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게 없어요’ 세상구경하기 좋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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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동 가구골목은 업소용 가구 전문 골목이다.

황학동 가구골목은 업소용 가구 전문 골목이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을 나오면 중앙시장이 있다. 중앙시장을 중심으로 골목길이 개미굴같이 퍼져 있고 각각의 골목과 구역마다 장거리가 펼쳐져 있는데, 가구골목도 그 중 하나다. 새 가구를 만들고, 고쳐 재생하고, 중고가구를 모아 파는 곳이 황학동 가구골목이다. 골목을 따라서 전시장이 있고 더 깊이 들어가면 만들고 고치는 공장들이 있다. 몇몇 새로 지은 건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낡고 오래된 모습이다.

서울에는 가구를 파는 거리가 이곳 말고도 두어 곳 더 있다. 아현동 가구골목은 침대나 옷장 등 살림가구를 주로 다루고 있고, 사당동 가구거리는 사무용 가구를 전문으로 취급한다. 황학동을 기웃거리는 이들은 대부분 업소 주인들이다. 의자를 둘러보던 손님에게 상인은 대뜸 “업종이 뭐냐?”고 묻는다. 상품과 가격대가 업소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원목 느낌의 고전적인 분위기 주점이다”라는 말에 주인이 보여준 것은 기본형 나무의자. 손님은 자신이 적어온 노트와 비교해서 이리저리 살피다가 ‘철제 의자’는 어떠냐고 묻는다. “가격대가 조금 더 올라간다”는 말에 손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그 손님은 다음 골목 가게에서 같은 대화를 그대로 반복했다.

업소 주인이나 인테리어 업자가 주고객
이 골목에서 일한 지 20년차라는 가게 주인은 “여기 오는 손님들은 한 번에 물건을 고르고 구입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 동네에 공장까지 가구가게가 100곳이 넘는데 거의 다 둘러보고 따지고 비교해서 사간다. 개인은 거의 없고 업소 주인이나 인테리어 업자들이 주고객”이라고 했다. 자신은 남의 집에서 일하다가 가게를 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경기가 없어 죽을 맛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대부분의 가게들은 중고와 새 제품을 함께 팔고 있다. 개업하는 이에게 물건 팔고, 폐업하면 그 상품들을 도로 인수해 중고로 팔거나 폐품 처리업자들이 사들여서 이곳에 다시 내놓는 식으로 순환이 이뤄진다. 골목 한편에서는 새 의자들을 실어 가고 있고, 또 다른 쪽에서는 실어 온 중고가구들을 내리고 있었다. 돈도 가구도 험난한 사바세계를 뱅뱅 맴돌고 있다. 뭘 구하느냐고 묻던 업자는 “경기가 좋아서 개업 업소가 늘면 매상이 늘고, 경기가 나빠 가게 문 닫으면 또 그런대로 헐값에 물건 잡아서 유지한다. 좋아도 나빠도 굴러가는 것이 이 바닥이다”라고 설명했다.

가게 앞에 진열된 중고의자들엔 숫자가 써 있다. 4개, 10개 등 재고 수량이 함께 표시된 것이다. 중고품은 생산시기도 공장도 다 달라 같은 물건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그저 남은 물건 중에 적당하면 개수에 맞춰 사간다는 것이 업자의 말이다. 대부분 팔려갔다가 여러 해 동안 제 몫을 하고 다시 물러난 물건들이라 꼼꼼히 살펴야 좋은 물건을 고를 수 있다. 아주 폐물급이 된 물건들은 뒷골목 재생공장으로 가서 솜을 갈고 칠을 다시 해서 ‘중고 신품’으로 탈바꿈한다. 상인들에게 가격대를 묻자 “제각기 다 사연이 달라서 한마디로 값을 매기기란 쉽지 않다. 어떤 중고는 새 것보다 비싼 물건도 있다”고 귀띔한다. 새 제품도 대량 수입된 중국산은 싸다고 했다. “나무로 만든 식탁의자가 2만5000원부터 시작된다”며 이보다 쌀 수는 없다는데, 단 AS도, 반품도, 환불도 없는 조건이란다. 의자의 생명은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데 싸면 흔들리고, 흔들리면 부서진단다. 가격은 보장하지만 품질은 보장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업소용 가구들은 한 번에 팔리는 수량과 액수가 크다.

업소용 가구들은 한 번에 팔리는 수량과 액수가 크다.

식당 등의 개업집이 이 골목의 주된 손님들이라 한꺼번에 팔리는 수량도 적지 않다. 테이블 10개인 가게라면 기본 테이블 수에 의자 40개, 게다가 카운터와 주방 가구까지 더하고 신발장 등 기타 부속까지 더하면 단위가 커진다. 아무 손님이나 하나만 잡으면 매출이 만만찮게 발생한다. 단골손님도 있느냐는 질문에 “여기는 인테리어 업자 빼고는 단골이 없다. 단골이 있으면 이상하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다 둘러보라고 권하기는 하지만 딱히 악착스레 잡지는 않았다. 이 골목의 특성상 한두 집만 둘러보고 물건을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사는 이의 입장에서는 한푼이라도 아끼려 하고, 파는 자는 하나라도 더 보태려는 것이 인지상정. 많이 팔면 많이 남겠다는 질문에 “여기는 마진 없이 파는 곳이다. 100원도 따져가면서 둘러보기 때문에 거의 안 남기고 판다. 대신 양이 많아 한 달 단위로 결산해서 수익을 계산한다”고 한다. 공장을 끼고 있어서 단가를 낮추려면 나사 하나에서라도 값을 내릴 수 있다고 설명한다.

사고팔고 살아가는 실핏줄 생태계
매장이 있는 골목에서 옆으로 난 샛골목들 사이에서는 가구공장들이 열심히 테이블이며 주방가구를 만들고 있다. 매장들도 카운터 전문, 테이블 전문, 인테리어 소품 전문으로 세분되어 있듯이 공장도 만드는 물건들이 다 달랐다. 어떤 곳에서는 용접으로 철제 다리를 만들고 그 옆에서는 스펀지를 잘라 소파 쿠션을 만들고 있다. 이런 공장들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싸고 빠르게 제품들을 만들어낸다. 공장 주인은 “여기는 디자인보다 가격과 실용성이 무기다. 의자 하나라도 업소에서는 우선 튼튼해야 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신설동 원단상가와 왕십리 목재상들이 주변에 있어 물건을 만드는 일이 유기적으로 돌아간다고 이야기한다.

골목 안 리폼공장들이 유난히 바삐 돌아가고 있다. 헌 소파들을 뜯고 스펀지를 채우고 새 천을 덧씌우면 감쪽같은 새것이 된다. “요즘은 저렴하게 재활용하는 이들이 많다. 문 닫는 곳도 많고 자본 부족한 이들이 인수해서 리모델링하는 일이 많아졌다”는 것이 요즘 일감이 는 이유라고 이야기했다.

업소용 가구뿐 아니라 설비용품도 함께 구할 수 있다.

업소용 가구뿐 아니라 설비용품도 함께 구할 수 있다.

이 인근의 골목들은 모두 중앙시장을 향하고 있다. 신당역에서 마장로에 이르는 큰길에 중앙시장이 자리잡아 일대 상권의 대동맥을 이루고 바둑판 모양으로 뻗은 샛골목들은 실핏줄처럼 사고팔고 살아가는 생태계를 이루었다. 가구골목 외에도 주방용기기골목, 그릇골목, 부자재골목이 군데군데 무더기를 형성하고 있고, 시장으로 통하는 골목마다 야채골목, 돼지골목, 순대골목, 생선골목, 안주골목 등이 부챗살을 펼친다. 김밥공장에서는 전자동 기계가 야채와 밥을 버무려 김밥을 말고, 떡볶이용 밀떡이 줄줄이 나오고, 순대기계가 따끈따끈한 순대를 뽑아낸다. 서울 강북 강남의 많은 포장마차 주점들의 안줏거리가 골목 안 공장에서 만들어져 밤거리 취객들의 씹을 거리가 된다. 한낮에 장을 보러 온 손님들은 골목 안 콜라텍에서 짬을 내 지루박과 차차차 스텝으로 고해 속의 단맛을 즐긴다. 이 모든 것이 중앙시장 주변의 풍경이다.

중앙시장 안주골목들도 쇠락의 분위기가 역력했다. 중앙시장은 번창하던 옛 모습은 재로 남았고, 등 굽은 상인들이 먼지 앉은 물건들로 손님을 기다리거나 싸구려 중국산 생필품을 내놓고 졸고 있었다. 지나갈 틈 없이 북적이던 매대도 상당수는 치워져 걷기에 무리가 없다. 신당지하상가는 진작부터 텅 빈 폐허로 다가가고 있어서, 오래전 신당창작아케이드라는 요상한 이름을 달고 젊은 디자이너와 예술가를 끌어들였지만 역시 활기 없이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우리가 만났던 한 시대의 번영이 기울어져 스러지는 모습만 남아있다.

골목 안 좁은 샛골목엔 지난 시절의 모습이 남아있다.

골목 안 좁은 샛골목엔 지난 시절의 모습이 남아있다.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가구골목 대부분은 시장에 잇댄 양곡상들과 흑염소와 개고기 고깃간, 그리고 붉은 등의 야릇한 술집이 있던 곳이다. 가구점이라고는 헌 문짝이며 창틀 같은 중고 건축자재, 그리고 목재상들이 간간이 있었다. 언제부터 가구점들이 들어섰냐는 물음에 상인은 “이제는 저런 양곡상들이 잘 안 된다. 몇 집 남지 않고 다 나갔고, 술집들이 없어진 지도 오래됐다. 요새 누가 니나노 대폿집에서 술 마시나? 시대가 바뀐 탓이다”라고 했다. 아마도 1990년대 후반부터 건축자재 취급상들이 주방가구도 취급하면서 가구상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아 지금처럼 됐다는 이야기다.

가구점 사이사이에 박힌 샛골목을 들어가 보면 멀쩡한 겉모습과는 또 다른 풍광이 펼쳐졌다. 사람 하나 겨우 걸어갈 골목길에 여인숙이며 쪽방이 숨어 있다. ‘달셋방 있음’이라고 휘갈겨 쓴 종이가 오래전 홍등가가 있던 시절의 사연을 보여주고 있고, 여인숙 열린 문 사이로 낮고 어둡고 축축한 쪽방들이 이 도시의 낡고 힘겨운 삶을 이야기한다. 해질녘 샛골목에 기대섰던 어제의 ‘영자’는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가구업체들은 신품과 중고를 함께 취급한다.

가구업체들은 신품과 중고를 함께 취급한다.

중앙시장·황학동, 재개발 소식 없어
가구골목이 흑염소와 토끼고기 등 보신용 고기를 팔던 곳이었다는 정황은 이젠 한 곳만 남은 개고깃집에서 엿볼 수 있다. ‘전주산 토종개’ 표지판이 걸린 걸로 봐선 개고기꾼들에게 뭔가 유명한 어떤 것이 있나보다. 가끔 신문 가십란엔 이 동네 염소집에서 흰염소에 염색을 해서 흑염소로 팔아먹었다는 기사도 실렸었다. 산 채로 우리 안에서 지나가던 술집여인과 취객과 장꾼들을 슬프게 바라보던 짐승의 눈빛이 더 이상 이 골목에 없다는 것만 해도 안도가 된다.

가구골목을 두고 서쪽편은 재개발이 이루어져서 대형 오피스텔과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섰다. 골목의 대부분 집들이 단층이거나 겨우 2층인 반면 거대한 빌딩이 동쪽마을 전체를 낮춰보고 있다. 중앙시장과 황학동을 둘러싸고 동서남북으로 대형 재개발사업들이 이뤄졌거나 진행 중이다. 위태롭긴 하지만 인근 부동산에 물어보니 아직 이 지역 재개발 소식은 없단다.

재개발의 여파로 골목 안 놀이터와 어린이집엔 아이들이 붐빈다. 요즘 골목의 모습으로 보기 드물게 놀이터에서 웃고 떠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 옆으로 생존에 바쁜 어른들이 무심하게 지나치고 있지만, 놀이터의 소란은 건강하고 즐겁다. 골목에 어둠이 내리면 아이들은 돌아가고 가구가게들도 문을 닫는다. 사람들은 더 깊은 골목으로 숨어들어가고, 가구골목은 적막의 시간을 맞게 된다.

황학동 가구골목의 생명은 필요한 물건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다는 점이다. 가구골목 옆에 식기골목이 있고, 그 건너에 냉장고 등 장비시장이 있다. 그 옆으로 업소에서 쓸 옷가지 상가가 있고, 최종적으로 중앙시장에서 식자재를 구할 수 있다. 필요한 물건을 사러 와서 줄을 이어 다른 물건도 보게 되고 여러 상가가 몰려 있으니 상품과 가격도 제대로 비교할 수 있다. 사람이건 상업이건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주고받고 의지해 있는 모습을 가구골목 곳곳과 인근에서 엿볼 수 있다. 천천히 세상 구경하기엔 분주한 골목이지만, 마음먹고 이 세상 살아가는 모습의 주변부를 둘러보기엔 더할 바 없이 좋은 곳이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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