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총리 사퇴, 또 다른 혼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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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 압둘 마흐디 이라크 총리가 격화되는 반정부 시위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겠다고 지난 11월 29일(현지시간) 밝혔다. 이라크 의회는 12월 1일 정부 실권자인 총리 불신임 투표를 통과시켰다. 대통령이 새 총리 후보를 지명할 때까지 압둘 마흐디는 과도정부 기능을 유지·관리하는 역할만 하게 된다. 그럼에도 두 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시위는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성지인 나자프에 있는 이란 영사관이 11월 27일(현지시간) 이라크 반정부 시위대의 방화로 불에 타고 있는 모습을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성지인 나자프에 있는 이란 영사관이 11월 27일(현지시간) 이라크 반정부 시위대의 방화로 불에 타고 있는 모습을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총리가 사퇴 의사를 밝힌 다음 날인 11월 30일에도 수도 바그다드를 비롯해 이슬람 시아파 성지인 남부 도시 나자프, 압둘 마흐디 총리의 고향인 나시리야 등에서 시위가 이어졌다. 특히 나시리야에서는 반정부 시위대를 향해 진압군이 실탄 사격을 하면서 최소 20명이 부상했다. 이라크 당국은 더 큰 소요사태를 막기 위해 나시리야와 나자프, 시아파 제2성지 도시인 카발라 지역 공무원들에 대한 휴가를 선포했다.

반정부 시위대 “이란도 물러가라”

총리가 사퇴하겠다고 밝혔음에도 시위가 진정되지 않는 이유는 이라크 국민이 혼란상의 근본 원인을 이란의 내정간섭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은 미국이 2003년 이라크 침공으로 사담 후세인 수니파 정부를 물러나게 한 뒤 시아파 정부를 세우며 영향력을 강화했다. 이란은 이라크의 시아파 정치 엘리트들을 후원하고, 이라크에 전력을 공급해줬다.

하지만 관료들의 부정부패만 심각해지고 국민의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이라크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2위의 산유국이지만 2003년 미국 침공, 이슬람국가(IS)와의 잇단 전쟁으로 도로·댐·발전소 등 인프라 시설이 붕괴됐다. 정전은 일상화됐고 전력공급 시간은 하루 채 4시간이 안 되는 지역이 허다하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청년실업률은 25%에 육박한다.

이번 시위는 주도한 정파나 중심 조직이 없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시위라는 점에서 종파 간 갈등으로 몰아갈 수도 없다. 시위 초기 진보 성향의 현지 일간 <알바이나알자지다>는 “시위대는 처음으로 어떤 깃발도, 어떤 정당의 슬로건도 없이 등장했다”고 했다. 11월 27일에는 시아파 성지 나자프 주재 이란 영사관에서 방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란에 대한 적개심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앞서 11월 3일에도 시아파의 제2성지 카발라 주재 영사관에서 방화가 있었다. 방화 당시 시위대는 “이란은 물러가라”고 외쳤고, 최근에는 이라크 전역에서 이 구호를 들을 수 있다.

시아파 최고 성직자로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보다 이슬람법 해석에 더 높은 권위를 인정받는 알리 알시스타니까지 나서 압둘 마흐디 총리 퇴진을 요구했다. 압둘 마흐디는 알시스타니가 입장을 밝힌 지 몇 시간 만에 사퇴를 선언했다.

지난 10월 초부터 최근 두 달 동안 이라크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이란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최근 레바논 반정부 시위 국면에서 시아파 벨트의 한 축인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에 대한 반감도 커지고 있는데다 자국 이란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델 압둘 마흐디 이라크 총리 / 로이터연합뉴스

아델 압둘 마흐디 이라크 총리 / 로이터연합뉴스

이란은 이라크 시위 초기부터 깊숙이 개입했다. 시위가 발발한 지 며칠 뒤 이란 정예군 혁명수비대의 특수부대 고드스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는 바그다드를 방문해 이라크 보안당국 관계자와 회의를 주재했다. 10월에만 최소 두 차례 바그다드를 방문한 것으로 파악된다.

문제는 이란이 시아파 정부를 지켜내기 위해 무력지원을 강화할 경우 시위가 내전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는 데 있다.

<알자지라>는 이라크 소식통을 인용해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바그다드 방문 당시 압둘 마흐디 총리에게 시리아의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를 보호해줬던 것처럼 지원을 약속했다고 전했다. 이란은 이라크 내 친이란계 무장조직인 인민동원군(PMF)을 이용해 시위대를 강경 진압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불안해진 이란, 더 위험해지는 이라크

이란의 위험한 개입 움직임과 맞물려 이라크 정파들의 복잡한 이해관계는 총리 사퇴 이후에도 이라크 정국 불안을 장기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압둘 마흐디 총리 사퇴 요구는 시위 초기부터 나왔다. 하지만 사퇴 요구만큼이나 압둘 마흐디에게 자리를 지키라는 압박 또한 거셌다.

시위 초·중반까지만 해도 알시스타니와 쿠르드 자치정부(KRG)는 대안이 없다며 압둘 마흐디가 총리직을 유지하길 바랐다. 특히 KRG는 압둘 마흐디가 그나마 이전 총리들보다는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보고 압둘 마흐디를 지지했다. KRG은 바그다드 중앙정부와 예산 배분, 석유 판매 등 자치권 확대문제를 두고 5년 넘게 협상 중이다. 압둘 마흐디 사퇴로 그만큼 불확실성이 높아진 셈이다. KRG로선 양보를 이끌어낼 수 있는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 급선무다.

의회 내에서는 확실하게 우위를 점하는 세력이 없고, 여전히 친이란계 세력의 입김이 강해 새 내각을 구성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포퓰리스트 시아파 성직자로 의회 내 최대 정파인 ‘알사이룬’을 이끌고 있는 무크타다 알사드르는 반정부 시위대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려고 했지만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한다. 민족주의 색채를 강화하며 이란 세력 배척을 주장하는 그는 정작 이란의 지원을 등에 업은 실력자들을 쳐내지도 못했다. 그동안 이라크 정부에서 실권자는 압둘 마흐디 총리가 아니라 이란 지원을 받는 아부 지하드 알하시미 총리실장, 아부 문타자르 알후세이니 방위청장이란 말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두 사람 모두 친이란 무장조직 PMF와 연결고리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느 세력도 확실하게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누구도 꺼리지 않는 인물이 새 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각자 이해관계가 미묘하게 엇갈리는 만큼 압둘 마흐디의 대안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설사 새 총리를 찾는다 해도 정부 구성까지는 또 험로가 예상된다. 압둘 마흐디는 지난해 10월 총리에 오른 뒤 의회로부터 국방·내무·법무장관 등 정부 요직 임명 동의를 얻는 데만 8개월이 걸렸다. 압둘 마흐디 총리 사퇴는 또 다른 혼란의 시작일 뿐이다.

<박효재 국제부 기자 mann616@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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