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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부마민주항쟁, 40년 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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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민씨가 10월 6일 부산 중구 민주공원 민주항쟁기념관에 전시된 걸개그림을 바라보고 있다. / 권도현 기자

정광민씨가 10월 6일 부산 중구 민주공원 민주항쟁기념관에 전시된 걸개그림을 바라보고 있다. / 권도현 기자

“부산에 비상계엄 선포.”

1979년 10월 18일자 신문 1면은 ‘뜬금없는’ 뉴스가 시커먼 제목과 함께 도배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작금의 부산에서 지각 없는 일부 학생들과 이에 합세한 불순분자들이 엄연한 국가 현실을 망각, 외면하고 공공질서를 파괴하는 난폭한 행동으로 사회 혼란을 조성하여 시민들을 불안케 하고 있음은 개탄을 금치 못할 일”이라고 했다. 부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날 이전까지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이틀 뒤인 20일에는 경남 마산 일대에 위수령을 내렸다는 소식이 1면을 장식했다. 이유는 같았다. “마산시 일원의 일부 학생과 불순분자들의 난동과 소요” 때문이었다.

진실은 너무 쉽게 가려졌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의 거리로 나선 건 평범한 학생과 시민이었다. 이들은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유신체제 이래 최초의 시민항쟁이었다.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으로 시작된 유신정권은 7년 만에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부마민주항쟁’이 올해 40돌을 맞았다. 항쟁은 유신체제의 막을 내리게 한 촉발제가 됐고, 그 열망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지만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올해에서야 항쟁 시작일인 10월 16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부마 거리에 있었던 보통사람들이 40년 전 기억을 꺼냈다.

터질 게 터졌다

정광민씨 / 권도현 기자

정광민씨 / 권도현 기자

발단은 10월 16일 부산대 시위였다. 전날 부산대에는 2개의 선언문이 돌았지만 시위는 불발됐다. 당시 부산대는 ‘유신대학’이라 불렸다. 수년간 독재에 맞서 이렇다 할 저항의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경제학과 2학년 정광민씨(61)는 ‘이렇게 끝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혼자 끄적여놓은 선언문을 꺼냈다. 몇몇 친구들이 의기투합했다. 등사기와 줄판을 구했다. 새벽 4시까지 선언문 300부를 밀었다.

16일 오전 9시40분쯤 부산대 인문사회관 306호. 화폐금융론 강의를 앞둔 시간이었다. 정씨는 70명의 학생들에게 선언문을 돌렸다. “드디어 때가 왔다. 나가서 피 흘려 투쟁하자”고 외쳤다. “학우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엄청 노심초사했어요. 근데 40~50명이 따라나서더라고요. ‘유신철폐, 독재타도’ 구호를 외치고 ‘우리의 소원은 민주’라고 노래하면서 도서관 앞까지 갔습니다. 사람이 계속 불어났죠. 그곳에서 선언문을 낭독했고 본격적인 시위가 시작됐습니다.”

“청년학도여, 지금 너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고도성장정책의 추진으로 빚어진 부조리, 그 중에서도 재벌그룹에 대한 특혜금융이 기업주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으며 특수 권력층과 결탁하여 막대한 독점이윤을 거두어 서민대중의 가계를 핍박케 했다. 터무니없이 낮은 생계비 미달의 저임금을 지불하고서도 그것이 과연 전체 국민의 후생을 증대시켰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극심한 소득분배의 불균형 때문에 야기된 사회적 부조리를 상기해보라! 소위 유신헌법을 보라! 그것은 국민을 위한 법이라기보다는 한 개인의 무모한 정치욕을 충족시키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다수 선량한 지식인 내지 모든 우국지사에게는 유사시 총이며 칼인 것이다.”

유신정권은 그해 8월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 중이던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을 폭력으로 진압했다. 노동자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정권의 눈엣가시였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의원 제명을 당했다. 정씨는 장발에 점퍼를 즐겨 입고, 가수 송창식의 노래를 즐겨 듣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언더 서클’에 몸담지는 않았지만 시국을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경제학과 학풍의 영향도 있었다고 한다. “제가 유별나서 그런 게 아닙니다. 유신 독재정권 말기에는 이 체제는 안 된다는 시민들의 내면적 의식이 상당히 축적돼 있었어요. 누군가가 나서기만 하면 터져나올 정도로 정세가 무르익을 때였습니다. YH사건, YS 제명을 보면서 아, 진짜 이건 아니지 않나 싶었습니다.”

10·16부마민주항쟁연구소

10·16부마민주항쟁연구소

선언문을 읽고나자 동기들은 “네 역할은 끝났다”며 피신하라고 했다. 한 차례 경찰에 붙잡힐 뻔한 위기를 넘긴 뒤였다. 차비를 모아주고 옷을 바꿔 입자며 스웨터도 벗어줬다. 남은 이들이 시위를 이어갔다. 오전 11시쯤엔 시위대가 5000명까지 불어났다. 이들은 학교를 벗어나 중심가인 남포동으로 향했다.

소식은 빨랐다. 동아대와 고신대 학생들도 모여들었다. 시민들은 박수로 응원을 보냈다. 밤이 되자 노동자, 회사원, 상인 등 다양한 계층의 시민이 합류했다. 규모도 5만명에 달했다. 시위는 다음날에도 계속됐다. 시내의 거의 모든 파출소를 습격했다. 오토바이를 내동댕이치고 불태웠다. 대통령 사진을 떼내 짓밟기도 했다. 침묵하는 언론사에도 돌을 던졌다.

곽동효씨

곽동효씨

18일 오전 0시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시가지와 대학에 계엄군과 탱크가 들어섰다. 당시 26세 가스설비 노동자였던 곽동효씨(66)는 남포동 부산극장 앞에서 봤던 탱크 3대를 기억한다. 퇴근 후 자갈치시장에서 회 한 접시를 먹고난 뒤였다. “울화통이 터졌죠. 안 그래도 유신헌법 만들고 간선제로 바뀌면서 내 손으로 대통령 한 번 못뽑는다는 게 부당하다고 느끼고 있었어요. 16일에 최루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여고생들을 본 터라 더 화가 났죠. 택시기사들도 ‘이번에 잘못하면 학생들 진짜 죽게 생겼다’고 했고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군 지휘관에게 “왜 군인들이 여기 나와 있느냐”고 따져물었다. 곽씨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학생이나 시민들이 뭘 잘못했느냐 이거죠. 유신헌법이 잘못됐기 때문에 민심이 들고 일어난 것이거든요. 군인들 철수하라고 억수로 따졌다고. 근데 ‘명령이라 움직일 수 없다, 시위하는 걸 안 막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큰길까지 나가게 됐죠.”

“우리 이러지 말고 시청으로 갑시다.” 한 중년남성이 외쳤다. 누군가 대형 태극기를 들고나왔다. 시민들은 애국가를 불렀다. 어림잡아 1000명 정도였다. 시청 앞에 도착했을 때 군용트럭 한 대가 섰다. 뒷문이 열리자 총을 멘 군인들이 쏟아져나왔다. 무자비하게 곤봉을 휘둘렀다. 이후 부산의 시위는 잠잠해졌다. 진압을 피해 숨어 있던 곽씨도 집으로 향했다.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40~50명의 전경 무리 앞을 지났다. 순간 전경 대여섯 명이 달려들었다.

“시위할 때 나를 찍었는지 어쨌는지 욕을 하며 뛰어왔어요. 거기서 쓰러지면 죽었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왔던 길을 돌아가는데 뒤따라온 경찰이 머리를 딱 때리더라고. 진짜 별이 반짝하더라고요. 뒤통수가 벌써 터졌어. 뜨끈뜨끈하더라고. 의식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겨우 버스에 탔는데 아줌마들이 손수건을 너덧 개 내줬어요. 피로 다 젖었죠. 까딱하면 잡혀갈까봐 병원에도 못갔어요. 신고 들어갈까봐 약국에서 약도 못샀습니다.”

박홍기씨 / 노도현 기자

박홍기씨 / 노도현 기자

마산으로 번지다
마산에서 자동차보험 대리점을 운영하던 박홍기씨(68)는 부산에 사는 직원에게 시위 소식을 전해들은 터였다. 경남대 학생회장 출신인 박씨는 종종 학생회 사무실에 전화해 시국 이야기를 하곤 했다. 18일 창원에 보험료를 수금하러 간 때였다. 낌새가 이상해 학생회로 전화를 걸었다. “형님, 터졌습니다.”

이날 오후 경남대 학생 1000명이 교내시위를 벌인 뒤 시내로 향했다. 박씨는 택시를 타고 급하게 마산으로 넘어왔다. 보험료를 입금하고 나니 학생들의 함성소리가 들렸다. 번화가인 불종거리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투석전이 벌어지고 최루탄이 터졌다. 저녁부터 시민들이 합류하자 규모가 커졌다. 박씨는 시민들과 함께 오동동다리 근처에 있던 경찰 트럭을 다리 밑으로 밀어버렸다. 시위대는 공화당사를 때려 부쉈다. 시내 곳곳의 파출소를 습격했다. “국민들 손으로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데 자기 혼자 장기간 해먹으려고 하니까 누구라도 인정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유신정권 시작되고 나서는 술집에서 술 한 잔 하다 박정희 욕하면 국가원수모독죄로 잡아갔어요. 그래서 ‘박통’이라 줄여 말했지.”

다음날 오후 다시 시내로 나갔다. 도로를 봉쇄한 경찰에게 술에 취한 시민이 “내 집에 가려는데 왜 안 보내주느냐”고 따졌다. 경찰이 폭력으로 대응하면서 시위가 다시 격렬해졌다. “최루탄을 피해서 도망간 곳에 20명 정도가 모여 있었어요. 한 여성분이 ‘머슴아쟁이들이 같이 싸움해야지’ 이래 된 기라. 맞는 말인데 숫자가 안 된다, 해산하자고 겨우 설득해서 일단 헤어졌죠. 그런데 갑자기 경찰이 잡으러 온 기라. 한 선술집에 뛰들어갔지. 문 열고 들어가니 컴컴해요. 아줌마 내 좀 살려도라 하니 방문을 삐끔 열어요. 자기도 안다 아닙니까. 빨리 들어온나 이래. 이불을 같이 쓰고 있었는데 경찰이 들어왔어요.”

“와예?” 가게 주인이 경찰에게 물었다. 경찰은 젊은 사람이 들어오지 않았냐고 물었다. 이불 속에 있던 박씨의 가슴이 팔딱팔딱 뛰었다. 주인은 “그런 사람 없다”고 했다. “경찰이 이불 속에 누고? 하는 거예요. 아줌마가 내 남편인데 아파서 누워 있다고 둘러댔죠. 그래서 내가 산 기라.”

김효영씨

김효영씨

마산의 거리에는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김효영씨(54)도 있었다. 부산 영도에 살던 그는 두 달 전 친구들과 가출한 상태였다. 마산 중성동의 중국집에서 배달일을 했다. 18일 초저녁쯤 배달 다녀오는 길에 시위대를 만났다. 호기심에 자전거와 배달통을 놓고 졸졸 따라다녔다. “처음엔 대학생들 형님들이 시작했는데 시민들이 합체되고, 어두워지면서 돌멩이도 던지고 시위가 과격해졌어요. 집에 갈 때가 됐다 생각했을 쯤에 우당탕탕 소리가 나서 뒤로 도망가는데 다 포위됐더라고. 사람 잡히고 집어던지고 곤봉 같은 걸로 내리찍고…. 닭장차(경찰버스)에 끌려갔는데 모든 사람들을 두들겨 패더라고요. 나도 맞아서 머리가 한 뼘 정도 찢어졌어요.”

10평짜리 유치장에 200여명이 갇혔다. 경찰은 김씨에게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른 혐의를 씌웠다. 호기심에 따라다녔다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집이 부산인데 여긴 뭐하러 왔노.” 오히려 김씨를 ‘원정시위대’로 몰아갔다.

“이래 수갑 채우고 손발 거꾸로 달아서 두들겨 패고 고춧가루 물을 들이붓는 거라. 한 두세 시간 맞으면 장사가 있습니까. 했다 하죠. 돌아와 녹초가 돼 있으면 다음날 밤 또 불러내요. 안 했다 하면 또 두들겨 맞고. 나중에는 도라이바를 가지고 와서 내가 그걸 가지고 누굴 찔렀다고 하더라고요. 일생에 맞을 건 그때 다 맞은 것 같아요.”

기억해야 하는 이유

항쟁의 단초가 된 정광민씨는 이틀간 경남 고성의 친구집에 피신해 있었다. 18일 계엄령이 떨어졌다는 소식에 부산으로 향했다. 며칠간 친구집을 전전했다. 계속 신세를 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평소에 믿고 따르던 교수를 찾아갔다. 하지만 교수는 “니가 벌인 거니까 사나이답게 책임지라”며 학생처에 연락했다. 정씨는 경찰에 인계됐다.

모진 고문이 시작됐다. 경찰은 배후관계를 캐내는 데 집중했다. 북한과의 연계점을 찾으려 애썼다. 정씨는 재야인사들과도 교류가 없었다. “느그 아버지 고정간첩이제?” 경찰이 겨우 끄집어낸 건 아버지가 피난민이라는 것이었다. “기절초풍할 것 같았어요. 책에서만 보던 일이 나한테 닥치는구나, 너무 놀랐죠. 다른 사람들은 고문하면 힘들어서 거짓자백도 했다는데 그건 못하겠더라고. 거꾸로 매달아 놓고 수건으로 코랑 입을 막아요. 그리고 물을 붓지. 무지막지한 독재체제였다는 걸 온몸으로 겪었습니다.”

항쟁이 시작된 지 10일 뒤인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부마항쟁을 수습하는 방식을 놓고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부장이 심하게 다툰 것이 발단이었다. 정씨는 그해 12월 8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면서 석방됐다. 김효영씨도 이쯤 풀려났다.

김재규는 10·26사태 이후 재판에서 이렇게 말했다.

1979년 부산의 시위대 행렬 /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1979년 부산의 시위대 행렬 /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제가 내려가기 전까지는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이나 학생이 주축이 된 데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지에서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160명을 연행했는데 16명이 학생이고 나머지는 다 일반시민입니다. 양상을 보니까 데모하는 사람들도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주먹밥을 주고 또 사이다나 콜라를 갖다 주고 경찰에 밀리면 자기 집에 숨겨 주고 하는 것이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들이 완전히 의기투합한 상태입니다. 주로 그 사람들의 구호를 보니까 체제에 대한 반대, 조세에 대한 저항, 정부에 대한 불신 이런 것이 작용해서, 경찰서 11개를 불질러 버리고, 경찰차량을 10여대 파괴하고 불지르고, 이런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부마항쟁은 좀처럼 조명받지 못했다.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이 너무나 컸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지역정치가 보수화의 길을 걸었다. 정씨는 “부마가 잊힌 항쟁이 된 상황에서 이제라도 국가기념일이 돼 기쁘다”며 “4·19혁명,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에서 6월항쟁으로 가는 한국 민주화의 진전에서 부마가 정확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효영씨에게 부마항쟁은 잊고 싶은 기억이다. 항쟁에 연관된 그를 받아주는 학교가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면 며칠 뒤 이유없이 잘렸다. 10년 가까이 방황했다고 한다. 아픈 기억을 증언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나뿐만 아니라 부마로 고통받는 다른 이들 때문이죠. TV에 광주가 나오는 걸 보면서 부마 생각이 나서 끄라고 하고 싶다가도, 저기는 저리되는데 부마는 뭐 하나 없네 생각했습니다. 저도 올해서야 진상규명위원회 연락을 받고 관련자로 인정받았어요. 많은 이들에 대한 진실이 규명돼야 한다고 봅니다.”

박홍기씨는 “항쟁 참가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직도 나보고 빨갱이라 하는 친구들 많아요. 그러면 친구들 보고 ‘박근혜가 어떻니, 전두환이 어떻니 말할 수 있는 시대에 사는 것만 해도 고맙다고 생각하라’고 하죠. 지금 세상이 안 그렇습니까. 조금 싫어하는 사람 있으면 점마는 이런 게 있다고 매도를 해버리거든. 그래서 진실을 밝히기를 꺼려하는 기라. 항쟁이 재조명돼야 피해자들도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부산·마산·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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