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교의 눈

‘빌어먹을 996’과 ‘크런치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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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웨이 프로그래머의 컴퓨터 앞엔 야전침대가 있다. 집에 갈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불만은 당연히 터져나왔다. 장시간 노동으로 “일과 가정이 양립하기 어렵다”는 직원의 말에 런정페이 회장은 “이혼하면 해결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홍명교의 눈]‘빌어먹을 996’과 ‘크런치모드’

올봄 중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이슈는 ‘996근무제’였다. IT기업들이 프로그래머 등 노동자들에게 9시에 출근해 9시까지 주 6일간 일하도록 강제하는 것에 대한 반대 캠페인이 개시되면서다. 중국 노동법은 주 40시간 노동에 연장근무 한도를 8시간으로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들이 죄다 법을 어겨 최소 주 72시간 노동이 기본이라는 것이다. 징동이나 알리바바 같은 e커머스 강자, 샤오미 등 전자기업까지 하나같이 996근무제를 시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996근무제가 처음 알려진 건 2014년 봄이다. 알리바바의 한 여성 노동자가 임신 중 야근을 반복하다가 사망하면서다. 네티즌들은 비극의 원인으로 ‘빌어먹을 996’을 지목했다. 휴가도 내기 어렵고, 연장근무에 대한 수당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IT기업들에 노동조합이 없고, 장시간 근무를 당연시하며 강제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분노는 증폭됐다. 캠페인 시작과 함께 20만명의 청년들이 호응했다. 보이지 않는 분노가 젊은층 사이에 퍼져나갔다. 한편 마윈 알리바바 회장은 “996을 할 수 있다는 건 행복”이라거나 “하루에 8시간만 일하는 사람은 필요없다”는 망언을 쏟아냈다. 자수성가의 상징 마윈은 하루아침에 청년 노동자의 적이 됐다.

사태의 심각성을 우려한 당국은 사이트 접근을 막아버렸다. 그러면서 신화사 등 관영매체들은 “분투와 996은 다르다”며 “996근무제는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에선 줄지어 노동운동가들을 체포하고, 다른 한편에선 대중의 분노를 잠재우려는 이중 전략이 눈에 띈다.

얼마 전 4차산업혁명위원회 장병규 의장은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에는 주 52시간 근무제가 맞지 않다”고 말하면서 중국의 996근무제를 찬양했다. 한국에선 ‘주 2교대, 24시간 노동’이 불법이니 중국을 따라갈 수 없다는 거다. 기가 막힌 논리 전개다.

IT업계의 ‘크런치모드’는 데드라인을 맞추기 위해 야근과 특근을 반복하는 것을 뜻한다. 중국의 ‘996’에 당당히 견줄 만하다. 2016년 한 해 넷마블에서만 두 명의 젊은 개발자들이 돌연사한 사실만 떠올려도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당시 무료노동신고센터가 500여명의 게임개발자들을 상대로 한 조사 결과, 한 번 출근하면 36시간 이상 회사에 머물렀다는 응답이 30%를 넘었다. 장병규 의장은 죽음을 부르는 일터를 만들겠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크런치모드에 죽어갔던 개발자들의 피땀과 장병규 의장의 재산 1조원은 무관할까? 중국의 개발자들이 마윈의 헛소리 뒤에 감춰진 ‘빌어먹을 996’의 폭력에 도전했듯, ‘크런치모드’를 복원하려는 모든 시도에 맞서야 할 때 아닐까?

<홍명교 동아시아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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