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브리그 달구는 ‘대박 제조기’ 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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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브리그.’ ‘야구의 한 시즌이 끝나고 다음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기간’을 뜻하는 말이다. 이 기간 선수들의 계약은 물론 여러 건의 트레이드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겨울철 스토브(난로)를 둘러싸고 팬들이 이런저런 평판을 한다는 데서 유래한 표현이다.

미국의 슈퍼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 / 연합뉴스

미국의 슈퍼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 / 연합뉴스

메이저리그의 스토브리그는 뜨겁기로 소문이 나 있다. 그런 스토브리그를, 뜨겁다 못해 살이 델 정도로 달구는 사람이 한 명 있다. 선수들에게는 ‘천사’와 같지만 구단들에게는 ‘악마’와 다름없는 ‘슈퍼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67)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지난 10월 발표한 스포츠 에이전트 파워랭킹 순위에서 보라스는 모든 에이전트를 통틀어 2위에 올랐다. 오직 세계 최고 축구 에이전시인 ‘스텔라 풋볼 Ltd’의 창업자 조나단 바넷만이 보라스를 앞섰다. 물론 야구 에이전트 가운데서는 독보적인 1위였다.

선수에서 에이전트가 되기까지

지난해까지 보라스의 회사인 ‘보라스 코퍼레이션’이 성사시킨 계약 규모는 약 23억8000만 달러(약 2조7786억원)다. 지금껏 그 어떤 에이전트도 보라스보다 더 큰 계약 규모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올해 스토브리그에서만 보라스는 지금까지 성사시켰던 총 계약 규모에 근접할 만한 무시무시한 결과물을 쏟아내고 있다. 마이크 무스타커스가 신시내티 레즈와 4년 6400만 달러(약 747억원) 계약을 맺은 것은 신호탄이었다. 이어 스티븐 스트라스버그와 워싱턴 내셔널스의 7년 2억4500만 달러(약 2860억원) 계약을 성사시키더니, 곧바로 ‘최대어’ 게릿 콜에게는 9년 3억2400만달러(약 3782억원) 의 투수 역대 최고 계약을 선사했다. 콜을 데려간 팀은 뉴욕 양키스였다. 이어 야수 최대어였던 앤서니 렌던도 LA 에인절스와 7년 2억4500만 달러 계약을 맺었다. 이 4명의 계약 규모만 총 8억7800만 달러(약 1조237억원)에 이른다.

아직 보라스의 스토브리그는 끝나지 않았다. 최고 시즌을 보낸 류현진이 여러 팀의 영입 경쟁 속에 ‘대박’을 기다리고 있으며, 댈러스 카이클이라는 준수한 선발 투수 자원도 거액의 계약을 노리고 있다. 어쩌면 보라스는 이번 스토브리그에만 총액 10억 달러(약 1조1675억원) 이상의 계약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괜히 슈퍼 에이전트가 아니다.

사실 학창 시절에만 해도 보라스는 메이저리그를 꿈꾸는 평범한 야구 유망주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1975년 신인드래프트 3라운드에서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지명을 받았다. 그러나 마이너리그에서 4시즌을 보내는 동안 성장에 한계를 느꼈다. 그러던 와중에 야구단의 선수에 대한 대우가 부당하다고 생각했고, 이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됐다. 결국 보라스는 선수를 그만두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갔다. 퍼시픽대 약학대학원에 다니며 공업약학을 전공했고, 동시에 로스쿨도 다니며 로펌에서도 근무했다. 그리고 1980년, 본격적으로 에이전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보라스가 선수로 뛸 당시만 해도 미국 프로스포츠 선수들의 계약은 주먹구구식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에이전트 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보라스는 당시로는 획기적인 방식을 들고 나왔다. 처음으로 선수의 통계 기록을 활용하기 시작했으며, 선수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준비해 협상에 나섰다. 이와 더불어 전도유망한 기대주들과 미리 계약을 맺어 같은 방식으로 드래프트 및 이후 메이저리그에서도 계약 규모를 크게 끌어올리는 데 앞장섰다.

사기꾼? 보는 눈 뛰어난 장사꾼!

법조인 출신인 보라스는 계약관행의 법적인 허점까지 이용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1996년 벌어진 ‘Loop-Hole FA’ 사태다. 당시 신인 계약규정 제4조 E항에는 “아마추어 선수가 신인드래프트에 참여해 구단이 해당 선수를 지명하게 되면, 구단은 드래프트 당일로부터 15일 경과 전까지 그 선수와 계약 체결을 위해 전화통화 또는 서면을 통해 선수와 접촉해 그와 계약 여부 의사를 밝혀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몇몇 구단이 드래프트 상위 지명을 했으니 당연히 계약한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15일이 지나도록 선수에 대한 접촉을 하지 않았다. 이에 보라스는 신인 선수라도 지명팀의 계약 의사가 없다면 이는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워 이들의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요구했고, 결국 법정 분쟁까지 간 끝에 보라스의 승리로 끝났다. 이에 총 4명의 신인 선수들이 FA로 신분이 변경됐고, 모두 거액의 계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보라스는 주로 FA 계약을 선호한다. 하지만 최근 메이저리그의 흐름은 FA보다는 재계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에이징 커브(일정 나이가 되면 운동 능력이 저하되면서 기량 하락으로 이어지는 현상)’가 시작되는 시점이 앞당겨지면서, 전성기가 끝나고 FA 시장에 나오는 선수들에게 큰돈을 썼다가 재미를 못 보는 팀들도 많다.

보라스 역시 대형 계약을 안겨준 선수들 중 이러한 경우가 적지 않다. 이에 구단들은 보라스를 ‘사기꾼’, ‘악마’로 여긴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계속해서 에이전트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구단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보라스를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보유하고 있는 선수들이 에이징 커브를 떠나 말 그대로 ‘특급’ 재능을 보유하고 있는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수준이 떨어지는 선수들에게 초대형 계약을 맺어주는 일은 못 한다. 하지만 특급 선수들에게 최대한의 계약을 안겨주는 데는 그 누구보다 능하다. 구단들도 보라스가 보유하고 있는 선수들의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에 ‘악마의 유혹’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관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보라스의 선수를 보는 눈이 그만큼 탁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류현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류현진이 메이저리그에 처음 진출할 때만 하더라도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류현진은 어깨 부상으로 고전하면서도 수준급의 성적을 내며 자신의 재능을 증명했다. 한국에서 뛰던 당시 류현진의 재능을 알아봤던 보라스의 눈은 결국 정확했다.

메이저리그는 미국프로풋볼(NFL)·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미국프로농구(NBA)와는 달리 겨울에는 선수들 계약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흥밋거리가 없다. 보라스는 야구팬들이 겨울에 느끼는 지루함까지 달래주는, 그야말로 타고난 ‘장사꾼’이다.

<윤은용 스포츠부 기자 plaimsto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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