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정치권 약값 인하 공약, ‘선거 약발’ 먹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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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 및 연방의회 의원 선거를 약 11개월 남겨둔 미국에서 의료비 인하, 특히 약값 인하를 위한 정책 대결이 치열해지고 있다. 재선에 도전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을 꺾기 위해 출사표를 던진 민주당 대권주자들, 연방 상원을 지배하고 있는 여당 공화당과 하원을 장악한 야당 민주당이 각자 마련한 약값 인하 방안을 앞세워 경쟁하고 있다. 그야말로 ‘살인적인’ 약값에 질린 미국인들의 비명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자 선거에서 유권자의 심판과 선택을 앞둔 정치인들의 움직임이 빨라진 것이다.

한 미국인이 12월 8일(현지시간) 미국 버니지니아주 페어팩스의 대형 소매 체인점 CVS 내 약국에서 처방약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 페어팩스|김재중 특파원

한 미국인이 12월 8일(현지시간) 미국 버니지니아주 페어팩스의 대형 소매 체인점 CVS 내 약국에서 처방약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 페어팩스|김재중 특파원

살인적 약값에 죽어나는 미국인들

미국 보건복지부 산하 ‘메디케어 및 메디케이드 서비스 센터’는 최근 약국 등에서 2018년 판매된 약품 가격이 전년 대비 평균 1% 하락했다고 발표했다. 미국 내 소매점에서 판매되는 약값이 떨어진 것은 1973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복제약을 선택하는 소비자들이 늘고, 거대 제약회사들이 가격 인상을 자제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지난해 보건의료에 지출한 돈은 전년 대비 4.6%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가 개봉한 것은 2007년이다. 가장 부유하다는 미국 시민들도 돈이 없으면 방치돼 죽어나가는 충격적인 현실이 전 세계에 폭로된 지 10년도 넘은 것이다. 전 국민 의료보험 가입 의무화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오바마 케어’는 2014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에선 살인적인 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파산하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미국 비영리단체인 ‘카이저가족재단’이 지난 5월 발표한 설문 결과를 보면 의사 처방이 필요한 약품을 소비하는 미국인 4명 가운데 1명은 약값을 대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답했다. 미국 보건복지부가 집계한 통계를 보면 2017년 미국인이 지출한 처방약 비용은 3340억 달러(약 399조원)로 10년 전에 비해 41%나 상승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서도 2018년 기준 미국인 1인당 처방약 지출 비용은 캐나다에 비해 47%, 영국에 비해 160%에 더 높았다. 폭스뉴스가 지난 10월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미국 유권자의 53%가 보건의료를 차기 미국 대통령 선택에서 ‘극히 중요한 분야’로 꼽았다. 경제·총기규제·이민 등 어떤 분야보다 높았다.

미국은 의료보험이 국가가 운영하는 공보험(메디케어·메디케이드)과 민간 보험사가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사보험으로 이원화된 구조다. 저소득층과 노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공보험은 약값을 제한하지만, 사보험은 각 보험사가 의료기관·제약사·약국 등과 협상을 통해 약값을 정한다. 민간 의료서비스 제공자들이 각자의 수익 극대화를 위해 몰두하면서 부풀려진 비용이 그대로 소비자들에게 전가되는 구조다.

지난 2월 의회 청문회에 출석한 거대 제약회사 최고경영자(CEO)들은 정부가 나서서 인위적으로 약값을 제약할 경우 신약 개발에 필요한 천문학적 비용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결국 약을 필요로 하는 소비자들에게 피해가 돌아간다는 논리를 폈다. 전 세계를 위한 신약 개발 비용을 미국인들이 부담하고 있다는 주장도 펼쳤다. 이런 주장은 약 100년 전 개발된 인슐린이 미국에서 이웃 캐나다에 비해 10배 높은 가격으로 판매되는 이유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거대 제약회사들이 연구개발(R&D)보다 인수합병(M&A)과 자사주 매입 등에 더 많은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는 반론이 나온다.

(미국 및 주요국가 1인당 처방약 지출 연도별 추이) <BR>자료: Commonwealth Fund·파이낸셜타임스, 단위: 달러)

(미국 및 주요국가 1인당 처방약 지출 연도별 추이)
자료: Commonwealth Fund·파이낸셜타임스, 단위: 달러)

미국은 약값 가장 비싼 나라 오명 벗을까

고삐 풀린 약값에 대한 미국인들의 원성이 하늘 높이 치솟으면서 정치권도 움직이고 있다. 약값 제어를 위한 정치권의 치열한 백가쟁명은 서너 갈래 접근법으로 요약된다.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2016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사보험을 폐지하고 공보험으로 일원화하자는 ‘메디케어 포 올’을 대표 공약으로 내세운 데 이어 2020년 대선을 앞둔 민주당 경선에서도 같은 공약을 주장하고 있다. 사보험을 폐지함으로써 약값은 물론이고 의료서비스 전반에 대해 공적 통제를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당선되면 사보험 폐지는 물론이고 거대 제약회사들의 독점과 가격담합을 깨뜨리기 위해 반독점법의 칼날을 들이댈 것이라고 공언한다.

진보 성향의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도 메디케어 포 올을 자신의 대표 공약으로 내세웠다. 반면 조 바이든 전 부통령, 피트 부티지지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 시장 등 중도 성향의 민주당 대권주자들은 사보험 폐지에 반대하며 오바마 케어를 강화해 시민들을 자연스럽게 공보험으로 유입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2016년 대선 당시 의료비 인하를 공약했던 트럼프 대통령도 재선 도전을 앞두고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분주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보다 외국에서 가격이 싼 약품들을 수입한다는 구상을 밀고 있다. 그는 최근 자신의 트위터에 알렉스 아자르 보건복지부 장관이 “플로리다주와 다른 주들이 미국보다 훨씬 싼 처방약들을 수입하는 계획을 발표할 것”이라고 적었다. 미국 내 약값에 인위적으로 개입하기보다는 희망하는 주에 한해 이웃 캐나다 등 약값이 싼 나라에서 약품을 수입해 공급한다는 것이다.

의회에서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민주당의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지난 1월 취임 일성으로 약값 인하를 외쳤다. 하원의장으로서 가장 역점을 둘 분야로 약값 인하를 내세운 것이다. 펠로시 의장이 약 1년에 걸쳐 마련한 법안은 정부에 제약사와 주요 약품의 가격을 협상할 권한을 부여하는 게 주요 내용이다.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하여금 매년 250개 의약품에 대해 가격 협상을 벌여 가장 낮은 가격을 공보험과 사보험에 모두 적용토록 했다. 제약사들이 약값 인하를 위한 협상에 불응할 경우 약품 판매 총액에 대해 65~95%에 달하는 세금을 매기도록 했다.

상원의 움직임도 주목된다. 공화당의 척 그래슬리 상원 금융위원장과 민주당의 론 와이든 상원의원은 최근 마련한 ‘처방약 인하법안’을 공개했다. 약값이 물가상승률을 상회했을 경우 제약회사들이 차액을 공보험 가입자들에게 환불해주도록 하고, 노령층 공보험 가입자의 약값 지출 비용에 상한선을 두는 게 주요 내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초당적으로 마련한 이 법안을 적극 지지한다면서 힘을 실어주었다.

이처럼 약값 인하를 둘러싸고 너무도 다양한 대안들이 제시되다 보니 적용 방식과 범위, 수준 등을 조정하는 것이 과제로 남아 있다.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해 “가격 제한은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로비와 선동을 하고 있는 제약회사들을 넘어서는 것도 만만치 않다.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지만 시민들이 약값이 모자라 죽어나가는 나라’는 오명을 과연 벗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재중 워싱턴 특파원 herm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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