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경제침략 반일로 막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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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는 “사실상 한국의 판정승”… 정치권보다 시민사회와 기업이 역할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 규제조치가 시작된 지 100일이 지났다. 두 나라 간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지난 7월과 달리 한·일관계의 ‘공기’는 약간 달라졌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만나 대화의 물꼬를 텄다. 이 자리에서 조기 정상회담을 원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도 전해졌다. 이 총리는 아베 총리와의 회담에 대해 “일본의 태도가 변하지 않은 것도 있고 약간의 변화 기미가 엿보이는 것도 있었다”고 평했다. 적어도 양국이 관계 개선을 위한 출구전략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뜻을 모은 것으로 풀이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가면을 쓴 정기수요시위 참석자가 두 손을 모으고 사죄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아베 신조 일본 총리 가면을 쓴 정기수요시위 참석자가 두 손을 모으고 사죄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일본의 태도 변화를 이끈 한 축은 일본 기업의 목소리다. 국내 기업들은 일본 수출규제에 맞서 일본에 의존하던 소재·부품의 공급처 다변화와 국산화를 추진하고 있다. 수출규제의 장기화는 한국 시장 내 일본 기업 점유율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같은 국내 기업의 대처는 일본 기업에 위기감을 불러왔고 일본 재계는 아베 정권의 수출규제 방침을 두고 마찰을 빚는 데 이르렀다.

일본제품 불매운동 아직도 뜨거워

불매운동도 일본의 태도를 바꾸는 데 영향을 끼쳤다. 불매운동 이후 일본산 맥주와 의류, 자동차의 한국 내 매출이 급감했다. 일본 여행상품 불매로 한국인 관광객이 줄면서 일본 지역 관광업계는 타격을 입었다. 오키나와 등 일부 지자체에서는 자국 관광업계에 긴급자금마저 지원했다.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벌인 불매운동으로 외교분쟁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시민사회와 기업이 한·일관계를 분기점으로 이끈 주축이 된 셈이다.

강경 일변도였던 양국의 분위기는 다소 누그러졌지만 불매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하나의 문화로 정착되는 모양새다. 일본 의존도를 낮추려는 기업들의 다양한 공급처 확보 노력도 계속된다.

반면 일본을 겨냥해 연일 강경발언을 쏟아내던 정치권의 여론전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특히 일본 수출규제를 ‘경제침략’으로 규정하고 대응전략을 진두지휘하던 더불어민주당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이하 일본경제침략대책특위)는 잠정적으로 활동을 중단했다. 당분간 계획된 일정도 없다. 3개월 만에 반일(反日) 공세의 불씨가 사그라진 것이다. 이 같은 여당의 ‘반일 정쟁화’는 ‘경제침략’을 막는 효과가 있었을까.

“사실상 한국의 판정승, 일본의 판정패.” 지난 10월 23일 더불어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이 일본의 대한국 수출 규제조치 100일이 지난 상황을 점검한 뒤 내린 총평이다. 실제 올해 3분기 일본의 대한 수출 실적은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10.8% 하락한 반면 한국의 대일 수출 실적은 같은 기간 4.2% 감소하는 데 그쳤다.

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기업의 반도체 생산에는 차질이 없었다. 국내 기업이 소재 공급망을 수출 규제조치 이후 신속하게 미국과 싱가포르, 대만 등으로 다변화하면서 재고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수출규제 이후 한국 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모리타화학과 도쿄오카공업 등 일부 일본 기업은 국내에 생산시설을 증설하는 방안까지 검토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불매운동으로 인한 한국인 관광객 감소로 일본 여행수지가 악화되고, 지방 소도시를 중심으로 일본 지역경제의 피해도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국책기관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과 대통령 직속 민·관 합동 경쟁력 강화 컨트롤타워인 ‘소재·부품·장비 경쟁력위원회’도 비슷한 내용을 담은 자료를 냈다. 이향철 광운대 동북아통상학부 교수는 “일부 일본 불화수소 제조기업은 도산위기에 몰린 곳도 있다”며 “지금까지는 한국에서 선방했고 기본 대응방향도 잘 잡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일본 화이트리스트 배제조치 규탄대회 / 더불어민주당

일본 화이트리스트 배제조치 규탄대회 / 더불어민주당

한국이 ‘판정승’을 거두는 과정에 여당의 강경대응책들은 설 자리가 없다. 정책에 반영될 수 없는 아이디어 수준에 그친 정책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한·일 양국이 강경노선으로 치달은 지난 8월 민주당 일본경제침략대책특위는 일본 전역 여행 금지와 도쿄올림픽 보이콧과 같은 초강강책을 주장했다가 여론의 역풍을 맞고 수위를 조절한 바 있다.

일본 소도시 지역경제 피해 커져

그러나 이후에도 여당의 반일 공세는 이어졌다. 지난 8월 14일 최재성 일본경제침략대책특위 위원장은 일부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국산 D램의 일본 수출에 대한 ‘캐치올’ 방식의 규제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D램 수출 제한 카드는 이미 최 위원장의 발언 전날 청와대에서 “D램 수출 제한은 검토하고 있지 않다”며 입장을 정리한 사안이었다. 결국 D램 수출 제한은 논란을 일으킨 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당·정·청 간 합의되지 않은 카드를 섣불리 꺼냈다가 폐기한 셈이다. 이에 대해 일본경제침략대책특위 관계자는 “수평적 대응조치를 언급했던 것으로, 의도와 다르게 전달됐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관제권을 되찾기 위해 일본과 협상 중인 제주 남단 항공회랑 문제를 일본경제침략대책특위에서 대일 협상카드로 언급했다가 번복하는 소동도 있었다. 제주 남단회랑은 한국의 비행정보구역(FIR)에 속하지만 1980년대 한국과 중국이 정식수교를 맺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국 측이 우리 관제기관과 직접 교신하는 행위를 거부하면서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의 중재를 받아 관제권 분할이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관제권은 한국과 중국, 일본 3국으로 나뉘었다. 관제권 협상과정에 나선 일본이 관제권을 돌려주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협상은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보안 유지가 필요한 사안을 두고 일본경제침략대책특위에서 일본 수출규제와 연결해 대일 협상 카드로 거론한 것이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윤영일 의원 측은 “여당에서 안보와 연결된 문제를 대일 카드로 언급했다가 대외 협상에까지 영향을 미친 사안”이라며 “외부 유출이 되고 나자 국토부와 여당이 서로 책임을 떠넘겨 흐지부지됐다”고 밝혔다.

일본경제침략대책특위를 포함, 대일본 수출규제와 관련해 여당이 만든 대응기구만 4개에 달한다. 그러나 실효성 있는 정책을 만들고 지원하기보다는 여론전에만 치중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본 수출규제 대응기구가 모여 발의한 법안(소재·부품·장비산업 특별법)은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사실 따져보면 국회에서는 이번 사안과 관련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다름 없다”며 “일본에 가네, 안 가네 수준의 논의를 왜 위원회까지 만들어서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여당에서 내놓은 정책들은 실효성이 결여된 정치적 구호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양준호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제위기 속 ‘반일’이라는 키워드를 넣으면 지지율도 올라가고 대기업을 위한 규제완화의 명분도 만들어 준다”며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나온 행보”라고 지적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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