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방송노동 현장 좀 나아졌습니까?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이한빛 PD 떠난 지 3년… 장시간 노동 여전하지만 “그래도 전보다 나아졌다”

3년 전인 2016년 10월 26일. tvN 드라마 <혼술남녀>의 마지막회가 방송된 다음 날이었다. <혼술남녀>의 조연출이었던 27세 신입 PD 이한빛씨가 숨진 채로 발견됐다. 그는 유서에서 방송가의 열악한 노동환경, 특히 비정규직 스태프들을 혹사시키는 현실을 고발했다. 정규직이었던 자신도 촬영기간 55일 중 딱 이틀 쉬었다. 업무 가운데는 해고된 비정규직 스태프들에게 주어진 계약금을 돌려받는 일도 있었다.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이 농담 반 진담 반 건네는 ‘노동 착취’라는 단어가 가슴을 후벼팠어요.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노동자를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 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이한빛 PD 유서 중)

유족은 2017년 4월 이 PD의 죽음을 공론화했다. 죽음의 원인을 개인적 이유에서 찾았던 CJ ENM은 그해 6월 유족에게 공식 사과하고 노동관행 개선을 약속했다. 유족과 언론노조는 지난해 1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를 만들었다. 그 전후로 방송작가유니온과 방송스태프노조도 출범했다. 방송 제작 현장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바빠졌다. 이 PD가 떠난 지 3년, 방송노동자들의 삶은 나아졌을까.

현장이 변했다

드라마 스태프들은 “현장이 달라졌다”고 입을 모은다. 방송사와 제작사가 이들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 것이다. 스태프들이 모여 있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인 방송신문고에 참여하는 이는 1000여명. 이들은 장시간 노동을 제보한다. 스태프노조가 부당한 노동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면, 방송사·제작사는 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현재까지 이들이 고발한 현장은 수없이 많다. 노조는 10월 14일에도 성명을 내고 KBS 2TV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스태프들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고 지적했다. 여의도에 집결한 뒤 지방 촬영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꼬박 21시간이 걸렸다. 숙소는 사우나였다.

장시간 노동은 여전하다. “그래도 예전보다 나아졌다”는 게 스태프들의 평가다. 스태프노조에 따르면 20시간이 넘어가던 하루 노동시간이 16~18시간으로 줄어든 곳이 많다. 팀별로 용역계약을 맺고 팀장급 스태프에게 사용자 책임을 지우던 도급계약(턴키계약)은 대체로 외주사와 팀원 간 개별적인 업무위탁계약(프리랜서)을 맺는 형태로 바뀌었다.

조명팀에서 일하는 스태프 ㄱ씨는 “드라마 현장 10곳 가운데 2~3곳 정도는 스태프들 눈치를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마지막 컷을 위해 추가로 30분만 더 찍으면 되는 상황이었요. 그런데 각 팀별 감독들이 안 찍겠다고 했죠. 이미 열몇 시간 일한 상태에서 자꾸 이런 선례를 만들면 30분이 한 시간 되고, 한 시간이 두 시간 되는 건 일도 아니라고 판단한 거죠. 제작사 쪽도 수긍하고 촬영을 접었습니다.”

눈에 띄는 성과도 있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한빛센터 등의 요구로 드라마 제작현장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한 뒤 감독급을 제외한 조수급 스태프의 노동자성을 인정했다. 지난 6월에는 방송스태프노조·언론노조·지상파 3사·드라마제작사협회가 모인 4자 협의체가 2020년 드라마 제작현장에 표준근로계약서를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스태프들도 4대보험 가입, 초과근무수당 등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임금도 표준인건비 기준에 따라 지급하기로 했다. 당시 4자 협의체는 9월까지 표준계약서 내용과 표준인건비 기준을 마련하기로 했다.

실무협상이 순조롭지만은 않다. 지난 9월까지 실무협의는 한 차례 열렸다. 스태프노조는 10월 4일 성명을 내고 “제작사협회가 일방적으로 실무협의를 연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제작사협회는 인건비 기준안 마련에 시간이 필요하다며 “협의체 논의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라고 맞섰다. 작은 소란 끝에 양측은 10월 17일 다시 협의를 시작했다. 양쪽 모두 ‘내년 도입’에는 이견이 없다. 최대 쟁점 중 하나는 이동시간을 노동시간으로 볼지 여부다. 노조는 이동시간에도 장비점검 같은 업무가 이뤄진다며 노동시간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방송·제작사 측은 난색을 표한다.

고 이한빛PD

고 이한빛PD

김두영 방송스태프노조 위원장은 “방송사·제작사들조차도 현재 시스템으로는 변화를 줄 수 없다고 말한다. 지금은 대본 4회분과 예치금만 있으면 미니시리즈 편성이 가능한 상황”이라며 “엉뚱한 데서 제작비를 줄이려 하지 말고 쪽대본으로 시간에 쫓겨 촬영하는 시스템 전반을 바꿔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표준계약서 도입이 끝은 아니다. 현장에 제대로 정착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ㄱ씨는 “청와대에서도 주 52시간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는 상황에서, 정권이 바뀌면 또 예전으로 돌아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고 했다. 진재연 한빛센터 사무국장은 “현장이 갑자기 변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스태프 스스로가 표준계약서가 갖는 의미를 알고, 제작사가 철저히 합의내용을 이행하게끔 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각지대를 찾아서

촬영장 밖에서 밤을 새우는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이 있다. 편집, VFX(비주얼이펙트), DI(색보정)를 담당하는 후반작업자들이다. 최근 한빛센터는 후반작업자 간담회를 열고 이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동청소년 연기자와 여성 드라마 노동자들의 노동인권 문제, 제작현장의 안전문제도 들여다보고 있다. 진 사무국장은 “인맥으로 연결된 방송판에서 용기있게 문제를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다”면서도 “목소리를 내줄 ‘의인’들을 하나둘씩 만나고 있다”고 했다.

방송가의 대표적 비정규직인 ‘방송작가’들에게도 변화는 있었다. 방송작가유니온은 방송사와 단체협약을 이끌어냈다. 체불임금도 노조가 나서면 어렵지 않게 받아낸다고 한다. 하지만 불공정관행이 크게 나아졌다고 하긴 어렵다.

이미지 방송작가유니온 위원장은 “말로 일을 시작하고, 말로 해고되던 구두계약 관행을 끊고자 서면계약서 체결을 요구해왔다”면서도 “개편 때마다 방송작가를 채용하고 해고하는 관행이 그대로인 상황에서 계약서가 ‘해고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9월 MBC 시사프로그램 <2시 뉴스외전> 작가가 개편을 이유로 일방적인 계약 해지를 당해 논란이 일었다. 계약서에는 ‘계약 해지 시 마지막 방송 제작일 7일 전에 예고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손쉽게 계약을 끝낼 수 있다는 의미다. 피해작가와 노조는 ‘독소조항으로 인한 부당해고’라고 반발하며 MBC 본사 앞에서 1인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최승호 MBC 사장은 10월 14일 비공개 업무보고에서 “일방적 계약 해지로 인한 피해보상 규정을 만들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한빛 PD의 죽음 이후 방송현장에는 원칙과 기준이 생겨나고 있다. 그 속도는 빠른 듯하면서도 면면은 더디다. 이한빛 PD 아버지인 이용관 한빛센터 이사장은 “쉽게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방송노동자들이 크게 목소리를 내 변화의 단초들이 만들어졌다”며 “한빛이에게 조금 덜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