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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로 인정 못받는 헤어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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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으로 ‘특수형태 근로종사자’로 근로기준법 적용에서 제외

지난 4월 1일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특수고용노동자 2019 투쟁선포 기자회견 및 4·13 총궐기 실천단 발족식’이 열리고 있다. 김정근 기자

지난 4월 1일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특수고용노동자 2019 투쟁선포 기자회견 및 4·13 총궐기 실천단 발족식’이 열리고 있다. 김정근 기자

미용실 스태프들은 ‘헤어디자이너가 되어야 한다’는 목표 하나로 ‘도제식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이뤄지는 온갖 불법을 견딘다. 하지만 이들이 디자이너가 된다고 해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헤어디자이너는 근로자의 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특수형태 근로종사자’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근로자처럼 일하지만 법적으로는 자영업자로 분류돼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못한다.

헤어디자이너 김모씨(38)는 어렸을 때부터 손재주가 좋았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미용학원에도 등록해 수강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용실에서 스태프로 일하기 위해서였다. 첫 시작은 수도권 대형 미용실의 스태프였다. 운이 좋았던 걸까. 같이 일했던 디자이너 선배는 친화력 좋고 싹싹한 김씨를 아꼈다. 이듬해 선배는 서울의 유명 체인 미용실로 옮겨 가면서 김씨를 데려갔다.

퇴직해도 실업수당 못받아
유명 체인 미용실에서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김씨의 가슴이 부풀었다. 그는 “근로계약서 같은 건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최저임금 이하의 월급을 받았지만 그러려니 했다. 원장이나 디자이너 선배들에게 내야 하는 교육비를 제외하고 받는 돈이었기 때문이다. 미용실에는 김씨와 같은 스태프들이 몇 있었다. 이들은 서로의 머리를 만지며 기술을 닦았다.

그는 또래들보다 빨리 디자이너 직함을 달았다. 원장은 김씨에게 디자이너는 근로계약서를 따로 쓰지 않는다고 했다. 출퇴근시간은 맞춰야 하지만 손님이 없는 시간은 알아서 보내라고 했다. 그리고 월급은 얼마나 많은 손님을 응대하느냐, 또 어떤 작업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소위 ‘케이스 바이 케이스’였다. 첫 달 월급은 그가 스태프로 일할 때보다 적었다.

처음에는 아주 간단한 커트만 그에게 주어졌다. 어떻게든 자신의 손님을 만들어야 했다. 영양제 등을 사비로 구입해 손님들에게 ‘서비스’로 제공했고 두피 마사지 기술도 배웠다. 보통 디자이너들은 ‘샴푸’로 불리는 작업을 하지 않지만 김씨는 모든 과정을 자신이 했다. 그렇게 자신의 고객을 하나하나 확보했고 얼마 뒤 서울 중심가에 있는 대형 체인 미용실로 옮겼다.

하지만 그의 생활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연차가 쌓여도 월급은 들쭉날쭉했다. 보통 직장인들이 연차수당이라는 걸 받는다는 사실도 한참 뒤에야 알았다. “저는 실업급여가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알아보니까 헤어디자이너는 노동자가 아니어서 미용실에서 잘려도 그런 게 없더라고요.” 김씨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김씨가 언급한 퇴직금, 연차수당, 실업급여 등은 모두 근로기준법에 근거해 지급되는 돈이다. 따라서 이 급여와 수당의 적용을 받기 위해서는 근로기준법이 정하는 노동자여야 한다.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되려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근로를 제공하는 자’여야 하고,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종속노동관계’ 여부다. 근로기준법은 헤어디자이너는 미용실과 종속관계가 아니라고 본다. 원장의 지시가 아니라 디자이너들이 ‘알아서’ 손님을 받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헤어디자이너만이 아니다. 화물트럭 기사, 택배 기사, 보험설계사, 학습지 교사, 방과후 교사, 간병인 등 업종과 하는 일은 다르지만 모두 김씨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들이다. 법은 이런 이들을 특수형태 근로종사자, 이른바 ‘특고’라고 부른다. 이들은 근로계약서가 아닌 용역, 도급, 개인하청 등의 이름으로 된 계약을 사용자 쪽과 맺고 일을 한다.

노동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법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이다. 노조법상 노동자는 ‘임금·급료 기타 이에 준하는 수입에 의하여 생활하는 자’로 근로기준법상 노동자 요건보다 넓게 해석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특고 노동자’ 중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보험설계사들은 2000년부터 노동조합 설립을 시도했으나 여전히 노조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전체 취업자의 10%가 특고 노동자
이에 대해 국제노동기구(ILO)는 이미 수차례 한국 정부를 상대로 특고 노동자들의 노조할 권리를 제한 없이 인정하라고 권고했다. ILO 협약 원리는 ‘결사의 자유 원칙에 의해 군인과 경찰을 제외한 모든 노동자는 스스로 단체를 설립하고 그런 단체에 가입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 권리의 적용 대상을 정하는 기준은 고용관계 존재 여부에 기초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특고 노동자는 얼마나 될까. 2019년 3월 고용노동부와 한국노동연구원의 공동조사에 따르면 2018년 말 기준으로 특고 노동자는 220만9343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임금근로자와 자영업자를 포함한 전체 취업자 2709만명(2018년 10월 기준)의 8.2%에 해당하는 규모다. 노동계는 이보다 더 높은 10%가량을 특고 노동자로 추산한다.

구체적으로 보면 220만9343명 중 약 166만명은 보험설계사, 학습지 교사, 택배기사, 간병인 등 이미 익숙한 특고 직종이다. 헤어디자이너 역시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나머지 55만명은 산업의 변화로 새롭게 생겨난 특고 노동자들이다. 방과후 강사, 퀵서비스 기사, 온라인 앱을 통한 가사도우미, 대리운전 기사 등 ‘플랫폼 노동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문제는 이런 특고 노동자가 앞으로 더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업무를 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임금으로 받는 ‘전통적인 일자리’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의 발달로 이제 노동자들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일을 한다. 더 늦기 전에 이들에 대한 법적 보호망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해당 조사를 담당한 정흥준 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이미 다수의 연구들은 특고 종사자들에 대해 ‘위장된 자영업자’로 언급하며 실질적으로 노동자에 가까워 법적 보호를 강화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며 “특고 종사자들도 임금노동자에 준하는 법적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특고 노동자들의 고용산재보험을 의무화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김씨는 몇 년 전에서야 자신을 포함한 이 같은 직종이 ‘특고’라고 불리는 걸 알았다. 그는 “손님 없는 시간에는 알아서 할 일을 하라고 하는데 그 시간에 미용실 밖을 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쉬는 날에도 원장이 나오라고 하면 나와야 한다”며 “생고생을 해서 디자이너가 됐는데 디자이너들의 처지가 이런 줄 알았으면 아예 다른 길을 갔을 것이다. 대통령이 공약을 꼭 이행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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