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관세율 513% 유지로 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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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O 탈개도국 이후 농정… 공익형 직불금은 첫걸음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한 것이지 농업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정부는 2019년 세계무역기구(WTO) 농업 분야 개도국 지위를 포기한다고 방침을 정하면서 반발하는 농업계를 이렇게 설득했다. 농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개도국 지위보다 국가의 협상능력이 중요하며, 정부는 충분한 협상능력을 갖고 있고, 후속대책을 세우겠다는 의미다. 정부는 두 가지 과제를 달성하며 농업계와의 약속이 공언만은 아님을 보여줬다.

전국농민회총연맹, 가톨릭농민회 등으로 구성된 ‘농민의 길’ 회원들이 농업인의 날인 2019년 11월 11일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WTO 농업 분야 개도국 지위 포기 무효 등을 촉구했다. / 김기남 기자

전국농민회총연맹, 가톨릭농민회 등으로 구성된 ‘농민의 길’ 회원들이 농업인의 날인 2019년 11월 11일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WTO 농업 분야 개도국 지위 포기 무효 등을 촉구했다. / 김기남 기자

우선 쌀 관세화율을 기존 수준인 513%로 지켰다. 5%의 저율 관세로 일정 물량을 의무 수입하는 ‘저율관세할당물량(TRQ)’은 현재와 같은 40만8700톤으로 유지되며, 밥쌀용 쌀 수입 의무가 추가되지 않았다. 최근 WTO 쌀 관세화 검증협의에서 결정한 내용이다.

한국은 1994년 타결된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서 쌀 시장 개방(관세화)을 유예하는 대신 정부가 밥쌀용 쌀을 일정 분량 의무적으로 수입해왔다. 유예기간 종료로 2014년 관세화를 선언하며 관세율 513%를 WTO에 통보했다. 밥쌀용 쌀 수입 의무규정은 삭제했다. 한국에 쌀을 수출할 수 있도록 시장은 개방하되, 높은 관세장벽을 설정한 것이다. 그러나 주요 쌀 수출국으로부터 무역장벽이 높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미국·중국·호주·태국·베트남은 쌀 관세율을 200~300%로 낮추고 밥쌀용 쌀도 전체 수입량의 30%로 확대하라고 요구했다.

쌀 관세화율과 의무 수입량은 유지

정부는 이번 협상에서 관세장벽 철폐를 요구하는 수출국들에게 안정적인 대(對)한국 쌀 수출물량을 보장해주는 전략을 택했다. 2015~2017년 한국에 대한 쌀 수출 점유율을 기준으로 TRQ에서 국가별 쿼터를 배분한 것이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고율 관세를 비판하는 5개국이 실제로는 시장점유율에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2021년부터 중국 15만7195톤, 미국 13만2304톤, 베트남 5만5112톤, 태국 2만8494톤, 호주 1만5595톤의 TRQ가 매년 배정된다. 대신 이들 국가는 2021년 1월 13일까지 쌀 관세화율에 대한 이의를 철회한다.

이번 협의 결과는 차기 WTO 협상 결과가 새로 적용되기 전까지 유효하다. 차기 WTO 협상은 언제 열릴지 알 수가 없다. 2001년 시작된 도하개발아젠더(DDA) 협상이 2006년 사실상 중단된 이후 현재까지 진전이 없는 상태다. 쌀 관세율은 DDA 이후의 차기 협정에서 새로 정하는 것이다. 정부가 WTO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면서 자신감 있게 나섰던 배경이다. 탈개도국 선언 이후 첫 번째 과제여서 정부가 WTO 체제의 허점과 상대국들의 요구를 이용해 선방한 셈이다. 정부가 WTO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면서 도리어 협상력이 커졌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성과는 ‘공익형 직불제’ 도입이다. 쌀 관세율이 외국과의 직접적인 통상문제에 대한 대응이라면 공익형 직불제는 농업정책을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공익형 직불제의 경우 아직까지는 ‘노란불’이다. 첫걸음은 뗐지만 서둘러 도입돼 제도가 온전히 만들어지는 과정을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공익형 직불제는 2019년 12월 국회가 ‘농업소득의 보전에 관한 법률 전부개정안’을 통과하면서 만들어졌다. 오는 5월 1일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기존의 쌀 농가에 지급되던 쌀 직불변동금은 2019년 생산분까지만 지급한 뒤 공익형 직불금으로 대체된다. 밭농업 직불제 등 여타 보조금도 공익형 직불제에 포함된다.

공익형 직불제는 기존의 관세 및 쌀 직불금과는 지원 논리가 다르다. 관세는 직접적으로 가격에 영향을 주는 정책이다. 쌀 직불제는 정부가 목표한 쌀의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농가에 보조금을 주는 정책이다. 개도국 지위 선언을 탈피한 이상 국가가 가격에 개입한다면 통상분쟁이 제기될 가능성이 높다.

공익형 직불제의 경우 농업의 공익적 기능에 고려한 보조금이다. 관련법은‘식량의 안정적 공급, 국토환경 및 자연경관의 보전, 수자원의 형성과 함양, 토양유실 및 홍수의 방지, 생태계의 보전, 농촌사회의 고유한 전통과 문화의 보전’ 등을 농업의 공익적 기능으로 밝혔다. 농업은 시장원리에 따라 개방하고 가격에 국가가 개입하지는 않지만, 농업이 공익적 기능을 갖고 있어 지원한다는 것이다. WTO가 선진국에도 허용하는 보조대상(그린박스)에 해당한다. 한국은 이 직불금만큼은 여전히 충분히 늘릴 여지가 있다.

공익형 직불금, 5월 1일부터 시행

기존의 쌀 직불금은 농가의 생산면적 및 생산량에 비례해 지급해 부농에게 유리한 역진적 제도라는 비판이 있었다. 공익형 직불제는 ‘기본형 직불제’와 ‘선택형 직불제’로 나누고, 기본직불제는 소규모 농가에 일정 금액을 지급하는 소농직불제와 농지 면적을 기준으로 역진적 단가를 적용하는 면적직불제로 나뉜다. 기존 직불제의 역진성을 해소하기 위한 장치다.

문제는 대략의 윤곽은 잡혔지만 서둘러 도입하다 보니 세부적인 사안이 시행령에 맡겨졌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농업인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가령 직불제 지급 근거로 명시된 ‘생태계의 보전’, ‘고유한 전통과 문화의 보전’ 등에서 전통이 무엇인지, 문화가 무엇인지 등의 규정도 시행령에 내맡겨진다는 것이다. 재배방식과 소득이 다양한 작물들의 직불금 지급 기준을 어떻게 산정할지도 과제다. 5월 1일에 시행하려면 4월 중 시행령이 만들어져야 한다.

예산도 넉넉하지만은 않다. 공익형 직불제의 예산은 올해 2조4000억원이 늘었다. 2019년보다 1조원가량 늘어났다. 대폭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2019년 쌀 직불금 예산 1조4900억원이 거의 집행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늘어난 금액이 많다고 보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농업인들이 납득할 만한 시행령을 제정할 수 있을지 여부다. 정부가 지난해 WTO 개도국 지위를 포기한다고 방침을 정했을 때 농업계에서 ‘세계화 트라우마’를 떠올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WTO 출범 이후 농가는 시장개방과 폐업 등 구조조정 압력에 직면했다. 정부가 대형농을 육성했지만 이는 설비투자 과정에서 많은 농가가 부채를 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WTO가 출범한 1995년부터 2018년까지 국내총생산(GDP)은 약 3배 성장했지만 농업소득은 23.4% 늘어나는 데 그쳤다. 한 농업단체 관계자는 “농업인 내에서도 WTO 개도국 유지가 능사는 아니라는 인식도 일부 있었지만 정부에 대한 불신 때문에 목소리 내기 어려웠다”고도 전했다.

김규호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이슈와 논점> 1648호에 실린 ‘농업·농촌 공익기능 증진 직접지불제도 도입 의미와 과제’ 보고서에서 “공익직불제의 법제화는 다소 다급하게 전개된 감이 있으며, 제도의 시행일(5월 1일)까지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농식품부와 농업계가 허심탄회하게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야 할 시점이며, 지금껏 미진한 논의가 있었다면 치열하게 토론하고 합의를 도출하여 제도를 보완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은하 경제부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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