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잔재 역사현장, 없앨까 기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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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조선통감관저 터’ 등 일제가 근대화란 명목으로 전국 곳곳에 남긴 어두운 역사현장을 돌아보는 ‘다크투어’가 확산되는 가운데 남아있는 흔적들을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논의도 이어지고 있다.

역사는 만들어지는 데도, 청산되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건물인 구 조선총독부 건물은 해방 후 50년이 지난 1995년에야 해체가 시작됐다. 건물이 완전히 해체된 것은 1996년 말, 기공 이후 80년이 지나서야 역사에서 사라진 것이다. 일제가 경성부라는 새로운 이름의 행정구역을 만들어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던 서울에는 그만큼 많은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남았고, 아직도 지명이나 비석 등으로 당시의 역사를 되짚어볼 수 있는 현장들도 있다. 서울 외에도 일제가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전국 곳곳에 남긴 어두운 역사현장을 돌아보는 ‘다크투어’가 확산되는 가운데 남아있는 흔적들을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논의도 이어지고 있다.

해외 거주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8월 14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관람하고 있다. / 김정근 선임기자

해외 거주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8월 14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관람하고 있다. / 김정근 선임기자

“분위기가 진짜 어둡고 무겁네요. 이런 곳에서 어르신들이 갇혀 계셨다니….”

8월 20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앞에서 만난 김형선씨(78)는 다음 일정 때문에 자리를 떠야 한다면서도 마지막까지 한 번 더 역사관 담장을 쓰다듬었다. 별로 기억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김씨는 일본 고베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해방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부모님을 따라 부산에 정착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어쩌다 서울에 들를 일은 있었으나 굳이 서대문형무소 같은 역사의 현장을 찾아볼 일이 없었던 그가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한 것도 우연히 지나는 길 중간에 이곳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씨는 “한국사람이 이런 곳도 안 와보고 살았다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이제라도 와서 약간이나마 짐을 덜었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구 조선총독부 건물 1996년 해체

인생의 일부를 일제강점기 시절에 보낸 김씨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역사적 현장과 얽힌 사연은 없다. 부모님은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막일을 했기 때문에 독립운동이나 친일행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어릴 적 일가 손윗어른 한 분이 일제에 저항하다 고향인 경남 창녕에서 대구를 거쳐 서울까지 압송됐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얼핏 남아있을 뿐이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그 어르신도 어쩌면 여기에 갇혀 계셨을 수도 있었겠네”라고 일행 중 어떤 이가 말하자 “그분이 서울로 끌려가다가 도망쳐서 간도로 가셨다던가 하는 얘기도 있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해방 후 70여년이 지났지만 서울시내 곳곳에 흔적이 남은 곳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기억을 가진 시민들도 만날 수 있었다. 서울관광재단이 역사의 아픔을 돌아보며 교훈을 되새기자는 취지로 발표한 ‘다크투어’ 경로 중 ‘남산 국치의 길’을 따라가면 당시의 건축물이나 시설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자취를 통해 역사를 마주할 수 있다.

남산 국치의 길은 통감관저 터부터 시작한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은 일본의 데라우치 통감과 이곳에서 ‘한일병합조약’을 조인했다. 그 일주일 후인 8월 29일부터 조약이 발효되면서 대한제국은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 통감관저 터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뜻으로 ‘기억의 터’를 조성해 ‘조선통감관저 터’임을 새긴 비석이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이 관저로 사용되던 무렵 세워진 을사늑약 당시 주한공사 하야시 곤스케 동상의 기단부를 거꾸로 세워놓은 동상도 역사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남았다.

당시 남산 아래서부터 현재의 충무로와 명동 일대까지가 일본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는 기억은 이곳에 수십 년간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는 아직도 생생하다. 남산 자락을 따라 리라학교와 숭의여대로 가면 리라학교 내 남산원에 있던 노기신사 터와 숭의여대 교내에 있는 경성신사 터를 볼 수 있다. 노기신사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 육군을 지휘한 노기 마레스키를 봉안했고, 경성신사는 침략전쟁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일본 신토의 본산 이세 신궁에서 일부 신체(神體)를 가져와 만들어졌다. 일본이 조선의 국체를 빼앗고 남산에 대규모로 조선신궁을 건설하기 전까지 경성신사는 조선 거주 일본인들의 종교생활 거점 역할을 했다. 부근에서 만난 80대 주민 성모씨는 “경성신사는 조선이 망하기 전부터 이 동네에 들어와 있던 일본인들이 많아서 세워져 있던 것으로 들었다”며 “주변에 총독관저도 있고 일본 관리들도 많이 찾았기 때문에 이 동네 조선사람들은 각별히 더 조심하고 숙이며 살아야 했다”고 말했다.

“아픈 흔적도 교훈 얻게 남겨둬야”

경성신사 이후 조선 내 신사참배의 중심이자 일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한 상징이기도 했던 조선신궁 역시 남산에 남은 역사의 흔적이다. 남산 케이블카 탑승장 방향으로 올라가다 탑승장에서 더 위로 가면 나오는 한양공원 비석이 조선신궁 건립으로 사라진 공원의 자취다. 이어 남산을 향해 올라가면 나오는 서울교육청 과학전시관 계단이 바로 조선신궁 앞 계단의 일부였다. 당시 조선신궁의 크기가 여의도 면적을 훌쩍 넘는 대규모였기 때문에 해방 이후로도 한동안 곳곳에 남아있는 시설물들이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서울 외의 지역에서 일제강점기의 수탈상을 짐작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 건축물은 전남 목포에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이다. 현재 목포 근현대역사관으로 쓰이는 이곳은 일본이 경제수탈을 위해 세운 국책회사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 지점이 있던 모습을 건물 그대로 남겨 뒀다. 서울의 본점은 1908년 지금의 KEB하나은행 명동 사옥 자리에 창설된 이래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조선의 땅을 헐값으로 매입하거나 강제로 가로채 수많은 농지와 임야를 수탈하는 역할을 했다. 서울에는 현재 흔적이 남아있지 않지만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 의사의 동상으로 당시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전국 아홉 곳에 있던 지점 중 목포와 부산지점 건물에 당시의 모습이 남아있고, 두 곳 모두 현재는 역사관으로 바꿔 수탈과 착취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목포지점 내부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목포 거리가 전시돼 있어 현재 목포 구도심 군데군데 있는 당시의 유산과도 비교하며 돌아볼 수 있게 했다. 전남지역 향토사학자 이일훈씨(79)는 “해방 직후에는 흔히 말하는 적산가옥을 서울뿐 아니라 지방 도시에서도 서로 먼저 점유하겠다고 아귀다툼이 벌어지고 곧이어 전쟁까지 치른 바람에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은 건물들은 찾기 어렵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모은 자료와 기억에 따르면 한국전쟁 때 포화를 별로 맞지 않은 호남지역에서는 일제의 잔재라 할 수 있는 건축물들도 상당히 유지됐다. 그러나 사유재산으로 넘어가고 역사청산을 해야 한다는 의도로 빠르게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가 배고픈 시절을 겪지 않고 문화유산을 통해 교훈을 얻을 여유가 좀 더 있었다면 일제시대 당시의 아픈 흔적도 일부는 역사를 돌이켜보고 교훈을 얻을 수 있게 남겨뒀을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기도 하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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