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동 골목길-중년이 되어 다시 찾은 신당동 떡볶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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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나 지금이나 신당동 떡볶이 메뉴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때 떡볶이집을 드나들던 청소년들이 배 나온 중년이 되어 찾아와 추억의 맛을 즐긴다. 새로운 세대에겐 신기한 먹을거리일 것이다.

떡볶이 골목이 신당동의 대명사가 됐다.

떡볶이 골목이 신당동의 대명사가 됐다.

광희문 바깥에 신당동이 있다. 서울 팔대문 중 동남문에 해당하는 광희문은 그 현판의 이름보다 ‘시구문(屍口門)’이라는 속명이 더 자연스러웠다. 도성 안 사람이 죽어 마지막 여행길을 나서던 문이 시구문이다. 그러니 문 밖 신당동이 어떤 곳이었을지는 자연히 상상할 수 있다. 망자들이 묻히고 귀신을 부르며 생로병사의 마지막 맺음이 신당동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더러 길 잃은 귀신을 위해 벌이는 굿판도, 돌림병이 돌면 그 주검을 쌓아 두는 일도 신당동에서 있었다.

동네의 이름에 지금은 새로울 신(新)을 쓰지만, 본디 귀신 신(神)자를 썼다고 한다. 신을 모시는 당집들이 빼곡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아직도 신당동 골목 곳곳에 푸른 대나무에 높게 매단 무당의 붉고 흰 신장기가 보이고 그 안에서 신 내린 무당이 망자의 넋을 불러 공수하는 일도 볼 수 있다. 신당동, 행당동 일대의 신은 애기아씨신이라 하는데, 지금 그 신당들의 자취는 찾아보기 어렵다. 동네 토박이의 말을 들어보면 그마저 하나둘 사라지고 있단다.

골목골목 봉제공장들이 들어선 신당동.

골목골목 봉제공장들이 들어선 신당동.

신을 모신 당집이 빼곡했던 신당동

신당동의 골목길들은 그야말로 좁고 빽빽하다. 이 도시에서 미궁을 경험하고 싶다면 주저 없이 신당동 골목을 헤매면 된다. 한 사람이 겨우 걸을 만한 폭이다. 거미줄처럼 이어지고 이어진 골목길을 걷다보면 동서남북을 완벽히 잊을 수 있고, 좌로 우로 뻗어 있는 골목은 문득 큰길로 나갈 수 있을지 의심하게 만든다. 서울 어디에 이렇게 빼곡한 골목이 남은 곳이 있을까 싶다. 골목길가 문은 모두 닫혀 있고 창문엔 방범창이 침범을 거부하고 있다. 서울이 겪은 지난 시절의 배타와 의심이 골목길 모습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금은 복원되어 근사한 모습으로 살아있지만 광희문은 한때 누각이 모두 사라지고 현판마저 떨어져 사라졌고 문짝마저 없어진 돌문에 불과했다. 퇴계로 확장공사 때 뜯겨 옮겨질 운명이 닥쳤으나 결국 계획은 취소됐고 제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수없이 드나들었을 망자들의 영험함이었을까. 광희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옆 무허가 주택들이 철거되고 이젠 제법 그럴듯한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다. 성곽길을 따라 공원도 생겼다.

일제강점기 문화주택부터 근현대 건축물을 다양하게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문화주택부터 근현대 건축물을 다양하게 볼 수 있다.

광희문을 나서면 동쪽으로 비스듬한 경사길이 보이는데, 그곳은 1960년대까지 번성하던 시장이 있던 곳이다. 시구문시장, 당시의 가게라곤 떡집 하나가 남았다. 제대로 된 시장이라기보다 길을 따라 좌판이 줄을 이은 일종의 난장이었다. 시장이 있던 이 경사로가 신당동이 시작되는 곳인데, 본디 도성을 빠져나온 시신을 여기저기 묻던 묘지가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도시로 몰린 사람들은 결국 죽은 자들의 땅을 차지했다. 배고픔은 귀신보다 강하다.

당시 신당리 일대는 극도로 가난한 이들의 마을이었다. 시인 이상이 제비다방을 망해먹고 금홍이와 헤어져 가난을 등에 지고 이사했던 곳도 신당리였다. 이상은 생의 마지막 한두 해를 신당리의 빈민가에서 보냈다. 해방 이후에도 이곳은 도시로 밀려들던 이들이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성곽에 무차별로 판잣집이 들어섰고, 싸구려 작부집들이 술과 몸을 팔던 시절도 있었다. 1960년대 중반에 와서 불도저란 별명을 가진 군인 출신의 서울시장은 이런 난잡함을 결코 봐줄 수 없다고 했다. 군사작전에 버금가는 철거를 통해 시구문 시장과 인근의 사창가들은 정리가 됐다.

신당동에서 25년째 전파사를 열고 있는 주민은 “예전에는 술집이 그렇게 많았다. 또 여자들 옷을 파는 가게도 많았는데, 이제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고 전했다. 대신 골목골목 봉제공장들이 늘고 중국인과 베트남인 노동자들이 늘었다고 한다. 개미, 장미, 해당화, 잊지마, 미인, 물망초 등 애잔한 간판들이 줄지어 있던 술집골목엔 겨우 한둘만이 남아 향수를 그리워하는 늙은 취객을 기다릴 뿐이다.

시구문이란 속명이 더 알려진 광희문은 신당동의 시작이다.

시구문이란 속명이 더 알려진 광희문은 신당동의 시작이다.

퇴계로에서 왕십리로 이어지는 길가엔 대장간과 철공소, 목공소들이 줄지어 있었다. 100개가 넘던 대장간은 이제 단 두 곳만이 남았다. 목공소는 겨우 10곳 미만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세상의 변화는 결국 신당동 골목길에서 여실히 만날 수 있다. 먹고사는 방식도 수단도 변했으니 골목의 주인도 바뀌고 색깔도 달라진다.

10여년 전부터 조금씩 터를 잡던 중국인들이 요즘 신당동 골목의 대세가 됐다. 골목 안 양꼬치집은 낯설지 않고 중국식품가게도 흔히 보인다. 헤이룽장(黑龍江)성에서 왔다는 식품점 주인은 가게문을 연 지 10년이 넘었다고 했다. 그는 빼곡한 백주 중에서 50도짜리 고려촌술을 권하며 “소주는 싱거워서 맛이 없다. 술은 배갈이지” 하며 웃는다. 꿀에 잰 대추, 건두부, 물만두, 집안을 장식할 복(福)자 글씨 하며 중국인 입맛에 맞는 거의 모든 물건들이 아주 잘 팔리고 있었다.

동대문 의류시장 유행 좌우했던 곳

골목과 골목 사이 아주 깊은 곳에 들어가면 가정집에 걸린 교회 간판을 볼 수 있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모습은 평범한 신당동 가정집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곳은 중국인 그리고 조선족을 위한 가정교회라고 했다. 어떤 내력이 있을지 궁금하지만, 골목은 깊고 으슥하다.

지금은 사라진 시구문 시장.

지금은 사라진 시구문 시장.

신당동 골목의 대표는 역시 떡볶이골목이다. 골목의 깊이도 길이도 그다지 길지 않지만 열 곳 남짓한 떡볶이집들이 신당동을 대표한다. 떡볶이 원조를 주장하는 집 간판엔 예전 ‘며느리도 모르는 떡볶이 비결’이던 문구가 ‘이젠 며느리도 알아요’로 바뀌었다. 그 할머니의 첫째아들 막내아들 등 일가가 떡볶이판의 승리자가 됐다.

지금 그 골목은 자동차가 양방향으로 다닐 만큼 넓은 길이 되었지만, 떡볶이집이 처음 생겼을 무렵 일대는 개천이 흐르던 곳이었다. 생활오수가 여과 없이 흐르고 온갖 쓰레기들을 내다 버리던 개천가 좁고 위태로운 길 옆에 간판도 없던 처마 낮은 집이 소위 원조집의 옛 모습이었다. 인근엔 남녀고등학교들이 많아 수업을 마치거나 빼먹은 청소년들이 몰려와 싼값에 이것저것 푸짐하게 먹을 수 있던 주전부리가 소위 신당동 떡볶이다. 배도 채우고 남녀학생들이 애틋한 두근거림으로 눈길도 마주치던 은밀한 곳이 지금은 대명천지의 소문난 곳이 되고 말았다.

청계천 대부분의 지천들은 흘러 본류로 합류했지만 신당동을 흐르던 개천은 거꾸로 청계천에서 갈라져 나와 약수동을 거쳐 한남동으로 흘러 한강까지 이르렀다. 청계천을 덮고 유행처럼 모든 개천을 덮을 때 신당동 개천도 덮였다. 넓은 길이 생기자 은둔의 떡볶이촌은 그야말로 활기를 찾게 됐다. 집집마다 DJ가 신청음악을 받고, 그야말로 10대들의 명소가 됐던 역사가 있다.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신당동 골목길.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신당동 골목길.

밀떡과 라면사리에 삶은 계란, 튀긴 만두에 어묵을 넣고 양배추를 곁들여 춘장과 고추장 양념장을 올려 불에 조리면 신당동 떡볶이가 된다. 달고, 짜고, 맵고…. 예전 10대가 좋아할 만한 재료들이 다 들어 있다. 1970년대나 지금이나 신당동 떡볶이 메뉴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때 떡볶이집을 드나들던 청소년들이 배 나온 중년이 되어 찾아와 추억의 맛을 즐긴다. 새로운 세대에겐 신기한 먹을거리일 것이다. 주차를 유도하던 직원에게 장사가 어떠냐고 묻자 “예전만 못하다. 아마 유행을 지난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원조집 건너 거대 떡볶이 매장이 있는 곳은 본디 동화극장 자리였다. 변두리 2차 개봉관 중에 규모가 큰 편이었고, 극장쇼와 영화 동시상영으로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신당동 주민들의 중심지가 됐던 곳이다. 재개봉관에서 시류를 따라 영화와 쇼 동시공연관으로, 다시 영화 2편 동시상영관으로 몰락했다가 이제 영화관의 맥은 끊겼다. 대신 떡볶이를 판다. 떡볶이는 힘이 세다.

아직도 철 지난 재개발 안내판

신당동에서 장충동으로 이어지는 골목에는 봉제공장 간판이 자주 보인다. 회현동이나 창신동과 다른 것은 신당동 봉제공장들은 주로 봉제일의 전반작업에 해당하는 패턴, 디자인 등을 취급한다는 점이다. 시장을 읽은 디자이너가 옷을 그리고 패턴을 만들고 원단을 처리한다. 후반작업보다 부가가치가 높고 신속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들을 맡고 있다. 그런 면에서 동대문시장의 유행을 좌우하는 곳이 신당동인 셈이다.

덕분에 이 일대 골목길엔 오토바이가 많다. 좁은 길로 원단을 싣고 달리는 오토바이도 자주 마주친다. 중국으로 샘플을 보내는 특송업체들도 골목골목 자리잡고 있다. 서울시내 곳곳에는 생각보다 봉제공장이 많은 편이다. 봉제업의 특성상 과정이 복잡하고 지역의 특성에 맞춰 다양한 업종들이 마을을 점령하고 있다.

신당동은 상당히 넓은 동네다. 신당동에서 다산동, 약수동, 청구동, 동화동이 갈라져 나갔고, 신당5동은 바꿀 동네 명칭이 마음에 안든 주민들의 저항으로 아직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다. 동명이 바뀐 만큼 마을 분위기도 급격히 변했다. 재개발도 이루어져 약수동, 청구동 일대는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섰다. 신당동 일대 부동산엔 아직도 철 지난 재개발 안내판들이 붙어 있지만, 다시 재개발 열풍이 불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신당동에도 도시재생사업의 흔적은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야간청소년출입금지구역 간판이 붙었던 골목길은 칠과 그림으로 옛 자취를 덮었다. 인문학을 강의하는 공동체 카페도 들어서 있다. 골목 안 축대 높은 곳에 있던 일제강점기 문화주택은 색색이 단장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쿠데타 직전 살던 신당동 문화주택은 서울시 등록문화재가 됐다. 그 인근 청구동 김종필의 집은 주인을 잃었다.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하자, 개성 시구문 밖 귀신들과 그 귀신을 섬기는 무당들이 한양의 시구문 밖으로 옮겨왔다고 전해진다. 그야말로 고려의 귀신과 조선의 귀신들이 함께 갈팡질팡하던 곳이 신당동이었다는 민담이 있다. 땅은 쓰는 사람에 의해 용도가 바뀌고 형상이 달라진다. 지금의 신당동엔 귀신들이 살 까닭도 없고 더 이상 신당의 힘이 땅기운을 지배할 리도 없을 것이다. 가난으로 망자의 잠자리까지 빼앗아야 할 시절도 아니다. 그러니 신당동의 작부집이 사라지고 무당집이 점점 문을 닫는 것은 새로운 사람들이 새로운 기운을 만들어가는 증거이다. 서울의 속살이 만들어내는 미로를 걷고 싶다면 신당동 골목의 미궁 사이를 걸어볼 수 있다. 아마도 열심히 살아가는 오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김천(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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