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리동 소금길-마포나루와 함께 사라진 소금장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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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들으면 맛이 떠오른다. 염리동 소금길. 아주 짭짤한 맛이다. 지하철 2호선 이대입구역 5번 출구로 나오면 아현동 고갯길에 기대 서 있는 아주 오래된 마을의 골목길을 만날 수 있다. 염리동의 아래쪽 마을 대부분은 재개발로 잘려나가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건너 대흥동이나 옆 아현동에서도 천지개벽이 이루어지고 있다. 새로 짓는 아파트 단지들 사이에서 소금길 주변만 고독한 골목의 섬으로 남아 있다.

소금길이 있는 염리동 일대는 마포 포구 인근 소금장수들의 마을이었다.

소금길이 있는 염리동 일대는 마포 포구 인근 소금장수들의 마을이었다.

재개발 바람 속 살아남은 동네

“여긴 주민투표해서 재개발을 하지 않기로 했다. 아파트는 누가 공짜로 주나. 다 돈 내야 하는데, 오래된 집이지만 정 붙이고 그냥 사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 40년 토박이 주민의 이야기다. 무엇보다 시집와서 이 골목에서 아이를 낳고 잘 키워 떠나보낸, 자기 생의 거의 모든 역사가 길마다 남았기 때문에 그 기억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골목에서 마주친 동년배 주민과 문득 이야기를 나눴다. “언제 김장해?”, “모레”, “몇 포기나 하는데?” “30포기밖에 안 해. 와서 도와주고 수육 먹고 가.” 그들의 이런 대화가 소금길 골목에선 자연스럽다. 오래된 마을의 인정과 인심이 골목 곳곳에 아직도 묻어 있다.

알록달록한 마을단장도 해가 지나면서 색이 바래고 있다.

알록달록한 마을단장도 해가 지나면서 색이 바래고 있다.

이미 끝났다는 재개발 이야기지만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골목 입구엔 재개발 상담 등을 크게 써놓은 부동산이 줄줄이 진을 치고 있다. 건넛마을 아파트 입주권 거래시세표도 크게 붙여놓았다. 골목에서 가장 좋은 목은 부동산 차지였다.

골목길을 거슬러 올라가 아현동으로 이어지는 길목엔 ‘통행로 없음’ 간판이 붙었고 길게 담이 쳐졌다. 담 넘어 언덕배기의 그 많던 집들은 모두 헐렸다. 그야말로 옛 아현동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긴 장벽 앞에서 몇몇 주민들이 무엇인가를 모의하고 있었다. 나누는 이야기들을 지나치며 듣자니 “재개발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결의였다. 뜻을 꺾지 못한 이들은 이렇게 또 삼삼오오 모여서 불온한 불씨를 지피고 있다.

재개발 바람과 주변지역 재개발로 부동산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재개발 바람과 주변지역 재개발로 부동산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재개발 바람이 불고 간 후 소금길 일대는 집을 헐고 짓고 고치는 일이 일상이 됐다. 오래된 집을 리모델링하거나 다시 짓는 건축 붐이 소금길에 불고 있다. 일터에서 일하는 건설노동자들의 대화는 대부분 중국말이거나 조선족 억양의 말투다. 골목엔 커다란 중국식품점도 눈에 띈다. 주민은 “중국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말도 못 한다. 처음엔 인근 대학교 유학생들이 하나둘 들어와 살더니 이제는 온통 중국 사람들 투성”이라고 설명한다. 골목 안에서 작업복을 입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 귀가해 닫힌 문을 여는 중국 출신 건설노동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인근엔 널린 것이 아파트 공사판이고 이제 그들의 노동력을 사는 큰 시장이 이 일대에 열려 있다. 골목 안에 6000원짜리 백반을 파는 ‘뷔페식 함바집’들이 문을 열어 그들을 맞고 있다. 밥과 잠을 이 골목에서 해결하고 이른 새벽부터 근처의 공사장으로 나간다. 베이징과 상하이의 고층건물을 짓던 농민공이 이제 소금길 골목까지 진출했다. 세상은 좁고 일터는 곳곳에 있다. 제 발로 걷는 노동자가 일을 찾아 떠도는 일이 자연스럽게 됐다. 덕분에 골목 안 좁은 식당은 때아닌 호황을 맞고 있다.

감리차 나왔다는 설계사무소 직원은 “인근 현장끼리 공정마다 현장노동자들을 돌려서 쓴다. 여기서 거푸집 조립이 끝나면 다음 골목 현장에 가서 비슷한 작업을 하는 식으로 조별로 함께 움직이는 일이 많다”고 귀띔했다. 그래서인지 서너 명씩 비슷한 복장의 노동자들이 골목길을 따라 함께 움직이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물론 그들의 대화는 중국어가 대부분이다.

마을 주민 중 중국인들이 늘면서 중국식품점과 외국인 전용 휴대폰점도 생겼다.

마을 주민 중 중국인들이 늘면서 중국식품점과 외국인 전용 휴대폰점도 생겼다.

중국인 건설노동자들 몰려들어

염리동 아래 용강동이 있고, 그 일대가 배가 닿는 포구였다. 서해에서 한강을 타고 온 배들의 종착지이자 시발지가 있었다. 마포 포구에서 특히 유명했던 것이 새우젓과 옹기, 소금이었다. 용강동 일대에 옹기 가마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싣고 온 소금을 담거나 새우젓을 담아 저장하는 창고도 함께 있었다. 소금배는 돌아갈 때 옹기를 싣고 떠났다. 염리동은 그 실어온 소금을 다루는 이들이 많이 살던 마을이다. 소금전이 열리고 소금장수들이 살았다. 소금산이란 이름의 작은 동산, 염산(鹽山)은 아직도 표지판으로 남아 있다. 염리동은 모조리 해체됐고, 오직 소금길 일대의 골목만이 그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오래된 마을답게 주택들이 골목을 이루고 있다.

오래된 마을답게 주택들이 골목을 이루고 있다.

소금길 부근은 몇 해 전만 해도 마을 꾸미기의 모범으로 꼽히던 곳이다. 좁고 복잡하고 가파르고 낡고 어두운 골목길에 색을 입혀 칠했다. 계단엔 붉고 푸르고 노란색 칠을 하고, 골목길엔 능소화길·해당화길·라일락길·해바라기길·쑥부쟁이길·옥잠화길 등의 이름을 붙였다. 소금길이란 이름도 마을의 정체성을 위해 새로 붙인 이름이다. 길 위엔 아이들의 놀이판도 그려졌다. 그러나 이젠 아무도 골목길에서 놀지 않는다. 놀 만한 또래도 없거니와 그나마 있는 아이들은 학원에 가기 바쁘거나 돌멩이를 던지는 놀이보단 컴퓨터게임이 훨씬 재미있다. 페인트칠은 색이 바랬고, 표지판은 망가진 채 방치됐다. 범죄예방디자인이란 거창한 이름으로 시작된 색칠과 이름 붙이기 프로젝트는 시간이 흘러 잊혔다. 처음 그 뜻은 창대하였을 터이나 그 끝은 미미하게 됐다. 아마도 주변 지역 재개발로 관심과 우선순위가 밀렸기 때문이리라.

대신 골목마다 매직으로 써 붙인 ‘쓰레기 버리지 마시오’란 경고판은 강렬하다. 싼 방값 덕에 유동인구가 늘었다. 야반도주하듯 가구를 버려둔 채 이사 가는 사람 덕분에 골목 곳곳에 낡은 가구들이 쌓여 있는 모습도 쉽게 눈에 띈다. 어느 담엔 ‘남으면 두고 필요하면 가져가세요’라 쓰여 있고, 그 아래 그릇이며 도자기 컵 따위가 먼지를 쓴 채 줄지어 있다. 선의는 방치된 채 관심조차 끌지 못하고 있다.

좁은 골목 사이를 파고들면 마당 없는 집들의 미로를 만나게 된다. 벽에 긴 빨랫줄을 치고 그 위로 이불을 널어 말리는 모습이 사람 사는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우편함에 꽂힌 ‘우리 동네 마포’ 따위의 홍보물이 눈길을 끌고, 갖가지 꽃을 심은 긴 화분이 집주인의 심미안을 드러낸다. 한낮의 골목은 햇살과 그를 반겨 널린 빨래와 여유 있게 광합성을 즐기는 여러해살이풀들이 주인공이다. 아무도 쑥부쟁이길 뒷골목을 이유 없이 걷지는 않을 테니 한가로움과 졸린 오후의 고요함만 골목을 지키고 있다.

오래된 골목길 건너편에 새로 지은 아파트단지들이 보인다.

오래된 골목길 건너편에 새로 지은 아파트단지들이 보인다.

“골목이 원래 이리 조용하냐?”는 물음에 라일락길의 가파른 계단을 힘겹게 오르던 노인은 “낮에는 대부분 일 나가서 그렇다”고 했다. 요즘 사람을 보면 사는 일이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진단다. 언제부터 사는 일이 이렇게 팍팍해졌는지 모르겠단다. 세상 사는 일은 한때도 녹록지 않았을 테지만 노인의 기억에 남은 골목길은 훨씬 따듯하고 여유로운가 보다.

골목길에서 한낮의 정적을 누리는 무리는 또 있다. 유난히 살찐 길고양이들이 먹이통을 뒤지고 있고, 또 다른 한 마리는 털을 고르고 있다. 사람이 곁에 가도 힐끔 쳐다볼 뿐 두려워하거나 도망칠 기색이 없다. 고양이에게 물을 따라주던 소녀가 가만히 머리를 다듬고 등을 쓸어도 배를 내놓은 채 여유를 부린다. 이 동네 고양이들은 모두 뚱뚱하고 겁이 없다.

신촌 쪽에서 소금길을 가자면 줄곧 오르막이다. 나지막해 느끼지 못했으나 아현동 고갯마루에서 마포 쪽으로 내려가면 꽤 경사진 길임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골목골목 계단도 많고 좁은 골목들도 촘촘하다. 그런 탓에 일대는 변태 ‘바바리맨’들의 출몰이 잦았단다. 골목 깊숙한 곳까지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길이 요즘 세태에는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너 칸이라도 가파르게 놓인 계단을 올라 길이 갈라지고 그 끝에 또 막다른 길, 서너 개 대문이 골목 끝에 붙어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복잡하다. 골목은 이렇게 덜 정돈되고 혼란한 맛이 있다.

능소화길·해당화길·라일락길 조성

일대의 골목길이 다 같은 표정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뜰이 여유로운 집들도 있고 오래된 감나무에 매달린 대봉이 까치밥으로 남아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바로 옆 골목으로 접어들면 좁은 길가에 낮은 문들이 줄지어 있는 으슥한 모습도 있다. 그러니 재개발을 하자는 이유와 필요 없다는 뜻이 갈릴 만하다. 한 골목에 머물러도 서로 다른 사정과 속내를 짊어지고 살아간다.

샛길로 뻗어 들어가기 전 조금 너른 길목에는 한눈에도 아주 오래돼 보이는 가게들이 거리를 이루고 있다. 70년대식 간판을 단 개인병원도 있고, 이제는 대형마트와 편의점에 밀려 다른 마을 골목길에서는 씨가 마른 동네 구멍가게도 있다. 가게주인이 찌개를 끓이고 있는데 지나가던 행인이 불쑥 문을 열고 들어간다. “내가 이렇게 먹을 복이 있다니까.” 거두절미하고 의자를 찌개 냄비 앞에 끌어와 소주를 찾았다. 한마을에서 함께 자라고 지내온 이력들이 대화와 몸짓에 배 있다. 골목 어귀의 풀빵장수도 오가는 이들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떡볶이 노점 안에선 마을 ‘뒷담화’가 한창이다. 빨래터에서 이루어지던 일들이 골목 어귀 오래된 가게들에서 자연스럽게 재생되고 있다.

그런 마을가게들 사이사이로 새 가게들도 눈에 띈다. 강좌도 열고 디저트도 파는 카페는 한낮에도 문이 닫혔다. 아마도 골목길에 새로 색칠할 때 문을 열었을 가게인 듯한 젊은 가게들은 그다지 활기가 없어 보인다. 골목을 에워싼 느린 흐름 앞에서 새파란 기세가 별로 힘을 쓰지 못하는 셈이다. 오히려 나이 든 집주인이 필름 현상과 인화를 가르치고 사진을 뽑아주는 이름 그대로의 ‘취미사’는 오래도록 취미를 살려 번창하고 있다.

마포에서 신촌으로 이어지는 주거지는 대부분 재개발을 마쳤거나 진행 중이다. 대규모 단지의 아파트가 들어섰다. 앞으로 몇 년 사이에 그 범위는 훨씬 넓어질 것이다. 이 일대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자본과 개발의 전쟁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몇몇 골목들이 있고, 염리동 소금길도 그중 하나다. 소금은 썩지 않는다. 다만 물에 녹으면 사라진다. 염리동 소금길은 욕망의 폭우 속에서 썩지 않고 살아남아 그 골목에서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래오래 보여줬으면 좋겠다. 마포나루와 함께 사라져버린 옛 소금장수들의 자취가 이 골목 안에서 이름만으로라도 남아 있기를 바란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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