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 골목길-동촌으로 불린 한양도성의 동북쪽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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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의 동북쪽 마지막 마을이 혜화동이다. 서촌, 북촌에 대비해 동촌으로 불린 때도 있었다. 전차가 다니고 경성제국대학이 인근에 있었으니 일제강점기 중·상류층이 모여 살던 고급주택가가 혜화동 일대였다.

혜화동은 오래된 저택들이 남아있는 중상층 동네였다.

혜화동은 오래된 저택들이 남아있는 중상층 동네였다.

한양 성곽의 여덟 문 중 동북방에 혜화문(惠化門)이 있다. 혜화동은 혜화문 주변 마을이다. 혜화문의 본디 이름은 홍화문(弘化門), 조선 성종 임금이 창경궁 동문을 홍화문으로 일컬으면서 이름을 빼앗겼고 중종 때 혜화문이라는 이름을 새로 얻었다. 흥인지문을 동대문이라 부르듯 혜화문의 속칭은 동소문이다.

혜화동이 지금과 비슷한 모습으로 생긴 것은 대략 1930년대쯤이라 한다. 당시 전차 종점이 혜화동에 있었고, 이후 돈암동까지 연장되면서 결국 혜화문은 헐리고 만다. 한양도성이 고스란히 품고 있던 동북쪽 마지막 마을이 혜화동인 셈인데, 서촌, 북촌에 대비해 동촌으로 불린 때도 있었다. 전차가 다니고 경성제국대학이 인근에 있었으니 일제강점기 중·상류층이 모여 살던 고급주택가가 혜화동 일대였다.

혜화동에서 한양도성 성곽길을 따라가면 북악산에 이른다.

혜화동에서 한양도성 성곽길을 따라가면 북악산에 이른다.

혜화동 골목길은 깊고 고요하다. 대낮에도 적막하고 인적이 드물다. 명륜동과 혜화동을 가르는 찻길에는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차량들이 분주하고, 혜화동 로터리는 종로에서 서울 북부로 향하는 주요 교통로라 늘 붐비는 곳이다. 그런데도 골목으로 한 발 내디디면 적막강산을 실감할 수 있다.

서울대학교 병원·창경궁·북악산

기와를 올린 한옥들이 골목 입구에 줄을 이어, 이 골목이 만만찮게 오래된 길임을 보여준다. 한동안 천덕꾸러기 취급받던 조선집들이 요즘엔 귀한 몸값을 자랑하고 있다. 혜화동 한옥들은 겉모습부터 매끄럽게 시대에 맞춰 잘 고쳐졌다. 최근에 다시 단장을 한 듯 벽이며 서까래들은 새 옷을 입고 있다. 혜화동 한옥을 대표하고, 그 자체로 우리나라 지자체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는 한옥이 있으니 혜화동 주민센터다. 혜화동은 동사무소가 한옥이다.

혜화초등학교 옆 골목길을 따라 꼬불꼬불 걸어 들어간 곳에 혜화동 주민센터가 있다. 넓은 한옥과 곁에 새로 지은 5층 건물이 주민센터다. 1940년에 지었다는 한옥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였던 한소제의 집이었다. 한씨는 1960년대 미국으로 떠났다. 집은 관리하기가 어려워 거의 방치되었다가 2006년에 종로구에서 사들여 여러 차례 고쳐 국내 최초의 전통가옥 지자체 건물이 됐다. 주민 쉼터도 있으니 혜화동 골목길을 걷다 지치면 잠시 들러 쉬었다 가도 된다. 집터가 넓어 집의 규모와 생김새도 시원하다.

한옥을 개조한 혜화동 주민센터

한옥을 개조한 혜화동 주민센터

혜화동의 태생이 중·상류층의 거주지였던 터라 이 동네 집터들은 대부분 큼직큼직하다. 골목 곳곳에 남아있는 고택들은 그야말로 한 시대의 명성과 풍요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담은 높고 정원은 울창한 2층 양옥집들에서 혜화동의 옛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한껏 멋을 부린 양옥은 규모도 크고 치장도 화려하다. 하지만 그 집들도 주인은 늙고 자식들은 떠났으며 집을 가꿀 일손도 구하기 어렵게 됐다. 한소제의 집처럼 넓은 집을 건사하기란 이 시대에 쉽지 않은 일이다.

골목길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고급 빌라들이 줄지어 있다. 고택을 헐고 공동주택을 짓는 일이 유행을 타고 지나갔다. 집장사의 솜씨거나, 집을 물려받은 후대의 셈법으로 넓은 집터는 돈이 되는 자산이다. “주변에 명문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있어서 교육환경 좋고, 지하철에 어디나 갈 수 있는 버스노선이 지나가 교통편이 아주 좋다. 인근에 서울대학교 병원도 있고 창경궁도 있어서 주변 여건이 최고다. 대학로가 인근이라 문화생활도 즐길 수 있고, 북악산으로 등산길도 있어 자연환경도 좋다. 주거지로 여기만한 곳이 없다”는 것이 부동산업자의 혜화동 예찬론이다. 옛 혜화동의 명성은 골목길을 더 나아가 자리잡은 성북동이 이어 갔다. 우리나라 제일 부자들이 산다는 성북동 집들은 아직도 큼직큼직하고 성곽 같은 담을 두르고 있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혜화문으로 가는 골목길엔 문화센터와 원격교육 아카데미 등의 거대한 건물들이 들어섰다. 학습지 회사인 재능교육이 큰길가에 사옥 빌딩을 지었고, 뒤쪽 골목에 집들을 사들여 문화센터와 교육센터를 지은 것이다. 현대적인 조형의 건물은 멋들어지나 조용한 주택가의 분위기와는 겉도는 부조화도 느낄 수 있다. 아이들에게 팔린 학습지 한 장 한 장이 모여 저 거대한 성채를 지을 수 있다니 역시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비싸고 치열하다. 길 따라 예쁘고 특이하게 치장한 건축가의 작업실도 보이고, 독특한 외형의 건물들도 골목을 장식하고 있다.

혜화동 소극장

혜화동 소극장

동성중·고와 김수환 추기경과 혜화동 성당

완만하게 경사진 골목을 따라 더 들어가면 옛 서울시장의 관사였던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가 나온다. 건물이 한양도성 성곽 위에 들어섰던 터라 시장이 관사를 옮기고 시민을 위한 도성 안내공간으로 용도를 바꾸었다. 카페도 있고 전시장도 있으니 한양도성에 관심 있는 이라면 반드시 들러볼 만하다.

그 곁에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혜화문이 있다. 문은 1994년 새로 지었는데 주변의 형세와 길이 다 달라져 원래 위치와 다른 곳에 세워야만 했다. 자리부터 모양과 현판까지 지금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으나, 현재는 다시 고치고 있다. 혜화문이 있는 위치는 주변보다 높아 올라가면 혜화동 일대와 성북동까지 한눈에 내려다 볼수 있다.

혜화동은 아직도 한옥이 많이 남아있다.

혜화동은 아직도 한옥이 많이 남아있다.

혜화문에서 큰 길을 건너 천주교 혜화동 성당이 있다. 조선 말 혜화동 일대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고, 그런 인연으로 혜화동 성당은 서울에 문을 연 세 번째 본당이 됐다. 성당을 중심으로 가톨릭대학이 있고 동성 중·고등학교가 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은퇴 후 혜화동 신학교 사제관에서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그의 별명이 ‘혜화동 할아버지’였으니 어쨌든 천주교는 혜화동에 거대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혜화동 성당에서 필리핀 신부가 필리핀어로 미사를 열고 있는 인연으로 일요일 동성고등학교 앞에는 작은 장이 열린다. 혜화동 필리핀 마켓, 대다수가 천주교 신자인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이 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난장을 연다. 고향의 먹을거리부터 생필품까지 사고팔고, 안부를 묻고, 일자리 정보를 나누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다시 힘을 얻어 간다.

성당 주변뿐 아니라 혜화동파출소 뒤쪽 골목에도 그들의 반짝시장이 열린다. 필리핀 마켓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이 잠깐 동안 모여 서로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파는 장마당이다. 초창기에는 고향과 통화할 수 있는 국제전화카드나 중고 휴대폰 따위를 사고팔았는데 지금은 품목도 다양해졌다. 그 옆에서 은행은 일요일 송금센터를 열고 있고, 카페와 구멍가게에서 파는 맥주는 필리핀산 산미구엘이며 안줏감은 말린 망고조각이다. 사람 좋은 미소로 삼삼오오 모여 타갈로그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들은 일요일 혜화동 골목에서 흔히 마주치는 정경이다.

혜화동 골목을 걷다보면 곳곳에 깊이 박힌 천주교의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골목 안 평범한 집에 수도회 간판이 걸려 있고, 가톨릭 책방도 있고 수제품 묵주와 성물을 파는 가게도 있다. 수사들과 평신도의 공동체 공간도 볼 수 있다. 혜화초등학교 뒤편 노인을 위한 데이케어센터는 혜화동 성당 위탁으로 운영되고 있다. 아마도 주변에 자연스레 스며 있는 천주교를 만나고 싶다면 혜화동 골목길을 걸으면 될 것이다.

대학로가 지척인지라 혜화동 골목에는 소극장과 공연장, 공연연습장을 쉽게 볼 수 있다. 아버지가 연출을 하고 딸들이 공연하는 가족극장, 아이들을 위해 동화 공연을 하는 아동극장, 마술공연 전문극장도 혜화동에 예술의 색깔을 입히고 있다. 소위 오프 대학로 소극장들의 아지트가 혜화동인 셈이다. 포스터 하나 붙어 있지 않고 줄 선 관객을 찾아볼 수 없이 늘 조용한 혜화동 소극장을 지나다 보면 연극도 규모의 경제학이 적용되고 홍보가 성패를 좌우한다는데 가난한 예술가는 세월의 어려움을 어찌 견디나 싶은 걱정이 든다. 그래도 몇몇 소극장들이 10여년째 문을 닫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고맙고 다행한 일이다.

대학로 가까워 소극장·공연장 즐비

당연히 있을 것 같은 오래된 가게들이 하나씩 사라져갈 때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혜화초등학교 아래 길가에 ‘보성문구사’가 있었다. 아마도 서울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그 문구점은 문을 닫았다. 소위 문방구 마니아들의 성지였던 곳인데 50년 넘게 버티다가 물러나고 말았다. 그 아래 헌책방도 문을 닫았다. 질서 없이 쌓인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제목을 말하면 거침없이 찾아주던 늙은 주인의 무뚝뚝한 표정을 다시 볼 수 없게 됐다. 그 아래 표구점도 문을 닫았다. 혜화문 옆 길가의 고서점도 문을 닫았다. “교수들이 많이 살던 동네라서 좋은 책들이 많이 나온다”던 주인장은 어디로 갔을까. 오래된 마을엔 이끼처럼 덮여 있던 시대의 흔적과 사람들이 있다. 이젠 그것들이 더 버틸 가망 없이 말라버릴 때가 되었나 보다. 살짝 골목 안에 숨어 있는 ‘혜화떡집’은 살아남았다. 요즘 한창 가게를 뜯어고치느라 분주하다. 아마도 혜화동 터주신들이 그 집 떡 맛을 못잊나 싶다.

파출소 뒤 골목 안에 칼국숫집이 있다. 겉보기엔 허름하고 평범한 국숫집인데, 방송의 맛집 타령에 반드시 등장하는 곳이다. 뒤쪽 골목 안에 따로 별관도 있고 낮이며 저녁이며 앉을 자리가 없는 아주 잘되는 식당이다. 1970년대에 문을 연 이 국숫집 단골 중엔 고 김영삼 전 대통령도 있었고 고 김종필 전 총리도 있었다. 리모델링하기 전 식당 안 제일 큰 방 한쪽 벽에는 김 전 대통령의 휘호가 걸렸고, 반대 벽에는 김 전 총리의 글씨가 걸려 있었다. 둘의 정치적 행로가 상반되는지라 먹을 것을 사이에 두고 글씨조차 서로 맞서 있는 모습은 은근히 웃음거리였다. 어떤 연유에선지 혜화동과 성북동은 칼국수로 유명하다. 혜화동 칼국숫집에서 길을 넘어 성북동 골목길에는 ‘국시’라는 작은 간판의 국숫집이 있는데, 이 집 또한 점심시간에 발을 딛기가 어렵다. 이 집도 김 전 대통령 부자의 단골이었다.

오후 학교가 파할 시간 혜화동 골목길에는 뛰어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심각한 표정의 청소년들이 이어폰을 귀에 꽂고 세상 무심한 듯 귀갓길에 나선다. 마을은 고요하고 골목은 소란치 않으나 이들이 걷는 모습을 보면 아직 혜화동 골목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혜화동은 서울에서 보기 드물게 오래되고 조용한 골목을 품고 있다. 지금 남아있는 고택들은 하나둘 사라질 것이고, 그보다 높은 공동주택들이 그 자리를 메워가고 있다. 세월이 또 가면 혜화동의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그 다음 또 다른 세대의 골목길 모습을 만들 것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풍요롭고 정의로우며 행복한 시대가 오리라는 기대를 갖는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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