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와 러시아 “트럼프야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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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정부군이 지난 10월 14일(현지시간) 쿠르드족을 터키군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군과 함께 북부 접경지대 도시 만비즈에 진입했다고 밝혔다. 만비즈는 2012년 미군의 대테러전 파트너인 쿠르드민병대(YPG)가 이슬람국가(IS)로부터 탈환한 이래 시리아 정부군이 단 한 번도 진입하지 못했던 곳이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왼쪽)이 10월 14일 리야드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사우디 살만 국왕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왼쪽)이 10월 14일 리야드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사우디 살만 국왕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이날 군대 투입은 앞서 미국 정부가 시리아 북부 터키 접경지대에서 약 1000명의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한 지 몇 시간 만에 이뤄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테러전 파트너를 저버리는 등 무책임한 결정으로 중동지역 혼란만 가중됐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시리아의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와 지원군인 러시아만 이득을 보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아사드 “미국의 오판은 나의 힘”

현재 상황은 여러모로 아사드 정권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쿠르드족이 터키의 거센 공세에 맞서 아사드 정권에 의존하는 상황이 되면서 당장 쿠르드 지역정부와 자치권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됐다. 쿠르드족은 대테러전 과정에서 시리아 전체 영토의 약 28%에 해당하는 자치지역을 북동부에 구축했다. 특히 이 지역은 곡창지대와 유전이 몰려 있어 시리아에서도 ‘노른자 땅’으로 분류된다. 아사드 정권 입장에서는 그동안 미국이 버티고 있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터키의 공격, 미군의 철수로 상황이 달라졌다. YPG는 앞서 시리아 정부군에 군사지원을 요청했다고 밝히면서 “고통스러운 양보를 했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지만 쿠르드 자치지역 축소 내지는 자치권 축소 등을 제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터키군이 시리아 내 쿠르드 지역에 화력을 집중하는 사이, 시리아 정부군이 그동안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반군지역을 밀어버릴 가능성도 높아졌다. 아사드 정권은 러시아의 지원을 등에 업고 현재 전체 국토의 약 62%를 수복했다. 하지만 나머지 지역은 쿠르드, 그리고 시리아 내전에 개입하고 있는 터키·이란이 장악하고 있다. 이슬람 수니파 반군을 지원하는 터키는 알레포를 비롯해 북서부 일대에 시리아 전체 영토의 10%에 해당하는 지역을 차지했다. 아사드 입장에서는 러시아의 군사지원을 등에 업고 수니파 반군조직을 칠 절호의 기회다.

아사드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때부터 시작된 미국 정부의 잘못된 판단 덕분에 이제까지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영국 <더타임스>는 칼럼을 통해 오바마 대통령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아사드 정권만 더욱 공고해졌다고 비판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아사드 정권을 교체하겠다면서도 가장 확실한 방법인 미군 지상전 투입 카드를 배제했다. 시리아 정부군이 내전 도중 반군지역에 화학무기를 사용한 데 대해 경고하면서도 끝내 응징하지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이 좌고우면하는 사이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는 러시아가 재빨리, 그리고 과감하게 시리아에 파고들었다. 시리아 정부군은 IS와의 전투보다 수니파 반군과의 싸움에 집중했는데, 러시아군의 공습 지원 덕에 승승장구했다. 러시아군이 시리아 내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한 2015년 9월부터 시리아 정부군은 북서부 이들리브를 제외한 모든 지역 전투에서 승리했다.

러시아가 시리아에 ‘무력완화지대’를 세우면서 결과적으로 아사드 정권을 도왔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수니파 반군은 시리아 남부와 남서부, 수도 다마스쿠스 동부 외곽지역인 구타, 서부 홈스를 장악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에 개입하고 있던 터키, 이란과 함께 2017년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이들 지역을 무력완화지대로 설정하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시리아 정부군과 러시아는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세력의 위협을 이유로 이들 지역을 차례차례 집중공격하며 탈환했다. 미국의 외교전문매체 <포린폴리시>는 무력완화지대 설정은 실제로는 아사드 정권의 한정된 군사자원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러시아의 악의적인 계획이었다고 지적했다.

시리아 북부 데리크에서 10월 13일 쿠르드족 주민들이 터키의 지원을 받는 무장세력에 처형당한 여성 정치인 헤브린 칼라프의 관을 옮기며 터키를 규탄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시리아 북부 데리크에서 10월 13일 쿠르드족 주민들이 터키의 지원을 받는 무장세력에 처형당한 여성 정치인 헤브린 칼라프의 관을 옮기며 터키를 규탄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을 계기로 중동지역 군사작전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시리아 타르투스에 해외 군사기지를 뒀는데 이는 구소련권 국가를 제외하고는 유일한 해외 기지다.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이 격화되는 와중에 지중해 항구도시 라타키아에 공군기지도 만들었다.

중동지역 영향력 키우는 러시아

러시아는 터키의 쿠르드지역 공격사태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며 국제사회에서 입지를 더욱 다질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는 최근 터키에 방공미사일 시스템 S-400을 인도하는 등 군사협력 관계를 강화했다. 러시아의 만비즈 주둔만으로 터키의 공격 수위를 낮추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러시아군이 이 지역에 버티고 있는 한 터키와 시리아 정부군 간 전면전으로 치닫는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눈은 이미 시리아에서 다른 중동국가로 향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동지역의 가장 확실한 대테러전 파트너인 쿠르드를 배신하면서 생긴 영향력의 공백을 파고드는 모양새다.

푸틴 대통령은 10월 14일 미국의 걸프지역 맹방인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했다. 양국의 전략적 동반자관계 확대와 관련해 경제분야 등에서 협력을 강화하는 협정 20여건을 체결했다. 푸틴 대통령의 이날 방문은 2007년 방문 이후 12년 만에 처음이었다.

사우디는 냉전시절 공산주의 이념을 전파하려는 구소련(러시아의 전신)을 경계했다. 러시아는 사우디의 역내 최대 라이벌인 이란과도 우호적인 관계다. 하지만 최근 국제정세가 급박하게 변화하면서 러시아와 관계개선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사우디의 젊은 실세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지시 의혹을 받으며 국제사회에서 입지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 미국 내에서도 사우디와의 관계를 재고해야 한다는 비판 목소리가 거세지는 상황이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러시아와 관계개선을 지렛대 삼아 난국을 돌파하려 한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푸틴 대통령은 이번 방문에 앞서 사우디에도 S-400 판매를 제의했고 사우디는 분명하게 거절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최근 드론 공격을 당해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 주요 시설 2곳의 가동이 멈춘 사우디 입장에서는 유가조정을 위해서라도 주요 산유국 중 하나인 러시아와 협력이 절실하다.

<박효재 국제부 기자 mann616@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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