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에서 죽은 조선 청년들, 74년 만에 첫 정부 차원 위령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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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25일 일본 오키나와(沖繩) 북쪽 모토부초(本部町) 해변 한쪽 허름한 주차장에 조촐한 제단이 마련됐다. 영정은 미국 잡지 <라이프> 1945년 5월 28일자에 실린 사진이 올려졌다. 이 사진은 미군 종군 사진사 유진 스미스가 찍은 세소코섬을 배경으로 일본군 군부 14명 비목을 한 미군 병사가 쳐다보는 장면이다. 비목에 적힌 이름을 추적한 결과 그 해 1월 미군 공습으로 침몰한 군수물자 보급선 히코산마루(彦山丸) 승무원 14명의 묘로 추정된다. 이 중 남해 출신 김만두(23)와 고흥 출신 명장모(26)가 조선인으로 확인됐다.

10월 25일 오키나와 모토부초에서 열린 강제동원 희생자 위령제에서 김용덕 강제동원지원재단 이사장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10월 25일 오키나와 모토부초에서 열린 강제동원 희생자 위령제에서 김용덕 강제동원지원재단 이사장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조선인 희생자 최대 1만명 추정
이날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강제동원지원재단)이 주최한 위령제가 열렸다. 김용덕 강제동원지원재단 이사장은 추도사에서 “긴 세월 슬픔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 고국을 그리며 인내하신 영령에게 간소하게나마 위령제를 올립니다”라면서 “이렇게 늦게 찾은 것을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추도했다. 오사카 통도사 주지 최무애 스님은 조선인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위령제는 일본과 한국 스님의 독경과 헌화로 끝났다.

이곳에서 민간 차원 위령제는 열렸지만 정부 차원으로는 74년 만에 첫 위령제였다. 24일에는 강제동원지원재단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가 같이 주최한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해에 관한 국제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번 심포지엄에는 강제동원 및 유골 발굴에 관한 학자·민간단체·관련자 50여명이 참여했다.

일제하 강제동원 문제는 단순한 과거 문제가 아닌 현재 일본과 벌어지고 있는 무역·안보 문제 갈등의 본질이다. 마침 이날 이낙연 국무총리가 일본을 방문해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만났다. 특히 국내 일부 뉴라이트 학자들은 “강제징용이 없었다”고 주장해 또 다른 차원에서 국민분열 요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날 한·일 강제동원 관계자 모두 1939년부터 ‘모집’이라는 이름으로, 1942년부터는 ‘관 알선’으로, 1944년부터는 ‘강제징용’ 형태가 됐다는 것에 공감했다.

강제징용의 경우 러시아 사할린과 일본 홋카이도 문제가 많이 언급되고 그 지역의 생존자는 물론 사망자 유골도 돌아왔다. 그러나 오키나와 강제징용과 이곳에서 죽은 조선 청년 문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이곳에서 74년 만에 첫 정부 차원의 위령제가 열린 것이 그것을 방증한다.

이 오키나와 전쟁에서 조선인 희생자는 얼마나 될까. 오키나와 평화공원 전몰자 묘원에 새겨진 희생자 20만명 중에 조선인은 한국 국적 231명, 북한 국적 82명 등 460여명이다. 53명의 유골은 봉환됐다고 한다. 2015년 국내 강제동원위원회가 오키나와 피해자 신고를 받은 결과 사망 517명, 실종 157명, 생환 1919명, 후유증을 겪는 사람이 51명이다. 그러나 이는 70년이 지난 신고일 뿐이다. 정확히 몇 명이 오키나와에 끌려왔는지, 얼마나 살아 귀향했는지 알지 못한다.

일제하 조선 청년들이 가장 많이 끌려간 곳이 오키나와이고, 이곳에서 가장 많이 숨졌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오키나와 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징병자·군부·위안부·민간인 등 적게는 2800명에서 많게는 1만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한다. 평화공원에 새겨진 사망자가 460명에 불과한 이유는 일본 정부의 조사·발굴 은폐와 함께 유족이 평화공원에 이름을 새기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서승 우석대 석좌교수(동아시아평화연구소장)는 “오키나와 전쟁에 동원된 조선인 군부가 1만명, 일본군 위안부는 1000명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나 실증연구는 지지부진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오키나와에 끌려온 조선 청년은 ‘군부’라는 이름으로 일본군에 배속돼 진지 구축이나 탄약 운반 등 노역에 동원됐다. 일본은 본토 방어를 위한 전진기지로 오키나와에 대규모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많은 병력과 군부를 집결시켰다. 그 중 조선인 군부는 미군 공습에 무방비로 노출됐으면 전투 중에 죽었다. 25세에 대구에서 오키나와로 끌려온 김원영씨가 쓴 <어떤 한국인의 오키나와 생존수기>(1992)는 참담한 현장을 그리고 있다.

일본군에 배속 진지 구축 등 노역에 동원
“주로 진지 구축용 갱목 벌채와 운반작업을 했다.… 나하항으로 이동하여 항만작업에 동원됐다.… 전투부대에 편입되어 포탄이 쏟아지는 제일선에서 탄약과 식량을 보급했다.… 함포사격이나 공습폭격이 쉼없이 반복됐다.… 사체를 일단 중대본부로 옮기고 그 후 한쪽 팔을 잘라내고 시신을 밭에 묻었다. 잘라낸 팔을 제단에 올리고, 다음날 한쪽 팔을 장작 위에 올리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화장했다.… 팔을 잘라 화장할 여유가 없어 손가락을 삽으로 잘라내 그것을 숯으로 태워 화장하고, 시신은 그냥 밭에 묻을 계획이었다.”

국제심포지엄에서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가 유해 발굴의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국제심포지엄에서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가 유해 발굴의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조선 청년들은 미군의 함포사격과 전투만으로 죽지 않았다. 많은 조선 청년들은 미군에 항복하기 위해 부대를 탈출하다 일본군에게 사살됐다. 한 일본인의 기록에는 ‘남부 해안에서 조선인 30명 정도가 포로가 되기 위해 바닷물에 잠긴 채 손을 들고 있을 때, 일본군이 그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굶어죽는 경우도 많았다. 한 일본 측 인사는 ‘몇 명의 군부가 부검을 위해 옮겨왔는데 대다수 군부가 뼈와 가죽밖에 없어 누가 봐도 아사라고 판단할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명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조선인 군부들은 전투가 벌어지자 결국은 스파이 혐의로 학살되거나, 집단 자결에 내몰리거나, 살아남았다고 해도 산야를 헤매다 폭사·아사당하는 등 그 비극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오키나와에는 조선인 종군위안부도 많았다. 이곳 한 일본인 의사에 따르면 “대만에 가서 의약품과 생활물자를 들여오는 도중 요나구니 바다에서 미군기 공격을 받아 좌초됐다”면서 “대만에서 53명의 조선인 위안부가 동승했는데, 이 공격으로 살아남은 여성은 7명뿐이었다”고 증언했다. 오키나와에만 130여곳의 위안소가 있었고, 이 중 조선인 종군위안소가 41개나 됐다.

대표적인 사람이 배봉기 할머니(1914~1991)다. 충남 예산 출신의 배 할머니는 1975년 10월 22일 일본 <고치신문>에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증언했고, <교도통신>을 통해 일본 전역에 알려졌다. 이는 국내 김학순 할머니의 1991년 8월 증언보다 무려 16년 빨랐다. 배 할머니는 17살 때 결혼했지만 실패한 후, 만주와 함경도를 떠돌며 살다 1943년 부산·일본 가고시마 등을 거쳐 1944년 오키나와에 왔다. 그리고 조선 여성 6명과 함께 도카시키섬 ‘빨간 기와집’으로 불린 일본군 위안소에서 생활했다.

유골 유전자 검사로 조선인 가려내야
배 할머니는 일본이 패망한 이후 미군을 상대로 똑같은 일을 했다. 그는 “전쟁터에서 ‘일’이 창피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배 할머니는 극심한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며 사탕수수밭 가운데 허름한 헛간에서 혼자 살다 숨졌다. 배 할머니의 참담한 삶은 일본에서 <오키나와의 할머니>라는 다큐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오키나와 평화공원에는 이곳에서 숨진 20만명의 유골이 모셔져 있다. 이 중 한국 국적 231명, 북한 국적자도 82명이나 된다.

오키나와 평화공원에는 이곳에서 숨진 20만명의 유골이 모셔져 있다. 이 중 한국 국적 231명, 북한 국적자도 82명이나 된다.

일본 후생성이 집계한 오키나와현 전몰자는 일본인 18만8136명, 미국인 1만2520명 등 20만656명이다. 그 중 오키나와현 주민과 군부는 12만2228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현재 18만7410구의 유골이 수습됐다. 단순계산으로 700명의 유골이 아직 수집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1944년과 1946년 오키나와현 인구통계를 비교하면 15만명 이상 민간인이 숨진 것으로 추계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아직 3만명 가까운 유골이 땅 속에 있는 셈이다. 일본은 그동안 발굴된 유골을 화장했으나 2015년부터 신원 확인을 위해 그냥 보관하고 있다. 그렇게 임시로 보관하는 유골도 700구 정도 된다.

최근 한·일 간에는 ‘유골을 유족 품으로’라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2016년 일본 홋카이도 사찰에 모셔져 있던 조선인 유골이 70년 만에 돌아오기도 했다. 오키나와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봉환작업은 이번에 위령제를 올린 모토부초 발굴이 1차 대상이다. 그러기 위해선 발굴한 유골 중 유전자 검사를 통해 조선인 선별이 가능하느냐 여부다. 또 한국 강제동원 피해자 가족의 유전자와 이곳에서 발굴된 유골의 유전자가 일치하느냐를 확인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한·일 간 민간 및 당국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 현재 외교루트를 통해 신원 확인 실무협상이 이뤄지고 있다.

게다가 이곳에는 북한 출신 강제징용자도 적지 않아 이곳 유골 봉환 문제는 남북 공통의 관심사다. 이미 지난해 7월 남북 민화협은 평양에서 일제강점기 희생된 조선인 유골 봉환에 합의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민화협은 올 3월 일본 오사카 통국사에 있던 유골 74위를 모셔와 제주 선운정사에 임시 안치했고, 이 중 3명은 DNA 검사로 신원이 확인됐다. 김홍걸 민화협 상임공동대표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단지 과거의 피해자가 아닌, 역사적 진실 복원과 함께 인권 존중이 부활하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서승 교수는 “오키나와는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접촉면으로 두 세력의 각축으로 충돌이 일어난 것”이라면서 “평화를 위해서는 이 접촉면을 소통과 교류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남북이 대립하는 38선을 대립과 단절의 선에서 소통과 융합의 선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키나와(沖繩)·글·사진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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