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여성 청소년에게 ‘무상 생리대’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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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소득층 선별 지원에서 보편적 여성인권 문제로 접근” 주장도

서울도서관 안내데스크에는 작고 빨간 금고가 있다. 그 안은 황금색 코인들로 가득하다. 여자화장실에 있는 비상용 생리대 자판기에 코인을 넣고 레버를 돌리면 중형 생리대 하나가 나온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무해하다고 판정한 무향 제품 가운데 판매율이 높은 3사의 제품이라고 한다. 서울시가 공공장소에서 운영하는 무상 생리대 자판기는 170여개. 올해 안에 200개까지 늘린다는 계획이다. 여성 청소년들이 주로 머무는 학교·공공기관을 중심으로 무상 생리대 자판기나 생리대함을 두는 지자체·교육청이 늘고 있다. 생각지 못한 날, 팬티가 피로 물들어 휴지뭉치를 덧댄 기억을 떠올리면 이런 움직임은 반가운 일이다.

김기남 기자

김기남 기자

“청소년 복지와 여성 건강권 보장을 위해 모든 여성 청소년들에게 생리대를 무료로 주자.” 비상용 지급, 저소득층 지원에만 머물지 말고 한 발 더 나아가자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2016년 여성 청소년이 생리대 살 돈이 없어 깔창과 휴지로 대신했다는 일명 ‘깔창 생리대’ 문제가 불거진 지 3년. 생리대는 유해성 논란을 거쳐 보편적 복지의 영역에서 논의되고 있다. 으레 ‘무상’ 정책들이 그랬듯 추진은 순탄치 않다.

생리는 인권의 문제

지난해 말에서야 생리대 광고에서 ‘그날’ 대신 ‘생리’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다. 생리혈이 파란색이 아닌 붉은색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3년간의 생리대 논란을 계기로 누구나 안전하고 건강하게 생리할 수 있는 권리, ‘월경권’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적이고 부끄러운 일로 치부됐던 생리가 공공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모든 여성 청소년에게 생리대를 지원하자는 요구는 생리가 ‘학습권, 건강권, 기본권과 연결된 보편적인 여성인권의 문제’라는 인식에서 나왔다. 이안소영 여성환경연대 사무처장은 “저소득층만 지원하는 선별 복지정책은 아무리 세심하게 계획하더라도 지원을 받는 자체가 주는 수치감과 사회적 낙인을 지울 수 없다는 점은 여전하다. 월경이라는 생물학적 현상은 여성 모두에게 해당하는,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문제이므로 보편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신호탄을 쏜 건 경기도 여주시다. 여주시의회는 지난 4월 전국 최초로 만 11~18세의 모든 여성 청소년에게 생리대를 무상으로 지급하는 조례를 제정했다. 현재 정부와 지자체는 생리대 구입용 바우처를 지원한다. 한 달 1만500원, 1년에 12만6000원. 1년에 두 번씩 6개월치를 한 번에 제공한다. 온·오프라인 가맹점에서 일반 생리대를 비롯해 생리컵, 탐폰 등 선호하는 제품을 살 수 있다. 여주의 모든 여성 청소년으로 지원을 확대하면 대상은 총 3800여명, 5억원이 든다.

“재정자립도 28.7%인 여주시에 맞지 않는 ‘선심성’ 정책.” “여성 청소년들에게 가난을 낙인찍지 말자.” 찬반은 팽팽했다. 조례심사특별위원회에서 의원 6명 중 3명이 반대해 부결됐지만 의장의 지지로 본회의를 통과했다. 여주시는 지역 상황에 맞는 구매처를 확보, 지역화폐와 연계해 내년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서울시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여성환경연대·정의당 서울시당·참교육학부모회 서울지부 등 32개 단체는 지난 5월 ‘서울시 여성 청소년 생리대 보편지급 운동본부’를 발족하고 “모든 여성 청소년들에게 생리대를 보편복지로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여주시보다 훨씬 높은 재정자립도(78.4%)를 가진 서울시가 정책을 추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봤다. 서울시의회 권수정 의원(정의당)과 의원 21명은 지난 7월 관련 조례안을 발의했다.

조례안이 통과되면 지원을 받는 서울의 여성 청소년은 총 32만6500여명. 저소득층 청소년 지원액 21억원에 388억원가량이 더 든다. 35조원이 넘는 시 전체 예산으로 감당 못할 수준은 아니지만 절대액이 크다. 서울시 관계자는 “연간 소요되는 비용이 많고 사회적 공감대 확보도 필요해 당장 추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조례안은 8월 23일 시작한 임시회에 상정되지 않았다. 다음 회기까지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권 의원은 “청소년이라도 기본적인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하자는 목소리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만 다들 먼 이야기처럼 받아들여 간극이 크다”고 했다. 예산 문제가 아닌 의지의 문제라고 운동본부는 비판했다.

고민은 계속되어야 한다

생리대 지원을 시혜나 역차별로 보는 시선도 만만찮다. 당사자인 여성 청소년들 사이에서도 ‘저소득층 청소년에게 지원금을 더 주는 게 낫지 않으냐’는 말도 나온다. 여성정책 연구자 ㄱ씨는 “각종 무상정책이나 노인·아동수당을 도입할 때 반발이 있었던 것처럼 복지를 확대하는 방향은 좋지만 어떻게 배분하느냐의 문제”라고 했다. 그는 “중산층 이상 가정에 있는 소녀들의 건강까지 국가가 책임질 만큼 재정상태가 좋으냐. 낙태나 사후피임약 지원, 미혼모 지원 등 다른 여성 건강권 문제보다 우선하느냐의 문제가 있다”며 “전반적인 여론 수렴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지자체들도 반대 여론을 의식하고 있다. 여성 청소년 생리대 보편지급 조례안을 추진하고 있는 경기도의회 전승희 의원(민주당)은 “집행부가 예산이 너무 크다고 난색을 보여 무조건 안 된다고 하지 말고 도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보자고 제안했다”며 “모든 여성이 생리를 하는 만큼 생리대 지급은 시혜적 관점이 아닌 보편적인 인권 차원에서 논의돼야 한다”고 했다.

‘생리대 보편지급’은 전세계적 이슈다. 미국 뉴욕주는 2016년부터 공립학교, 노숙자 쉼터, 교도소 등 공공시설에 무료 생리대를 비치하고 있다. 스코틀랜드는 지난해 9월부터 모든 초·중·고교와 대학에 생리대를 두기 시작했다. 영국도 올 하반기부터 학생을 대상으로 한 ‘보편지급’에 동참했다. 생리용품에 붙는 세금인 ‘탐폰세’를 없애는 국가와 도시도 늘고 있다.

1개당 평균 331원. 2004년 생리대에 붙는 부가가치세 10%가 폐지됐는데도 한국의 생리대 가격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미국과 일본은 181원. 물가 높기로 유명한 덴마크는 156원이다. 국내 생리대 값은 2010년부터 7년 동안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13%)의 2배나 뛰어올랐다. 많은 여성들은 ‘더 안전하다’고 말하는 생리대를 집어들지만 높은 가격 앞에서 망설이고 있다.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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