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는 시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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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과 결을 따지기 전에 지하철에 시가 너무 많다. 시가 빽빽이 들어차 있으니 시 특유의 여백이 없다. 스크린 도어에 ‘의무적으로 쓰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하철역에 시가 있다. 누구라도 전동차를 기다리며 스크린 도어에서 시 한 편을 읽을 수 있다. 시 중에는 공모작품이 많다. 일반 시민들의 시를 모으고 가려서 지하철역에 전시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을 것이다. 지하철 승객들의 시를 보는 안목은 천차만별이다. 느낌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시적 울림이 약하다는 지적이 의외로 많다. 사물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고 꼬집는 사람도 있다. “공적 공간을 낭비한다” “시각 공해다”라며 독설을 퍼붓기도 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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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시가 있는 지하철은 급한 호흡을 가다듬는 여유가 있다. 시를 읽고 있으면 전동차의 쇳소리도 잦아든다. 우리에게는 시를 향한 원초적 그리움이 있는 것 같다. 그 옛날에도 장부의 으뜸 멋은 시를 잘 짓는 일이었고, 또 어느 시대이건 시에 대한 내용과 깊이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시를 짓는 이들에게 시대를 아파하고 잘못된 세태에 분개하라고 일렀다.

“예스러우면서도 힘 있고, 기이하면서도 우뚝하고 웅혼하며, 한가하면서도 뜻이 심원하고, 밝으면서 환하고, 거리낌 없이 자유로워야 한다. 그런 기상에는 전혀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가늘고 미미하고, 자질구레하고, 경박하고, 다급한 시에만 힘쓰고 있으니 개탄할 일이다.” 지하철 시들만 탓할 일이 아니다. 요즘 돌아보면 경박하고 다급한 시들이 양산되고 있다. 시들이 둥둥 떠 있는 느낌을 받는다. 시는 영혼을 돌아 나와야 한다. 공자의 가르침대로 생각에 사악한 기운이 없어야 한다. 얼마 전에 무릎을 치게 만드는 시 한 편을 발견했다.

‘한 편의 시(詩)를 쓴다는 것/ 말(言)이 절(寺)을 만나는 일 아니랴’(송철복)

말(言)이 절(寺)를 만나야 비로소 시(詩)가 된다고 했다. 시인은 한 편의 시를 쓴다는 것은 저마다 마음속에 절 한 채를 짓는 일이라고 했다. 마음에 절을 짓는 일은 너무도 거창하다. 말(言)이 절로 들어가는 것쯤으로 낮춰도 좋을 듯하다. 그럼 말이 절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안의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고 비로소 무릎을 꿇을 수 있는가.

김택근

김택근

시인이 걸인보다 많다고 한다. 곳곳에서 시인들을 양성한다. 이런 이미지에는 이런 묘사를 하라고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어떤 재료에는 어떤 양념을 쳐야 한다는, 흡사 요리강습과 같다. 요즘 시인의 자격을 획득하기가 지하철역에 시가 내걸리는 것보다 쉽다. 아예 끼리끼리 문예지를 창간하고 자기네들끼리 시인을 추천한다. 이 땅에 시인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어떤 통과의례를 치렀던 ‘나도 시인이다’라는 사람을 헤아리면 수만 명이란다. 결국 시인의 이름으로 수만 편의 시가 ‘정품’으로 생산되고 있음이다. 그 시들은 누구의 가슴을 적시는가. 일주문을 지나 경내를 거쳐 법당 앞에 꿇어앉은 시는 과연 몇 편이나 될까.

다시 지하철 시를 살펴보자. 질과 결을 따지기 전에 지하철에 시가 너무 많다. 시가 빽빽이 들어차 있으니 시 특유의 여백이 없다. 스크린 도어에 ‘의무적으로 쓰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를 엄선해 드문드문 걸어 놓았으면 좋겠다. 시를 감상하느라 전동차 하나쯤은 그냥 보내는, 그런 시들이 걸려 있으면 좋겠다.

<김택근 시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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