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이 신뢰를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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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재상 관중(管仲)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가난하게 살 때 일찍이 포숙과 장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더 많은 몫을 차지하곤 했지만, 포숙이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자(鮑子·포숙)이다.”

사마천의 <사기열전> 중 ‘관·안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깊은 우정을 가리킬 때 쓰는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사자성어가 여기에서 유래됐습니다. 자신의 형편이나 이해관계에 상관없이 친구를 위했던 관중과 포숙아(鮑叔牙)의 끈끈한 우정은 바로 신뢰가 바탕이 됐습니다.

요즘처럼 ‘신뢰’라는 말이 뉴스에 자주 등장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최근 벌어진 일련의 상황들 때문입니다.

얼마 전 이탈리아의 명문 프로축구단 유벤투스의 방한 친선경기에서 ‘노쇼’ 파문을 일으킨 크리스티아누 호날두(34)에 대한 축구팬들의 분노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를 보기 위해 최고 40만원에 달하는 입장료를 내고 경기를 관전했지만 호날두는 벤치에 머문 채 끝내 그라운드를 밟지 않았습니다. “계약 조항에 최소 45분 출전을 보장했다”는 주최 측의 설명을 믿고 경기장에 달려간 팬들은 호날두의 행위에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신뢰를 저버린 호날두에 대해서는 ‘날강두’라는 원색적인 비난까지 등장했습니다.

한 달 넘게 지속되고 있는 한·일 간 갈등 역시 정치와 경제 문제를 분리해 유지해온 양국의 신뢰관계를 일본이 일방적으로 깨버린 데서 비롯됐습니다. 일본 정부는 지난달 초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문제삼아 반도체 제조에 핵심 소재인 3개 품목의 수출 규제조치를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대법원 판결로 인해) 신뢰관계가 현저히 훼손됐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댔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얼마 안 가 한국의 대북제재 위반 등 ‘안보 우려’를 규제 이유로 꺼내들었습니다. 그러나 거꾸로 일본이 불화수소 등 전략물자를 북한에 밀수출한 전력이 드러나자 ‘안보 우려’ 주장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습니다. 이후에는 당국자 접촉은 물론 협의조차 꺼리는 분위기입니다. 지난 8월 1일에는 일본을 찾은 국회 방일단과 자민당 고위 관계자의 면담마저 취소해버렸습니다. 도대체 누가 신뢰를 훼손하고 있는지 어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번뿐만이 아닙니다. 아베 총리는 집권 후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과한 1993년 ‘고노 담화’, 식민지배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한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부정하려는 움직임을 끊임없이 벌여왔습니다. 한·일 간에 ‘신뢰’라는 말을 입에 담기조차 민망합니다.

신뢰란 일방적인 게 아닙니다. 서로의 믿음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그 믿음이 무너지면 그야말로 되돌리기 힘든 상황으로 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지금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한 번 깨져버린 신뢰가 복원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먼저 신뢰를 거론하고도 신뢰 없는 행태로 일관하는 일본에 묻고 싶습니다. “니들이 신뢰를 알아.”

<조홍민 에디터 겸 편집장 dury12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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