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시아에 남은 이강인 ‘서바이벌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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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인이 발렌시아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것과 출전시간을 보장받는 것은 별개라는 사실은 다소 아쉽다. 마르셀리노 감독은 수비에 무게를 두는 4-4-2 전술을 선호한다. 공격형 미드필더가 주포지션인 이강인에게는 불리하다.

발렌시아에 남느냐, 떠나느냐.

발렌시아에 남은 이강인 ‘서바이벌 경쟁’

올여름 한국을 넘어 유럽에서도 큰 화제를 모은 이강인(18·발렌시아)의 거취 문제는 ‘잔류’ 쪽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다.

스페인의 <엘 데스 메르케>는 8월 7일 “발렌시아가 2019~2020 시즌을 앞두고 외국인 선수 쿼터(비유럽연합 국적자 3명)를 이강인과 막시 고메스(23·우루과이), 가브리에우 파울리스타(29·브라질)에게 쓰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만 18세의 어린 선수가 8월 17일 개막하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 ’박쥐군단‘ 발렌시아의 유니폼을 입고 당당히 주전 경쟁을 벌여야 한다는 얘기다. 프리메라리가 이적시장이 9월 1일 마감하기 때문에 아직 이적 가능성은 열린 상태지만 현지 언론에서는 이강인의 잔류에 무게를 싣고 있다.

이강인의 잔류… 왜?

이강인의 발렌시아 잔류는 기존 예상과는 다른 흐름이다. 지난 6월 끝난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에서 한국을 준우승으로 이끌고 골든볼(MVP)을 차지한 그는 올여름 임대 이적이 유력했다. “발렌시아는 나의 집”이라며 애정을 숨기지 않지만 기량을 꾸준히 갈고닦으며 성장할 실전무대가 필요한 까닭이다. 이강인은 에이전트인 하비 가리도를 통해 스페인 레반테와 그라나다, 네덜란드 아약스, PSV 아인트호번 등 유럽 내 다른 팀들과 꾸준히 접촉해왔다. 마테우 알레마니 발렌시아 단장도 이강인이 완전 이적이 아닌 실력을 키우고 돌아오는 임대 이적을 추진하는 것에는 호의적인 입장이었다. 일각에서는 이강인이 ’바이백(일정 금액의 이적료에 원 소속팀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권리)‘ 옵션을 통해 완적 이적을 추진한다는 소식도 제기됐다.

그러나 싱가포르 출신인 피터 림 발렌시아 구단주가 이강인의 잔류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림 구단주는 U-20 월드컵 본선을 직접 현장에서 살펴본 뒤 이강인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과정에서 올여름 발렌시아가 영입을 추진하던 브라질 출신 공격수 하피냐 알칸타라(26·바르셀로나)를 영입하는 대신 이강인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라고 요구했다. 림 구단주는 심지어 7월 말 싱가포르에서 비밀리에 진행된 수뇌부 회의에서 알레마니 단장과 마르셀리노 가르시아 토랄 발렌시아 감독에게 이강인의 거취와 활용방안에 대해 적극적인 개입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현지 언론에선 림 구단주가 자신의 의사에 반대할 경우 단장과 감독의 동반 경질 가능성까지 언급했다고 보도했다. 결국 마르셀리노 감독은 회의 직후인 8월 5일 독일 레버쿠젠과의 친선전이 끝난 뒤 “이강인의 충분한 출전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방법을 찾고 있다”고 인정해야 했다.

림 구단주가 이강인의 잔류를 원한 배경은 아시아에서 마케팅 가치가 남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발렌시아가 스페인을 벗어나 글로벌 빅 클럽으로 성장하려면 새로운 팬층의 유입이 절실하다. 그런 면에서 리오넬 메시(32·바르셀로나) 이후 처음으로 탄생한 만 18세 U-20 월드컵 골든볼 선수인 이강인은 효과적인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게 발렌시아 구단의 판단이다. 아닐 머시 발렌시아 회장은 “이강인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마케팅이나 디지털 분야 등 팀의 다른 부분에도 도움이 되는 선수”라며 “우리 구단의 새로운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은 한국과 남미에서 가장 많은 다운로드를 기록했다”고 강조했을 정도다. 김대길 <경향신문> 축구 해설위원은 “이강인이 U-20 월드컵 직후 국내에서 찍은 상업광고들(KT·LG·넥슨·아디다스)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라며 “발렌시아는 과거 박지성(38·은퇴)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스폰서를 유치한 것과 같은 결과를 이강인에게 기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7명과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라

이강인이 발렌시아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것과 출전시간을 보장받는 것은 별개라는 사실은 다소 아쉽다. 마르셀리노 감독은 4-4-2 포메이션, 특히 공격형 미드필더를 쓰지 않고 수비에 무게를 두는 전술을 선호한다. 공격형 미드필더가 주포지션인 이강인에게는 불리하다. 다재다능한 이강인은 이번 프리시즌에서 줄곧 오른쪽 날개로 기용됐지만 완벽하게 어울리는 옷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빼어난 볼 간수 능력과 패싱력을 과시했지만 공격 전개과정에서는 아무래도 스피드가 빠른 선수는 아니기에 침투능력에 한계를 노출했다. 한준희 KBS 해설위원은 “이강인이 갑자기 측면 윙어로 변신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며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이강인이 임대 이적을 통해 경험을 쌓기를 바랐다. 한 단계 도약할 현 시점에서 흡족한 출전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발렌시아에 남은 이강인 ‘서바이벌 경쟁’

이강인을 더욱 부담스럽게 만드는 것은 치열한 팀내 경쟁구도다. 스페인의 <데포르티보 발렌시아노>는 8월 8일 기사에서 “이강인은 훌륭한 재능을 갖고 있지만, 발렌시아에는 경쟁자가 너무 많다”며 측면 날개 자원만 이강인을 포함해 8명인 현실을 지적했다. 왼쪽 측면에는 지난 시즌 확고한 입지를 다진 곤살로 게데스(22·8골 4도움)와 데니스 체리셰프(29·4골 5도움)가 버티고 있다. 백업 선수 마누 바예호(22)도 전 소속팀인 카디스에서 10골 3도움을 기록했을 정도다.

이강인이 상대적으로 주전을 꿰차기에 수월할 것이라는 오른쪽 날개조차 빈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발렌시아 유스 출신인 카를로스 솔레르(22)는 지난 시즌 4골 11도움을 올리면서 국가대표급 재능을 인정받은 선수다. 다니엘 바스(30)는 오른쪽 날개와 오른쪽 풀백을 오가면서 2골 7도움을 기록할 정도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자유계약선수(FA)로 영입된 제이손(25)도 1군 경력만 따진다면 5년차로 아직 이강인이 넘어서기에는 쉽지 않다. 발 빠른 날개인 페란 토레스(19)가 이강인 대신 독일 분데스리가 임대 이적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 그나마 숨통을 트이게 만들 따름이다.

축구전문가들은 이강인이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자신만의 색깔을 확실하게 보여줘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강인의 가장 큰 무기는 다른 선수들과 비교해 다양한 포지션에서 뛸 수 있는 범용성과 뛰어난 발 재간이다. 왼쪽 날개로 뛸 땐 송곳 같은 크로스로 공격을 풀어가는 스탠딩 윙어로 장점을 어필할 수 있고, 오른쪽에선 풀백과의 연계를 통해 중앙을 오가면서 공격 전개를 책임지는 플레이메이커로 변신이 가능하다. 한준희 위원은 “주발이나 위치는 좀 다르지만 왼쪽에선 데이비드 베컴(44·은퇴), 오른쪽에선 크리스티안 에릭센(27·토트넘)이 롤모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서바이벌 롤모델은 베컴과 에릭센

김대길 위원도 “분명히 선발로 뛰기는 어렵겠지만, 교체로 출전할 때 경기에 변화를 줄 수 있다면 중용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강인이 단 22분만 뛰고도 가능성을 입증했던 지난 1월 30일 헤타페와의 코파 델레이(스페인 국왕컵) 8강 2차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이강인은 직접적인 공격 포인트는 기록하지 못했지만 환상적인 크로스와 스루패스로 2골을 만들면서 4강 진출에 기여했다.

물론 이강인이 자신의 약점으로 지적받는 몸싸움과 수비능력을 개선할 필요성도 있다. 마르셀리노 감독은 수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감독이다. 이강인이 1군 무대에서 수비에 약점을 지속적으로 노출할 경우 꾸준히 기용되기는 어렵다. 반대로 이강인이 수비에서 발전한다면 주장인 다니 파레호(30)의 휴식이 필요한 시점에서 중앙 미드필더로 교체 출전할 가능성도 열린다. 신태용 전 축구대표팀 감독(49)은 “이강인의 재능은 누구나 인정하지 않느냐”며 “몸싸움과 스피드만 개선되면 더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강인의 발렌시아 ‘서바이벌 경쟁’은 6개월 내로 판가름날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18살의 어린 선수는 짧은 시간에도 성장할 수 있는 만큼 겨울 이적시장이 열리는 시기까지 자리를 못잡는다면 재차 이적을 꾀하는 것도 방법이다.

김대길 위원은 “이강인의 성장은 결국 시간 문제이기에 3개월, 아니 6개월을 잘 살펴보면서 발전 속도를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준희 위원은 “이강인 스스로 냉정하게 살펴봐야 할 문제다. 플랜 A와 B, C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강인은 자신의 이적 여부에 대해선 말을 아낀 채 발전만 다짐하고 있다. 이강인은 “최대한 열심히 해서 성장하려고 한다. 남든 가든 최선을 다해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말했다.

<황민국 스포츠부 기자 stylel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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