ‘차르 대포’도 있다. 역시 세계에서 제일 큰데, 그래서 쏠 수가 없다. 세계 육지의 6분의 1에 달하는 거대한 영토와 무관하지 않을, 규모에 대한 이 러시아식 강박은 사상과 비전의 영역에서는 허황될 정도의 거창함과 무모함으로 발현된다.

[특별기고 : 한·러 수교 30주년을 맞아](3) 동아시아를 넘어 유라시아 시대로

이론상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후에야 가능할 사회주의로의 도약이 국민 대다수가 농노인 제정러시아에서 현실화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러더니 어느 날 갑자기 앞뒤 잴 것 없이 일단 소련부터 날려버리고 자본주의로 방향을 틀었다. 모스크바의 4분의 3을 활활 태워 나폴레옹의 세계정복을 좌절시켰고, 무려 900일의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봉쇄를 견디며 히틀러의 진격에 종지부를 찍었다.

정치사뿐만이 아니다. 톨스토이는 비폭력을 정당방위조차 허용치 않는 극한까지 밀어붙였고, 여든이 넘은 나이에 새 삶을 찾아 가출했다가 객사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라스콜니코프를 내세워 누구도 의심치 않던 합법적 폭력(법)의 신화를 겨냥해 도끼부터 휘둘렀고, 두 명을 죽이고도 끝내 반성하지 않았다. 말레비치는 오로지 절대와 궁극에 대한 염원으로 조형과 구상의 미술사 전체를 검은 사각형 하나에 묻어버렸다.

러시아인은 허무맹랑할 정도로 무모하고 거창한 도전을 자주 했고, 대개 실패해 비웃음을 샀지만, 간혹 성공한 도전으로 인류사 전체를 도약시켰다. 이 도약은 대부분 실용성과는 거리가 있다. ‘불가능한 가능성’을 향한 도전의 가치란 본디 윤리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지정학에 근거한 글로벌 패권 도전

소련이 무너지고, 냉전체제가 종식되고, 미국의 패권이 조정되는 과정에서 ‘지정학의 부활’이란 말이 자주 들린다. 글로벌 패권에 도전하는 국가들의 주요 전략이 지정학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일대일로’,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 미·일의 ‘인도·태평양 구상’이 대표적이다. 주목할 점은 이 거대국가 서사들 공히 일국의 발전전략을 넘어 일종의 ‘문명 기획’으로 제출되었다는 사실이다.

어지러울 정도의 중국 굴기를 목도한 후, “20세기 말에는 자본주의가 중국을 구원했지만, 21세기에는 중국이 자본주의를 구원할 것이다”란 말이 돌았다. 베이징 컨센서스·중국모델론 등이 이를 대표한다. 그에 따르면 일대일로를 따라 걷는 길은 ‘자본주의 이후’에 대한 ‘중국의 길’이 인류 문명에 갖는 보편성과 가능성을 시험해보는 경로나 다름없다.

러시아의 유라시아통합론은 표면적으로는 소련을 공유했던 나라들의 역사적 실존에 근거한다. 하지만 보다 근원적으로 이것은 동과 서,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있는 러시아의 문명적 실존에 바탕을 둬 발틱에서 태평양까지를 아우를 문명 기획으로 제출됐다. 미국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로 동력을 잃은 아·태 지역 미·일 협력을 보완하며 양국이 추진해온 인도·태평양 구상 역시 두 대양, 두 대륙의 결합이 창출할 ‘위대한 문명의 약동’을 꿈꾼다.

세 문명 기획의 지리적 공간은 공히 ‘유라시아’다. 러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의 일대일로, 특히 ‘일대’는 유라시아를 관통한다. 인도·태평양 구상은 아베 1기 내각의 ‘자유와 번영의 호(弧)’에 기원을 두는바, 그것은 ‘유라시아 대륙을 둘러싸 자유의 고리를 확대해 번영의 지대를 형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유라시아연합을 향해 동진하는 러시아, 일대일로를 따라 서진하는 중국, 두 대양을 잇는 호 위로 북진하는 일본은 이렇듯 ‘유라시아’에서 만난다.

동아시아 주요 행위국이 지역 차원의 미래비전 속에 펼쳐보이는 이들 문명 기획은 한결같이 구성국 간 평등과 호혜를 약속한다. 물론 이는 정치적 수사에 불과할 수 있다. 지역주의와 제국주의 사이의 거리는 단지 한 발짝이며, 최근의 지역통합론은 ‘21세기판 제국론’이라는 비판은 이 지점을 겨냥한다. 특히 중·일·러 세 나라 모두 실제 제국의 경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거대서사 뒤에 아·태 지역을 중심으로 미국이 주도해온 기존 동아시아 지정학에 대한 도전, 중국에 대한 견제 등 다양한 목적이 중첩돼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발언하는 순간, 비록 수사일지라도 최소한의 힘은 발휘되게 마련이다. 더구나 정치 전략의 성패는 그 비전의 정당성을 향한 인정 투쟁과 분리될 수 없다. 본디 ‘패권’ 개념의 핵심도 ‘가치와 의미에 대한 동의로 확보되는 힘’에 있지 않은가(그람시). 그렇다면 삼국의 문명 기획과 짝을 이룰 한국의 대안은 무엇인가.

한반도가 내세울 키워드는 ‘평화’

그간 한국 정부는 신북방정책을 통해 중국의 일대일로 및 러시아의 유라시아통합론과, 신남방정책을 통해 인도·태평양 구상과 조화를 도모해왔다. 분단·북핵 문제를 껴안은 한반도가 세계로 발신 가능한 키워드는 누가 뭐래도 ‘평화’다. 그렇다면 이제는 ‘유라시아평화공동체’다. 평화의 시야로 동아시아를 넘어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를 때다.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 보자. 흔히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 하면 푸틴의 유라시아(경제)연합을 떠올린다. 한·러 수교 30주년인 올해, 한-유라시아경제연합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도 예정돼 있다. 하지만 유라시아주의는 한 세기에 달하는 담론의 역사를 가진 러시아의 대표적 문명이론이다. 유라시아연합론은 그것의 극히 일부거나, 심지어 왜곡에 가깝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20년대 유럽의 러시아 망명자들이 주창한 유라시아주의는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영토, 슬라브부터 투르크 민족까지 아우르는 다민족성을 근거로 러시아에 유일하게 가능한 정치적 형식이 국민국가가 아닌 ‘제국’임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들이 건설하고자 했던 유라시아 제국은 기존 제국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반제국주의적 제국’, 즉 ‘구성 민족들의 소망으로 건설되는 평등과 호혜의 제국’이었다. 현재 ‘소련의 부활’이란 혐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푸틴의 유라시아연합론과 그 표면적 수사 이면에는, ‘제국 부정을 통한 제국의 구원’이라는 ‘불가능한 가능성’에 기탁해 제국을 합법적 국가성의 형식으로 정화(淨化)하고자 했던 열망의 서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열망의 서사는 지구화 시대 국민국가의 심각한 위상 변화로 야기된 새로운 정치공동체에 대한 요구, 이와 무관할 수 없는 거대지역통합론의 출현을 예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대일로나 인도·태평양 구상을 장식하는 정치적 수사 이면에도 이런 열망의 서사가 존재할지 모를 일이다.

한국이 한반도 평화로부터 유인될 유라시아평화공동체를 선도하며 이 열망의 서사들을 잇는 다리가 되어 유라시아를 배경으로 제출된 지역통합론들이 확대된 국가주의가 아닌 진정한 문명 기획으로 상호경쟁하도록 견인할 수는 없을까. 물론 이 허황하고 거창한 도전은 아마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도전 없이 도약은 불가능하며, 도전의 가치는 결과가 아닌 과정의 윤리에 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수교 30년을 맞은 현재 우리가 러시아 문명에서 배워야 할 가장 큰 교훈일지 모르겠다.

*이번 회를 끝으로 시리즈 연재를 마칩니다.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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