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진이 쓰고 있는 ‘역사의 한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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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진의 평균자책점 1.45는 역대 22차례 선발 등판 투수 기록 중 5위에 해당한다. MLB.com은 후반기에 달성이 기대되는 11개의 대기록 중 하나로 류현진의 1969년 이후 최저 평균자책점 기록을 꼽았다.

미프로야구 LA 다저스의 류현진이 지난 7월 26일(현지시간) 워싱턴 내셔널스전에서 역투하고 있다. / 연합뉴스

미프로야구 LA 다저스의 류현진이 지난 7월 26일(현지시간) 워싱턴 내셔널스전에서 역투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때 ‘방어율’이라 불렸던 ‘평균자책점’은 영어 ‘earned run average(ERA)’의 번역이다. 영어 표현 그대로 투수가 책임지는 점수의 평균이라는 뜻이다. 투수가 허용한 자책점을 투구 이닝 수로 나눈 뒤 9를 곱한 숫자가 평균자책점이다. 9이닝을 기준으로 투수가 평균적으로 몇 점을 허용하는지 드러내 직관적으로 잘 보여준다. 3점대 투수라면 9이닝을 던졌을 때 3점 정도를 허용한다는 뜻이다. 선발투수 역할을 제대로 했다고 평가하는 퀄리티스타트는 6이닝 3자책점을 기준으로 한다. 평균자책점으로 따지면 4.50이다. 3점대 평균자책도 나쁜 편은 아니다.

그런데 류현진(32·LA 다저스)의 올 시즌 평균자책점은 8월 15일 현재 1.45밖에 되지 않는다. 9이닝을 던졌을 때 2점도 안 준다는 뜻이다. 류현진은 올 시즌 7이닝 이상 던지고 점수를 내주지 않은 등판이 6차례나 된다. 뛰어난 기록을 넘어, 어마어마한 기록이다.

메이저리그 초창기에는 평균자책점이라는 기록이 필요 없었다. 투수라면 9이닝을 완투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투수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록으로는 ‘승패’가 가장 중요했다. 이후 투수들의 역할이 선발과 구원으로 나뉘면서 다른 기록이 필요하게 됐고, 평균자책점이 유용하게 쓰이기 시작했다. 내셔널리그가 평균자책점을 공식기록으로 채택한 게 1912년이었다.

평균자책점 1.45는 어머어마한 기록

일본이 야구를 받아들이면서 ERA를 ‘방어율’로 번역하면서 한국야구도 오랫동안 방어율이라는 명칭을 써 왔다. ‘선동열 방어율’은 어떤 분야에서든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기록이나 결과가 나왔을 때 쓰는 ‘대명사’였다. KBO리그는 2015시즌부터 공식 기록에서 방어율 대신 평균자책점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현대 야구에서 투수의 목표는 점수를 주지 않는 것이다. 주자를 내보내더라도 들여보내지 않는 능력이 중요하다. 물론 류현진은 주자를 내보내지 않는 능력(WHIP·이닝당 출루허용), 주자가 나가더라도 들어오지 못하게 만드는 ‘위기관리 능력’(득점권 피안타율), 궁극적으로 점수를 주지 않는 능력(평균자책점) 등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다. WHIP는 0.93으로 내셔널리그 1위, 평균자책점 1.45는 메이저리그 전체 1위다.

투수의 목표가 점수를 주지 않는 것이라는 점에서 평균자책점은 몇 가지 한계를 감안하고서라도 투수의 능력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류현진의 1.45는 단지 올 시즌 최고 투수의 수준을 넘어선다. 류현진은 아예 메이저리그 투수 역사를 다시 쓰려고 하고 있다.

메이저리그는 몇 가지 단계를 거쳐 발전해왔다. 야구 초창기에서 1919년까지의 시기를 ‘데드볼’ 시대라고 부른다. 당시 공은 잘 날아가지 않는 재질이었다. 1점대 평균자책점 투수가 수두룩하던 시절이었다. 1920년 이후를 ‘라이브볼 시대’라고 부른다. 현재 쓰는 공과 비슷한, 중심에 코르크 재질의 코어가 들어가 반발력이 높아진 공을 쓰기 시작했다. 라이브볼 시대 이후에는 1점대 평균자책점 투수들이 크게 줄어들었다.

1969년 이후를 ‘낮아진 마운드의 시대’라고 부른다. 1969년은 ‘현대 메이저리그’의 상징과도 같은 해다. 메이저리그는 ‘투수들의 해’라고 불렸던 1968시즌을 치르고 난 뒤 심각한 투고타저 환경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1968년에는 밥 깁슨(1.12)을 비롯해 1점대 평균자책점 투수가 7명이나 나왔다. 아메리칸리그 타격왕은 칼 야스트르젬스키가 차지했는데, 겨우 3할1리였다. 팀 타율이 2할3푼에 못미치는 팀도 7팀이나 됐다. 뉴욕 양키스의 팀 타율은 겨우 0.214였다.

1968년 12월, 메이저리그는 투고타저 완화를 위해 규칙을 손보기로 했다. 가장 큰 변화는 마운드의 높이와 스트라이크 존의 변화였다. 마운드 높이를 종전 15인치에서 10인치로 낮췄고, 스트라이크 존의 높이를 줄였다. 투수가 손을 입에 가져가는 행동을 금지시키는 등 부정투구에 대한 규제도 강화했다. 투수에게 불리하게 고친 이 규칙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1969년 이후 평균자책점은 기록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1969년 이후 지금까지 시즌 최저 평균자책점은 드와이트 구든(뉴욕 메츠)이 1985년 기록한 1.53이다. 누구도 1.5 이하의 평균자책을 기록한 적이 없다. 2위는 그레그 매덕스로 애틀랜타에서 뛰던 1994년 1.56을 기록했다. 3위 기록 역시 매덕스가 이듬해인 1995년 기록한 1.63이다. 그 뒤를 2015년의 잭 그레인키(LA 다저스·1.66)와 1981년 놀란 라이언(휴스턴·1.69)이 잇는다.

미 프로야구 LA다저스의 류현진이 지난 8월 11일(현지시간) 애리조나전에서 동료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미 프로야구 LA다저스의 류현진이 지난 8월 11일(현지시간) 애리조나전에서 동료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1969년 이후 평균자책 1.5 이하 전무

1969년 이후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투수는 모두 24명. 류현진이 이제 그 명단 맨 위에 이름을 올릴 기회를 잡았다.

그저 막연한 기대감이 아니다. MLB.com 역시 류현진의 대기록에 큰 관심을 드러냈다. MLB.com은 8월 13일 후반기에 달성이 기대되는 11개의 대기록 중 하나로 류현진의 1969년 이후 최저 평균자책점 기록을 꼽았다.

물론 쉽지 않다. 류현진은 지난 8월 12일 애리조나전까지 올 시즌 22차례 선발 등판했다. 메이저리그 기록을 다루는 STATS에 따르면 류현진의 평균자책점 1.45는 역대 22차례 선발 등판 투수 기록 중 5위에 해당한다. 1968년 밥 깁슨이 시즌 22번의 선발 등판까지 평균자책점 0.96을 기록했고 같은 해 루이스 티안트가 1.25를 마크했다. 1971년 비다 블루가 1.42로 3위다. 2005년 로저 클레멘스가 1.450으로 4위, 류현진은 1.451로 아슬아슬하게 클레멘스에 뒤진 5위다. 이들 모두 시즌 최종 평균자책점은 22차례 선발 등판 기록보다 더 높았다. 깁슨이 그해 1.12로 마무리했고, 티안트는 1.60으로 시즌을 끝냈다. 블루는 1.82, 클레멘스는 1.87로 시즌 종료 때 평균자책점이 높아졌다.

류현진은 일정상 7~8차례 정도 더 등판할 수 있다. 한 차례만 삐끗하더라도 평균자책점은 크게 치솟을 수 있다. 그런데 올 시즌 유일한 ‘삐끗 등판’은 ‘투수들의 무덤’에서였다. 류현진은 지난 6월 29일 콜로라도 원정경기에서 4이닝 7실점했다. 남은 시즌 다저스는 더 이상 콜로라도 원정경기가 남아있지 않다. 콜로라도와 남은 6경기는 모두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다. 류현진의 기록에서 6월 29일 4이닝 7실점을 빼고 계산하면, 류현진의 평균자책점은 1.04까지 낮아진다. 대기록 달성 가능성을 기대하게 하는 요소다.

평균자책점은 물론 투수들의 능력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지만 어쩔 수 없는 한계도 지녔다. 투수 개인의 능력뿐만 아니라 팀 야수들의 수비능력이 적지 않은 영향을 주는 기록이다. 류현진은 KBO리그 시절 불안한 수비 속에서 통산 평균자책점 2.80을 기록했다. 팀 수비능력뿐만 아니라 야구장의 ‘조건’도 영향을 준다. 앞서 류현진이 삐끗했던 ‘쿠어스 필드’는 높은 고도에 따른 타구 비거리 증가 등의 요인으로 투수들에게 무척 불리한 구장이다.

이 같은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기록 중 하나가 ‘조정 평균자책점(ERA+)’이다. <LA 타임스>는 지난 8월 14일 류현진의 기록을 분석하면서 “조정 평균자책점으로 따졌을 때 역대 다저스 투수 중 최고, 다른 팀을 모두 따져도 역대 2위에 해당한다”고 전했다.

조정 평균자책점은 역대 2위

조정 평균자책점은 당시 시즌의 리그 전체 평균자책점을 고려하고, 홈구장의 입지 및 투수의 유·불리 조건 등 요소를 추가해 조정하는 기록이다. 서로 다른 시즌, 다른 구장에서 뛴 투수들의 능력을 비교할 수 있도록 만든 기록으로 100을 평균으로 한다. 100보다 클수록 해당 시즌 해당 투수가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는 뜻이다. 일종의 상대평가가 가능한 기록이다.

류현진의 올 시즌 조정 평균자책점은 무려 284나 된다. <LA 타임스>는 한 시즌 142이닝 이상 던진 투수들의 조정 평균자책점을 계산했고, 류현진은 다저스 투수 중 1위였다. 2위는 2016년의 클레이튼 커쇼로 237을 기록했고, 2015년의 잭 그레인키가 222로 뒤를 이었다. 다저스 사상 최고의 좌완 투수로 평가받는 샌디 쿠팩스는 1966년 190을 기록했다.

메이저리그 전체로 확장해도 류현진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1901년 이후 142이닝 이상 투구한 투수의 한 시즌 최고 조정 평균자책점은 역대 최강의 투수로 평가받는 페드로 마르티네스다. 마르티네스의 2000시즌 조정 평균자책점은 291이었다. 류현진은 284로 페드로의 바로 뒤를 잇는다. 역대 3위는 1914년 더치 레오나드의 279, 4위는 1994년 그레그 매덕스의 271이다. 어마어마한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은 물론 오히려 이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남은 시즌 열어뒀다.

2019년의 류현진은 ‘코리언 몬스터’를 넘어 ‘월드 몬스터’로 진화하고 있다.

<이용균 스포츠부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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