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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과학기술정책연구원 혁신기업연구단장 “‘눈 먼 돈’이라도 지원 중단해선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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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중소기업이 살아날까. 역대 정부 모두 중소기업 육성에 힘썼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마다 지원을 늘렸다. 중소기업에 투입되는 연구·개발(R&D) 지원예산 규모는 선진국 수준이다. 그런데도 중소기업은 한국 산업생태계에서 스스로 살아남을 힘을 갖추지 못했다. 대기업에 종속된 1차 하청업체가 아니면 하루 앞도 내다보기 어렵다. 이들조차 대기업으로부터 일감을 받는 대가로 단가 후려치기나 기술탈취 문제를 떠안는다.

반기웅 기자

반기웅 기자

수직계열에서 이탈한 ‘독립’ 중소기업은 정부 발주사업에 목매고 연명하는 처지다. 중소기업에 붙은 ‘나쁜 일자리’ 꼬리표도 여전히 떼지 못했다.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도 중소기업은 청년들의 취업 선택지에 오르지 않는다. 낮은 처우에 인재 유입이 끊기면서 기술개발은 이뤄지지 않는다. 혁신이 나올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다. 이 고리를 끊을 방법은 없는 걸까. 지난 10월 15일 김선우 과학기술정책연구원 혁신기업연구단장(42)을 만났다. 김 단장은 중소기업연구원을 거쳐 과학기술정책연구원에서도 중소기업 생태계를 연구하고 있는 중소기업 전문가다.

-중소기업에 정부 예산을 지원해봐야 못살린다는 ‘무용론’이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진다.

“구분해서 봐야 한다. 일단 정부 예산으로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게 효과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예스’다. 지원받은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을 비교하면 지원받은 기업의 매출·고용 성장률이 더 높다. 문제는 그 효과가 오래 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는데 몇 년 지나면 효과가 사라진다.”

-한시적인 효과에 그치는 이유가 뭔가.

“정부 부처에서 먼저 중소기업들에게 눈에 보이는 단기적인 성과를 요구한다. 예산을 들여 지원했으니 기업도 거기에 맞는 개선된 수치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부도 수치가 ‘플러스’로 나올 수 있는 기업을 중심으로 지원을 한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중소기업 면면을 보면 혁신과는 거리가 먼 회사들이 많다. 세상에 없는 기술을 만들겠다는 기업에는 지원이 어렵다. 리스크가 크니까. 중소기업 R&D 지원내역을 보면 한국은 대부분 자동화 시스템이나 제어·보안, 뿌리기술 분야에 지원이 몰려 있다. 반면에 미국의 중소기업 R&D 지원은 우주, 무인항공기, 시뮬레이션, 센서 기술의 비중이 높다. 신산업과 기술혁신에 초점을 맞춘 건데 우리도 그렇게 가야 한다. 한국식 중소기업 R&D 지원은 국가의 미래 먹거리나 신성장 동력을 얻기 위한 게 아니다. 당장 중소기업이 어렵다고 하니까. 기업 에로사항을 해소하기 위해 투입하는 지원금 성격이 짙다.”

-그래도 각 부처에서는 ‘중소기업 지원 잘하고 있다’고 자평한다.

“정부가 투자한 중소기업의 사업 성공률은 90%가 넘는다. 이 결과를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 정부에서 보수적으로 안전한 분야와 기업에만 지원을 몰아준 결과다. 또 정부 탓만 할 수 없는 게, 예산을 투입한 사업이 실패하면 사회적으로 큰 비판을 받는다. 국정감사에서도 바로 지적을 받는다. 혁신적인 기업에 투자했다가 실패하더라도 비난하기보다는 의미있는 도전으로 봐주는 사회적인 공감대가 필요하다. 한쪽에서 혁신기업 육성을 주장해봐야 사회적 동의 없이는 의도한 방향으로 끌고 가기 어렵다.”

-중소기업 지원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사업은 많지만 정작 중소기업 전용사업은 적다.

“사업 예산 100%가 중소기업에 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 2017년에 정부 부처 14곳의 중소기업 기술혁신 지원제도를 통해 참여한 사업은 153개다. 이 중에서 100% 예산이 중소기업으로 간 사업은 4개뿐이다. 각 부처에서 자율적으로 목표를 정해서 지원하다보니 사업 자체가 뭉뚱그려진 형태로 진행됐다. 해당 사업이 중소기업 지원 취지에 부합하는지 여부도 점검하지 않았던 건데, 올해부터는 중소기업 전용사업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다.”

-대학(산학협력단)에도 R&D 예산이 많이 풀린다.

“정부가 산학협력단 지원을 많이 한다. 주의할 부분이 있다. 대학에 예산을 많이 보내니까 거기에 역량이 축적돼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산학협력단 내부를 보면 늘 인력이 바뀐다. 고용보장이 안 되는 계약직이기 때문에 고급 인력들이 산학협력단에 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 대학도 해마다 신규인력을 충원해서 사업 예산을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서류작업만 반복한다. 새로운 기술개발이 어렵고 역량도 쌓이지 않는 게 현실이다.”

-다른 나라는 중소기업 지원을 어떻게 하고 있나.

“미국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우리 중소기업 기술혁신 지원제도(KOSBIR)가 미국 SBIR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해서 만들었을 정도로 미국 중소기업 지원 시스템은 앞서 있다. 미국은 연방정부 기관 중 연간 연구예산이 1억 달러 이상인 기관은 3.2%의 예산을 SBIR 지원에 쓰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아예 예산 지원을 규정으로 못박아 둔 거다. 정부가 예산을 주고 기업의 지분을 받는 것도 아니다. 대출 개념이 아니어서 중소기업에서는 갚을 필요도 없다. 실패해서 투자금을 다 날려도 기업은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 다만 정부의 지원 기준이 까다롭다. 무엇보다 ‘혁신성’이 있어야 지원을 한다. 기업에서 제안한 프로젝트가 얼마나 혁신적인가를 보고 의미가 있다고 판단하면 지원을 한다. 그 뒤부터는 오롯이 기업의 몫이다. 정부는 개입하지 않는다. 실패해도 좋으니 세상에 없는 기술을 만드는 데 마음껏 쓰라는 취지다.”

중소기업 생산 공정 / 경향 DB

중소기업 생산 공정 / 경향 DB

-우리도 미국 방식을 도입해보면 어떨까.

“지금처럼 중소기업 지원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얘기다. 만약 미국식으로 예산지원해주고 마음대로 해보라고 했다가는 국회에서 정부가 예산 낭비에 방만 운영한다고 난리가 날 거다. 하지만 이전 지원방식은 한계가 있다. 비효율적이고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지 않나. 중소기업 지원예산이 전체 3조원 정도 된다. 이 예산은 버려도 좋고 전부 다 실패해도 좋다는 생각을 전제로 지원을 해야 한다. 정말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있는 기업이면 투자를 하는 게 맞다. 다 실패하고 몇 개만 성공하더라도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시장에서 상용화한다면 한국으로서는 이득이다. 미래 먹거리를 찾는 작업인데 이 정도 투자는 해야 하지 않나. 눈먼 돈이라는 비판을 받더라도 지원을 중단하면 안 된다.”

-그러려면 지원금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기업을 잘 골라내야 할 것 같다.

“SBIR 선정에서는 지원금 심사를 맡은 심사위원이 누구인지 홈페이지에 공개한다. 심사위원들은 누구나 인정할 만한 현장 전문가들로 구성되는데, 지원금 신청이 들어오면 해당 사업의 퀄리티를 면밀히 따진다. 단순히 뽑고 탈락시키는 작업만 하는 게 아니라 탈락한 사업에 대해서도 분석보고서를 써서 회사로 보내준다. 탈락한 이유를 설명해주고 대안도 제시한다. 탈락한 회사는 그 가이드 라인에 따라 프로젝트를 다시 만들어 재도전한다. 우리는 지원했다가 탈락하면 끝이다. 이유도 모른다. 중소기업 지원사업이 몇만 개씩 쏟아지다보니 심도 있는 심사를 할 수 없다. 형식에 맞춰 서류 만드는 작업도 버겁다. 현실적으로 프로젝트의 퀄리티를 따지기 어려운 구조다.”

-중소기업 대부분이 대기업에 종속된 하청업체다. 이런 상황에서 중소기업 기술개발 지원이 의미가 있을까.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자주 나오는 얘기다. 사실 우리나라 중소 제조기업 75%가 대기업 벤더구조 안에 들어가 있다. 1차, 2차 어떤 방식으로든 수직계열구조 속에 포함된다. 내 주변에도 많은 분들이 ‘이런 구조에서는 중소기업 기술개발을 지원한다고 돈 줘도 결국 대기업 지원해주는 꼴’이라고 한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런 부분도 있다. 하지만 대기업 하청기업이라는 이유로 지원사업에서 완전히 배제하면 안 된다. 하청업체에서도 신사업을 준비할 수 있다. 대기업 하청에서는 미래가 없다고 판단해 혁신기술 개발을 원하는 기업도 분명히 존재한다. ‘대기업 하청은 지원 불가하다’고 해버리면 하청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대신 기업이 구상하고 있는 사업 내용을 꼼꼼히 심사할 필요가 있다. 프로젝트가 담고 있는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 심사해야 한다.”

-대기업 중심 수직계열화 구조가 중소기업의 성장을 막고 있나.

“이제까지는 대기업이 하청기업을 끌고 왔다. 이 모델은 과거 경제성장기에 유효했다. 한국 경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4차 산업혁명을 말하고 기존 직업의 종말이 거론되는 시기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수직계열화 속에 있는 기업들은 빨리 전환을 준비해야 한다. 과거 누적 데이터로는 대기업에 종속된 하청기업들이 더 앞설 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달라진다. 민첩하게 변화에 대응하고 고객의 니즈를 잘 파악하는 독립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새 먹거리를 창출할 수 있는 기업을 키우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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