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탈북자의 파란만장한 <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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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북한 탈출 중국 거쳐 한국행… 자신이 겪은 기구한 삶 책으로 펴내

황선희씨(가명)가 지난 10월 1일 한 교회 예배당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다. 김창길 기자

황선희씨(가명)가 지난 10월 1일 한 교회 예배당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다. 김창길 기자

그의 삶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북한 교화소(우리나라의 ‘교도소’에 해당)에서 온갖 병을 짊어지고 돌아온 아버지와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을 먹여살리기 위해 그는 1998년 중국 국경을 넘었다. 그리고 한 중국인 가정집에 팔려 강제결혼을 했다.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좌절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중국 공안에 잡혀 북송될 위기에 처했다. 그의 시부모는 집안의 모든 재산을 끌어모으고, 주변에 빚을 져 그를 감옥에서 빼냈다. 비록 돈을 주고 그를 산 사람들이었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은인이 됐다. 적어도 북송돼 정치범수용소에 갇히고, 남아있던 가족이 처벌받을 위험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5년만 죽어라 일해서 이 돈을 갚고 집을 나가자.’ 그는 다짐했다. 그리고 아이를 갖기로 했다. 노예처럼 결혼생활을 이어온 지 5년 만에 그에게 예쁜 딸 은희(가명)가 찾아왔다. 빚은 이자에 이자를 낳았다. 5년이면 청산할 줄 알았던 빚은 점점 불어났다. 그는 1년 365일 밤낮없이 일했다. 밤 11~12시까지 일하고 집에 들어와 쓰러져 잠들었다가 눈뜨면 세수만 하고 출근하는 일상을 반복했다. 빚은 13년 만에 한푼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으로 향했다. 탈북자 황선희씨(가명·45)는 “삶이 참 가혹했다”고 말했다.

엘리트 집안에 찾아온 불행
그는 소위 말하는 ‘엘리트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할아버지는 한의사였고, 할머니도 의사였다. 그의 어머니 역시 의사로 일하며 마을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기자 또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의 꿈을 이루는 데 장애는 없었다.

불행은 그러나 한꺼번에 찾아왔다. 당에서 갑자기 ‘평양에는 불구자가 없어야 한다’며 장애인 가정을 모두 평양 밖으로 내보냈다. 그의 가족도 쫓겨났다. 태어날 때부터 뇌전증을 앓아온 고모 때문이었다. 하루새 평안북도로 이사했다. 충격을 받은 그의 할머니가 쓰러지고, 어머니는 간호를 위해 병원을 그만둬야만 했다. 그의 아버지마저 설상가상으로 교통사고를 냈다. 아버지는 8년형을 선고받고 교화소에 갇혔다. 남편이 교화소에 갇히면 부인이 정상적인 직업활동을 할 수 없다. 몸이 약했던 그의 어머니는 탐사대(땅속 광물을 찾는 일을 하는 곳) 건설중대에서 남자들과 함께 벽돌을 찍고, 지게로 나르고, 집을 짓는 일을 했다. 어머니의 몸은 급속도로 약해졌다. 아버지가 모범수로 2년 8개월 만에 출소했지만 아버지에게 생계를 맡길 수도 없었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1994년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선희씨는 고난의 행군이 이어진 그 4년을 “지옥과도 같았다”고 했다. 사람이 쉴새없이 죽어나갔다. 먹을 것을 구하러 떠난 사람들이 죽어서 돌아왔다. 예뻤던 동무가 꽃거지가 돼 있었다. 그의 집도 무너져갔다. 어머니는 47세가 되던 해 결국 눈을 감았다. 아픈 아버지와 여동생이 그의 몫으로 남았다. 선희씨는 작가가 될 수 없었다. 대신 지리 탐사대에 들어가 지도를 그렸다. 그 일이 돈이 될 리가 없었다. 아픈 아버지를 위한 수입 의약품은 너무 비쌌다. 한 번에 사나흘씩 집을 비워 먹을 것을 구하고, 아버지의 약을 구했다. 동생은 떡과 빵을 만들어 팔았다.

항상 돈이 부족했다. 사나흘씩 신의주 등지로 나가 벌어들인 돈으로는 약값과 생활비를 모두 감당할 수 없었다. 1998년 2월, 그는 중국으로 가서 돈을 벌어오기로 결심했다. 아픈 아버지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동생에게 “아버지를 잘 모시고 있어라. 신의주에서 한 달만 일해서 돈 많이 벌어서 오겠다”고 했다.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간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동생은 “언니 빨리 와야 돼. 돈 못벌어와도 좋으니까 빨리 와야 돼”라고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한 달이면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어느새 21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동생을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울었다. “화물차 타러 가는 길에 동생한테 떡이라도 사서 먹이고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여비가 여의치 않아 고구마만 사다 먹인 게 한이 된다”고 했다. 그는 지금 동생을 만나도 “미안해”라는 말밖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압록강을 넘어 중국땅을 밟은 그는 중국인들에게 손발을 써가며 “일을 달라”고 했다. 중국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그 사이 한 중국인이 그를 자신의 친척집에 팔아넘겼다. 그의 몸값은 4000위안(약 70만원)이었다. 인신매매 전문 브로커에게 잡히지 않은 것을 불행 중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그가 팔려간 집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이었다. 남편은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다. 시어머니는 눈이 멀어가고 있었다. 그는 소처럼 일했다. 밤낮없이 일하고 또 일했다. 일을 아무리 해도 돈은 모이지 않았다.

황선희씨가 써낸 책 <19년> 표지. 지식인 하우스

황선희씨가 써낸 책 <19년> 표지. 지식인 하우스

신분증이 없으니 당연히 정상적인 직장을 구할 수도 없었다. 일을 하면서도 북한사람이라는 이유로 언제든 공안에 잡혀갈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비닐하우스용 비닐 제작공장에서 일하고, 사과 분류작업을 했다. 석탄을 캐서 다듬고, 밭에서 김을 맸다. 당시 중국은 재건축 붐이 일어 벽돌이 귀했다. 허물어놓은 집에서 멀쩡한 벽돌을 찾아 다듬어 팔고, 실어나르는 일도 했다. 노예처럼 일을 했지만 아이는 낳지 않았다. 남편과의 부부관계는 그의 입을 빌리면 ‘강간’이었다. 일부러 임신이 되지 않게 했다. 한 차례 임신을 했지만 고된 노동 때문에 뱃속의 아이를 잃었다.

수없이 도망쳤지만 도망갈 수 없었다. 그가 잡혀들어간 마을은 삼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마을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산과 산 사이에 한 줄로 길게 난 길을 따라가야 했다. 나가는 길도 그 길이 유일했다. 도망쳐도 금방 잡혔다. 잡혀오면 두들겨 맞았다. 산으로도 도망쳐 봤다. 하지만 그가 쉽게 넘을 수 있는 산이 아니었다. 사흘간 산길을 헤매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는 그곳에서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그 마저도 실패했다. 그는 중국에서 6번의 자살 시도를 했다.

중국인 시댁에 빚 갚느라 소처럼 일해
어느 날 중국 공안국에서 탈북여성들을 죄다 잡아갔다. 황씨도 끌려갔다. 교도소 안에서 단식을 하며 풀어달라고 사정했다. 이대로 북송되면 그도, 그의 북한 가족들도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 그의 시부모가 전재산을 털고, 빚을 져서 1만4000위안(약 236만원)을 만들어 그를 감옥에서 꺼냈다. 그 돈은 곧 그가 앞으로 갚아야 할 돈이기도 했다. 그제서야 그는 탈출을 포기했다. 아이를 갖고 정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포자기였든, 스스로의 선택이었든 그는 강제결혼을 한 지 5년 만에 딸 은희를 낳았다.

은희는 그가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됐다. 탈북자가 운영하는 식당일을 하며 밤낮없이 돈을 벌었다. 5년 만에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던 1만4000위안을 다 갚는데는 꼬박 13년이 걸렸다. 선희씨는 “아무리 갚아보려 해도 원금에 리에리(이자)가 붙고 리에리가 붙었다”고 했다.

조금 살 만해졌다 싶었을 때 불행은 또다시 그를 흔들었다.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가 부러졌다. 가해자는 무일푼이었다. 차는 폐차 직전의 차였다. 두 차례에 걸친 남편 수술비와 치료비가 고스란히 그의 부담으로 돌아왔다. 빚을 갚고 모아뒀던 돈을 모두 병원비에 쏟고도 돈이 모자랐다. 이리저리 돈을 꿨다. 남편 몫까지 돈을 벌어야 했다. 아이를 키우고, 빚을 갚고, 간병을 했다. 그의 2년이 그렇게 또 흘러갔다.

그와 함께 식당일을 하다 갑자기 사라진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인 역시 탈북민이었다. 그는 지금 한국이라고 했다. “한국에 들어올 생각이 있느냐”고 했다. 그는 “왜 이제야 전화를 주느냐”고 원망 섞인 화를 냈다. 그때 한국행이라는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탈출을 도와줄 선교사와 연락이 닿았다. 선교사는 “지금부터 이틀 뒤에 바로 떠나라”고 했다. 주변을 정리하고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그의 말에 선교사는 “준비하려다 보면 못떠난다. 당장 칭다오까지 갈 버스비만 마련해서 이틀 뒤 떠나라”고 했다. 죽을 수도 있는 탈출길에 아이를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출발 당일 그는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은희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작별인사를 했다. “학교 잘 다녀와.” “엄마 안녕.”

그의 목숨을 건 28일간의 탈북일정이 시작됐다. 몇 차례의 위기를 겪으면서 중국 국경을 넘어 계속 이동했다. 태국에 도착해 경찰에 붙잡힌 그는 수용소 생활을 하던 중 한국대사관의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잘 오셨습니다”라는 한국말이 들렸다. 그는 그 말이 가장 따뜻했다고 떠올렸다.

황선희씨(가명)의 모습. 신변보호를 위해 얼굴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김창길 기자

황선희씨(가명)의 모습. 신변보호를 위해 얼굴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김창길 기자

중국에 있던 딸 데려와 새로운 꿈
대한민국 사회는 그러나 북한과 달랐다. 중국과도 달랐다. 무작정 열심히 한다고 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직장을 구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경력을 요구했다. 그에게 그런 경력이 있을 리 없었다. “시켜만 주시면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다”고 해도 선뜻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자격증 공부를 하고, 처음부터 배워나갔다. 그의 손을 잡아준 곳은 한 사회적 기업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운영하는 매장 내 판매일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말투를 듣고 출신지역을 묻는 손님들께 “평양에서 왔습니다”라고 거리낌없이 말한다. 그는 말의 이음과 이음 사이에 “고조~”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사용했다.

그는 47세까지 사는 것이 꿈이었다. 도망칠 수도 없고 삶의 의미도 없는 중국땅에서 그가 가진 유일한 바람이었다. 나무지게를 짊어지고 다닌 후유증으로 무릎 연골이 닳아버렸다. 걸을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한 번 찾아온 두통은 잦아들지 않았다. 머리를 벽에 수없이 박아댔다. 성한 곳이 없었다. 온몸이 죽어간다는 것을 그 스스로 느꼈다.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나이, 그리고 은희가 어느 정도 제 앞가림을 할 나이가 될 47세까지만 살다 죽는 게 그의 소원이었다.

한국에서 보낸 지난 2년 사이 그는 자신의 목표를 60세로 늘렸다. 머리를 부수는 듯한 두통도 여전히 찾아오고, 한때 위출혈로 응급실을 찾기도 했지만 그는 “더 살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의 딸도 한국으로 왔다. 이곳에서 학교도 다닌다. “중국에서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지 않던 아이가 이곳에서는 ‘무엇이 되고 싶다’는 말을 처음 했다”고 말했다. 그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그의 마지막 바람은 북한에 두고 온 동생을 찾는 일이다. 브로커는 북한으로 들어가 동생을 찾아내 전화 한 통 하는 데 1000만원이 든다고 했다. 그에게 그만한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선희씨는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써서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 책의 제목은 <19년>이다. 그는 자신의 책이 많이 알려지길 바랐다. 그래서 아직 찾지 못한 남한의 사촌과 미국의 친척이 자신을 찾아주길 바랐다. 미국의 친척을 통해 아버지의 생사라도, 여동생의 생사라도 알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의 딸이 언젠가 이 책을 읽어주길 바란다. 이야기는 딸에게 건네는 편지 형식으로 시작한다. “딸아, 오늘도 너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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