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플랫폼 자본 통제할 법과 제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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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로 사회>의 저자 김영선 노동시간센터 연구위원

‘일하고 싶을 때 하고, 하고 싶은 만큼 일한다.’ 플랫폼 자본이 배송·운송·가사 노동자를 모집할 때 앞세우는 문구다. 플랫폼 노동은 노동자에게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하는 혁신적인 노동 방식이라고 선전한다. 플랫폼 자본이 공급하는 일감은 개인의 선택에 따라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있고 흘려보낼 수도 있다.

김영선 노동시간센터 연구위원이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김영선 노동시간센터 연구위원이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플랫폼 자본이 만든 ‘힙’한 시스템은 노동자를 독립적인 존재로 돋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상대적으로 노동 시간과 장소, 근무 형태를 강제하는 기존 노동 방식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낡은 것으로 비춰진다. 나아가 플랫폼 자본이 만든 시스템은 노동자에게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줄 혁신이라는 장밋빛 전망도 나온다.

개인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플랫폼 노동이라는 이미지가 퍼지면서 ‘자발적 플랫폼 노동자’도 늘고 있다. <뉴요커>가 ‘과로사를 장려하는 긱 이코노미(Gig economy·빠른 시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비정규 프리랜서 근로 형태가 확산하는 경제 현상)’기사를 통해 열악한 플랫폼 노동의 현실을 지적하자 한 우버 운전자는 “그래도 나는 9시부터 5시까지 회사에 묶여 일하느니 긱 이코노미 임시직으로 과로사하겠다”고 응수하기도 했다.(<우버 혁명>·알렉스 로젠블랏)

플랫폼 노동 추종자들의 말처럼 플랫폼 자본은 노동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고 있을까. 플랫폼 자본의 기술 혁신은 노동자에게 더 많은 자유를 안겨준 것일까.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시간주권도 되찾을 수 있을까. <과로 사회>의 저자 김영선 노동시간센터 연구위원(45)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김 연구위원은 플랫폼에 매개된 채 일감(gigs, calls, hits)을 수행하는 노동자를 ‘플랫타리아트(platform+proletariat)’라고 칭하고 연구해왔다. 인터뷰는 11월 6일 경향신문사에서 이뤄졌다.

-비정규직 문제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플랫폼 노동이 등장했다.

“정규직의 비정규직화는 자본이 노동자의 해고를 자유롭게 하려고 추진한 수량 유연화의 결과다. 자본은 늘 책임을 덜고 임금과 시간의 투쟁, 안정요구에서 벗어나길 원했는데 유연화는 자본이 원하는 바를 이뤄줬다. 자본 입장에서 플랫폼은 혁신적인 유연화를 가능케 하는 매개체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그래도 노동자성을 인정받는 존재지만 플랫폼 노동자는 공식적으로 ‘노동자’라는 명칭조차 쓸 수 없다. 고용계약이 없기 때문에 자본과 노동 사이에 고용관계도 성립되지 않는다. 노동자를 쉽게 쓰고 버리기 위해 만든 게 비정규직이라면 플랫폼 노동은 애초에 노동자가 아닌 존재로부터 노동을 끄집어내 활용하기 위해 만든 시스템이다.”

-비정규직 사회가 된 것처럼 플랫폼 노동 사회가 도래할까.

“1990년대 후반 비정규직화가 시작된 시기에 많은 사람이 ‘설마 비정규직이 대거 늘어나겠느냐. 비정규직으로는 서비스·품질관리가 안 돼서 불가능하다’라고 했다. 하지만 자본은 비정규직화를 강행했고 성공했다. 서비스·품질관리 문제는 소수의 정규직 간에 경쟁을 시키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플랫폼도 마찬가지다. 플랫폼 자본은 일감의 단가(수수료) 조정하는 방식을 통해 노동력을 끌어낼 수 있는 여러 장치를 만들고 있다. 인력이 모이면 위험한 저질 일감을 양산한다. 그런데도 이들을 통제할 법과 제도가 없다. 자본은 이 시기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플랫폼 자본은 각종 플랫폼 노동이 소비자의 편익을 위해 필요한 서비스라고 항변한다.

“90년대 후반 대형유통자본이 지금의 플랫폼 자본과 비슷한 주장을 했다. ‘소비자의 편익을 위해 야간노동을 허용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결국 정부는 야간노동을 허용했는데 장벽이 사라지자마자 기간산업에만 허용됐던 야간노동은 전 산업군으로 퍼져나갔다. 노동자들은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밤샘 노동에 시달렸다. 자본은 자본과 소비자에게는 친절하지만 노동자에게는 불친절하다. 플랫폼 자본도 다르지 않다.”

-플랫폼 기업들은 ‘자유로움’을 강조한다. 플랫폼 노동자는 자유로운가.

“자율성을 보장해준다는 물리적인 차원에서 보면 맞는 얘기다. 원할 때 하고, 하고 싶은 만큼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것도 맞다. 하지만 현실 노동에서는 사측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자유롭지 않다. 플랫폼 기업이 책정한 수수료는 낮은 수준이다. 일정 소득을 올리려면 장시간 노동이 필수다. 일감을 놓고 노동자끼리 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콜이 뜨면 바로 잡아야 한다. 콜을 못 잡으면 대기해야 하는데 이 시간에는 쉴 수 없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없다. 엄연한 노동이지만 플랫폼 사업자들은 이 시간을 노동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플랫폼 노동자 가운데는 대기시간을 포함해 하루 13시간씩 일하는 이들도 있다. 노동자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다고 호소하지만 플랫폼 측은 ‘우리가 정한 노동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장시간 노동을 인정하지 않는다. 노동과 관련된 시간도 당연히 노동 시간인데 그 ‘당연함’이 무너진 상황이다.”

-설명대로라면 플랫폼 노동자가 시간주권을 되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노동자가 시간주권을 가지려면 먼저 노동권을 보장받아야 한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근로기준법 안에 들어와야 한다. 근무와 휴식시간, 육아휴직처럼 시간이 제도화된 세계 안에 속해 있는 것이 먼저다. 하지만 플랫폼 노동자들은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시간주권도 찾을 수 없다. 일과 삶의 균형은 플랫폼 노동자에게 적용할 수 없는 개념이다. 워라벨은 최소한의 고용계약을 맺은 노동자에게 쓸 수 있는 단어다. 플랫폼 노동은 이미 일과 삶의 경계가 허물어진 상태다. 플랫폼 자본이 자발적으로 노동자의 시간을 보장하는 제도와 장치를 만든다면 노동자들이 시간주권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럴 가능성은 없다. 플랫폼 사업은 노동자의 시간주권을 박탈해야 수익이 증가하는 구조다. 노동권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법도 지키기 싫어 사각지대로 도망다니는 게 플랫폼 사업자다. 노동자의 시간주권은 애초에 고려사항이 아니다.”

-플랫폼 자본이 시장에 파고드는 기세가 가파르다. 마케팅도 공격적이다.

“플랫폼 자본의 ‘언어’를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플랫폼 노동에 부합하는 인간은 독립적 인간형이다. 주체적인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라 언제든 쉽게 결합하고 떨어져 나가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고용계약에 연연해하지 않는 인간을 이상적으로 그리는 데 몰두한다. ‘일하고 싶을 때 자유롭게 원하는 만큼’이란 자본의 언어에는 고용관계를 지워버린 플랫폼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녹아 있다. 당신은 노동자가 아니라 독립된 사업자니까 일과 관련해 내게 문제를 제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전달하고 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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