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 내세워 공정경제 흔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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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의 화평법 등 규제완화 전방위 요구…규제 풀면 반도체 소재 국산화될까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인 ‘공정경제’가 흔들린다. 일본 아베 정권이 쏜 ‘대(對)한국 수출규제’라는 화살이 국내 노동·환경 안전망에 균열을 냈다. 정부가 일본 수출규제 대응책으로 장시간 연장근로 허용(주52시간 근무제)과 화학물질 관련 규제(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이하 화평법) 완화를 택하면서다.

7월 20일 서울 주한 일본대사관 인근에서 시민들이 모여 ‘경제보복 아베 규탄!’ 촛불집회를 개최하고 있다./이준헌 기자

7월 20일 서울 주한 일본대사관 인근에서 시민들이 모여 ‘경제보복 아베 규탄!’ 촛불집회를 개최하고 있다./이준헌 기자

고용 경제지표 악화 이후 커졌던 재계의 규제 완화 요구는 일본 수출규제 조치 이후 더욱 거세졌다. ‘유연한 조정’ 방식으로 이뤄지던 정부의 규제 완화는 일본 수출규제를 계기로 반드시 이뤄져야 할 ‘혁신’이 됐다. 재계가 특정 규제를 골라 기업 활동을 가로막는 ‘악법’으로 지목하면 보수언론이 규제를 때리고 정부가 혁신을 명목으로 완화를 추진하는 모양새다.

재계의 규제 완화 요구는 전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법인세 인하를 비롯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등 세제·환경·노동정책 전반을 아우른다. 보수야당도 힘을 보탠다. 자유한국당은 일본 수출규제 대응책으로 기업규제 철폐와 소득주도성장, 탈원전정책 폐기를 촉구하고 나섰다. 재계와 보수야당, 보수언론이 일본 수출규제를 지렛대 삼아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일본의 수출 규제 품목은 화학물질

“최근 논의되는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화평법) 등은 기업 현실에 맞지 않고 투자나 일자리 창출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2013년 9월 12일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이 정례회의에서 밝힌 발표문이다. 이후 화평법은 2016년 2월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업무수첩에 다시 등장한다.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받아 적은 안 전 수석의 수첩에는 ‘환경규제 多’, ‘규제 리스트 달라’, ‘삼성 리스트 주면 환경부 풀어야’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여기서 삼성은 삼성바이오로직스를, 환경규제는 화평법을 뜻한다. 2015년 말 환경부는 완공된 삼성바이오로직스 제2공장에 대해 ‘화평법 적용대상이 아니다’라는 유권해석을 내렸고 공장은 2016년 2월부터 가동을 시작했다.

화평법은 ‘가습기 살균제 참사’ 이후 화학물질 사고 예방과 재해 안전망 구축을 위해 2013년 5월 제정돼 2015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법이다. 화학물질과 유해화학물질 함유제품의 유해성·위해성을 관리하고 화학물질에 대한 정보를 생산·활용하기 위해 마련됐다. 화학물질을 다루는 기업들은 법 시행 이전보다 까다로운 안전관리를 받아야 한다. 이 때문에 재계는 화평법 입법 준비단계부터 시행 유예기간을 거쳐 현재까지 화평법을 ‘기업의 발목을 잡는 악법’으로 간주해 개정과 철폐를 요구해 왔다. 이에 환경·시민단체는 ‘화평법은 최소한의 안전을 지켜줄 규제’라며 맞섰다.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참사와 2012년 23명의 사상자(노동자 5명 사망)가 발생한 구미 불산 누출사고 이후 퍼진 화학사고에 대한 경각심이 시민사회에 힘을 보탰다.

2019년 7월 4일 일본발 변수가 생겼다. 일본의 수출규제다. 아베 정부가 수출 제한 품목으로 지정한 반도체 핵심 소재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는 ‘화학물질’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일본 수출규제로 반도체 생산 차질을 빚게 될 처지에 놓이자 ‘왜 우리는 핵심 소재를 만들지 못했느냐’는 질타가 쏟아졌다. 재계는 국산화가 이뤄지지 않은 이유로 정부 규제, 그 가운데에서도 화평법을 꼽았다. 화평법에 따른 까다로운 인·허가 절차와 비용부담 때문에 국산화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주52시간 근무제 특례 확대 방침

보수 경제지들은 기다렸다는 듯 화평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화평법 시행으로 화학물질 한 개 등록에 최소 8000만원에서 5억원이 들고 신규 화학물질 수입에 필요한 서류작업만 1년 가까이 걸린다는 등 숫자만 바뀐 비슷한 내용의 보도가 잇따랐다. 환경부는 그때마다 ‘화학물질 등록비용은 평균 1200만원’, ‘2030년까지 단계적 등록 유예기간 부여’ ‘연구·개발(R&D)에 사용되는 신규 화학물질은 등록 면제’와 같은 해명자료를 내놨지만 비판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결국 정부가 손을 들었다. 일본이 수출규제 방침을 밝힌 지 6일 만에 규제 완화 카드를 꺼냈다. 지난 7월 10일 김상조 정책실장은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계 주요 인사 간담회 자리에서 화학물질에 대한 여러 규제를 개선하는 것을 검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날 간담회에서 재계 인사들은 ‘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이하 화관법)이 기업 활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며 규제 철폐를 호소하기도 했다. 이후 정부는 각 부처별로 소재·부품 관련 인·허가절차 최대한 신속 진행, 화학물질 생산규제 완화, 반도체 소재·부품 R&D 업종 주52시간 근무제 특례 확대 등 규제 완화 방침을 밝혔다.

재계 요구대로 규제를 풀면 반도체 소재·부품의 국산화가 이뤄질까. 이용범 반도체산업구조선진화연구회 연구위원은 규제와 반도체 소재·부품 국산화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본다. 반도체 소재·부품 국산화가 이뤄지지 않은 이유는 현행법상 규제 때문이 아니라 국제분업으로 재편된 반도체산업 구조에 따른 결과다.

국내 기업들은 여러 나라가 기술과 자원, 비용에서 각자 유리한 품목을 생산해 상호교역하는 국제분업 구조(글로벌 밸류체인)에 따라 가격 대비 성능이 뛰어난 일본산 소재·부품을 택했고 전략은 유효했다. 이용범 연구위원은 “국내 중소기업들이 소재·부품 기술을 갖고 있더라도 현재 밸류체인 속에서 해외 공급망을 찾지 못하면 경쟁력을 갖지 못한다”며 “반도체 소재·부품 국산화 부재는 구조에서 비롯된 현상일 뿐 화학물질 규제가 문제라는 진단은 사안을 침소봉대한 것”이라고 말했다.

7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30대 기업 대표를 만나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와 관련한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연합뉴스

7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30대 기업 대표를 만나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와 관련한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연합뉴스

지난 6월 김학수 호서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가 국회에서 발표한 <반도체산업 생태계 진단 및 대책>에 따르면 국내 업체들은 반도체 장비·소재·부품의 국산화율이 낮은 이유를 중소·중견기업의 투자자금 및 인력 부족, 대기업의 실질적 상생협력 부족, 납품 생태계 협소(대기업의 납품 수용도 낮음) 순으로 꼽았다. 해당 조사에서 화학 관련 규제는 순위권에 포함되지 않았다.

천영우 인하대 환경안전융합전공 교수는 “8년 전 중소기업이 고순도 불화수소 기술을 개발했다가 규제에 막혀 상용화하지 못했다는 기사를 봤는데 그때는 화평법·화관법이 있지도 않았다”며 “잘못된 진단으로 섣불리 화학물질 규제를 풀었다가 안전사고가 나면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이 더 클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도 반도체 소재·부품 국산화가 일시적인 규제 완화로 단기간에 해결될 사안이 아님을 알고 있다. 국책연구기관인 산업연구원 김양팽 연구원은 “현재 반도체산업의 글로벌 밸류체인을 일본이 독단적으로 깨기 어려운 구조”라며 “당장 소재·부품 국산화가 이뤄질 수 없고 중소기업에서 생산하더라도 삼성·SK에서 바로 쓸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장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민 안전과 노동자 기본권 훼손 우려

정부는 연일 규제 완화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7월 24일 부산에서 열린 시·도지사 간담회에서 “규제 혁신을 국정 최우선 순위에 두겠다”고 밝혔다. 규제 완화에 대한 정부 입장을 공고히 한 셈이다.

갑작스런 규제 완화 기조 속에 정부 부처 간 규제 완화 범위를 놓고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다. 환경부 관계자는 “화학물질 관련 법안은 사고로 희생된 국민들이 세운 법”이라며 “법의 취지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사회적으로 경제논리가 강한 상황이어서 목소리 내기가 힘든 형편”이라고 말했다.

노동계는 정부의 일본 수출규제 관련 규제 완화 조치가 시민의 안전과 노동자의 기본권을 훼손할 것을 우려한다. 정부는 반도체 소재 국산화를 위해 관련 업종 노동자에 대한 특별연장근로를 인정하고 연구·개발 인력의 재량근로제를 적극 권장하기로 했다. 정부는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 조치가 ‘사회적 재난’에 준하는 사태여서 특별연장근로 조치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특별연장근로는 자연재해나 재난관리 기본법의 자연·사회재난 혹은 이에 준하는 사고를 수습하기 위한 경우에 인정된다. 노동자 동의절차를 받으면 1주 12시간 이상 연장근로가 가능하다.

당장 일본 수출규제를 사회적 재난으로 볼 수 있는지를 놓고서도 이견이 나온다. 이정미 정의당 의원은 7월 23일 의원총회에서 “정부가 노동자의 건강권과 화학물질 안전을 소재산업의 경쟁력과 대립되는 것으로 보는 경제 기득권의 시각을 수용했다”며 “특별연장근로는 천재지변의 상황 등 재난관리법을 엄격히 해석해 시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연장근로 인가 방침이 현장에서 악용될 소지도 있다. 특별연장근로 대상에는 수출규제 대상 품목 대체 조달 시 테스트 업무를 하는 노동자가 포함된다. 소재·부품 테스트는 생산라인 노동자 업무다. 일반 반도체산업 노동자들도 특별연장근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실제 라인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제조라인에 있는 직원”이라며 “연구직·생산직 구분 없이 다 연장근로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민규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은 “일본 수출규제 품목이 늘어나면 특별연장근로 대상 업종도 확대될 것”이라며 “아베 정권의 부당조치는 막아야겠지만 일본을 빌미로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는 조치를 정당화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진보진영 내부에서는 정부가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를 빌미로 재계 숙원을 풀어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경제와 정치 문제를 분리해 접근하겠다는 정부의 기본 방침이 반일감정 앞에 허물어지고 있다”며 “문재인 정부가 공약한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는 이미 사라졌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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