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영석유기업 상장, 사우디 ‘탈석유 시대’ 시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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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의 보석’, ‘세계에서 가장 비싼 기업’.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석유기업 아람코를 가리키는 말이다. 아람코의 기업가치는 무려 1조6000억~1조7100억 달러(약 1900조~2000조원). 아람코가 드디어 시장에 나온다. 아람코는 12월 5일 사우디 증시(타다울)를 통해 기업공개(IPO)에 들어간다. 세계 투자자들의 관심이 뜨겁다. 아람코 기업공개에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이유는 기업가치 때문만은 아니다.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의 ‘탈석유 시대’ 비전을 평가하는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중동 지역에서 미국을 상대해 중국·러시아가 힘을 키우는 지렛대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10월 10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 도심의 한 광고판에 아람코 광고가 게시돼 있다. / AFP연합뉴스

지난 10월 10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 도심의 한 광고판에 아람코 광고가 게시돼 있다. / AFP연합뉴스

사우디의 보물 아람코의 값어치는

아람코는 세계 산유량의 12.6%(2018년 기준)를 차지하는 대형 석유기업이다. 1933년 사우디가 미국의 석유회사 소칼(Socal)과 손잡고 설립한 회사가 아람코의 전신이다. 1944년부터 ‘아람코(Arabian American Oil Company)’란 이름을 썼다. 1973년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일어난 욤 키푸르 전쟁에서 미국이 이스라엘 편을 들자, 사우디는 아람코 지분을 60%까지 늘렸다. 이후 1980년 사우디 정부가 아람코 지분을 완전히 사들이면서 국영기업이 됐다. 이후 아람코는 줄곧 ‘사우디 경제의 주축’이었다.

아람코는 11월 17일(현지시간) 기업공개에 앞서 목표 공모 범위를 1주당 30~32리얄(약 9360~9980원)로 제시했다. 기업가치에 따라 추산해보면 아람코는 타다울을 통해 240억~256억 달러를 조달할 것으로 보인다. 초기 공모액이 기업가치의 상한선으로 책정되면 역대 최고 공모액을 기록한 2014년 알리바바의 공모액(250억3000만 달러)을 뛰어넘는다. 아람코의 1~9월 순이익은 680억 달러로, 애플(353억 달러)의 2배에 가깝다.

다만 아람코의 지난 3분기 순이익이 212억 달러로 전년 동기대비 30% 줄어들었다. 유가 변동으로 인해 매출이 떨어지고, 지난 9월엔 동부 아브카이크와 쿠라이스 석유시설이 외부세력에 공습을 받아 비용 지출도 늘었다. 기업공개를 앞두고 악재가 겹친 것이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아람코의 기업가치를 2조 달러로 희망해왔다. 하지만 서방 투자기관은 이보다 낮게 평가했고, 실제 아람코의 공식 발표도 하향조정됐다. 이는 아람코가 운영이나 지배구조 리스크를 인정한 것이라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분석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 로이터연합뉴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1월 13일(현지시간)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열린 혁신 기술에 관한 포럼인 ‘미스크 글로벌 포럼’. / AFP연합뉴스

지난 11월 13일(현지시간)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열린 혁신 기술에 관한 포럼인 ‘미스크 글로벌 포럼’. / AFP연합뉴스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무함마드 왕세자는 아람코를 내놓고 ‘탈석유 시대’를 준비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2016년 4월 사회·경제 개혁 계획인 ‘비전 2030’을 발표하면서 아람코 국부펀드 조성을 핵심사업으로 제시했다. 사우디 정부는 기업공개로 확보한 자금을 관광업과 사회기반 시설 정비 등에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아람코의 기업공개는 3년 넘게 우여곡절을 겪었다. 지난 9월 무함마드 왕세자는 에너지장관과 아람코 회장을 최측근으로 각각 교체했다. 아람코 상장에 속도감을 불어넣으려는 조치로 해석됐다. 왕권을 차지하기 전 입지를 다져야 하는 무함마드 왕세자는 앞서 여성 운전 허용 등 일부 사회개혁을 시도해 젊은층으로부터 호응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경제 성적표는 저조했다. 사우디의 실업률은 12.9%로 최근 10년 이래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한 투자자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무함마드 왕세자는 사우디인들이 더 잘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끔 뭔가 보여줘야 할 때”라고 말했다.

석유시장 사정이 좋지 못한 것도 기업공개를 서두르게 된 배경이다. 아람코는 최근 투자설명회에서 원유 수요가 2035년쯤 정점을 찍고 단계적으로 내려갈 것으로 예상한 시장조사 업체 IHS 마킷의 분석 자료를 인용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원유 수요 감소에 ‘논리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했던 사우디 측의 견해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2011∼2014년 배럴당 100달러를 훌쩍 넘은 유가는 이후로 40∼70달러에 묶여 있다.

저유가 시대에 사우디가 부족한 현금을 채우기 위해 아람코 상장을 서두르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사우디는 사회안정을 위해 막대한 보조금을 집행해야 하고 예멘 내전에도 돈을 쏟아부어야 한다. 에너지 컨설팅업체 에너지애스펙츠의 석유 부문 수석 애널리스트 암리타 센은 “무함마드 왕세자는 현금을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며 “내 예상에 아람코 공모는 수입을 올리려는 의도가 큰 것 같다”고 말했다.

“중국·러시아에 기댈 수밖에”

아람코 임원들은 최근 미국·아시아·유럽 방문 일정을 취소했다. 대신 아랍에미리트연합(UAE)·쿠웨이트·바레인·오만 등 걸프국가들에서만 투자유치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는 “사우디 ‘왕관의 보석’ 공개 잔치는 크게 부풀려진 것으로 드러났고 (실제로는) 지역 행사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FP>는 아람코의 원유 생산량, 유전 개발 예산, 비축 매장량 등에 관한 결정이 명확하지 않아 투자자들이 주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숙적 이란과 계속되는 충돌, 왕실 비판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 사건 등도 투자자들을 고민하게 만든다. 미 CNN 방송은 아람코가 사우디 부유한 가문이나 자국에 호의적인 외국 국부펀드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릴 수 있다고 전했다.

사우디가 대외적으로 기댈 곳은 결국 중국과 러시아뿐이다. 앞서 러시아·중국 투자펀드(RCIF)가 아람코 투자에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기업들이 50억 달러에서 최대 100억 달러를 투자할 것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중국은 지난해 아랍국들과 2443억 달러에 달하는 무역거래를 했다. 러시아는 미군의 시리아 철수를 계기로 중동의 중재자로 급부상했다. 유럽연합(EU) 관련 전문매체인 유랙티브닷컴 칼럼니스트 조셉 다나는 “중국과 러시아가 석유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은 미국과의 패권 싸움, 특히 달러의 지배력에 도전하는 계획 중 일부일 것”이라고 했다.

<김향미 국제부 기자 sokh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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