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받는 월급 공개를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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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분포공시제’ 도입 목소리 커져… “임금격차 해소 위해 필수적” 주장

미국의 소셜미디어 관리 전문기업 ‘버퍼(Buffer)’는 전직원의 임금을 공개한다. 버퍼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최근까지의 매출통계나 성장률 등은 물론 90명 전체 직원의 급여와 책정 방침까지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직책과 경력, 사내 근무연수, 부양가족 수 등의 요소를 바탕으로 비교적 간단하게 계산되는 공식을 통해 임원과 직원 모두 얼마를 받는지가 예외 없이 결정된다. 이 회사 역시 소규모 스타트업으로 시작했을 때만 해도 직원 각자의 임금을 공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많지 않은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아 사내정치가 심각해지는 것을 경험한 뒤 전면적으로 임금을 공개했다. 추가비용 없이 단지 임금을 공개하는 것만으로 조직문화를 개선하는 효과를 거둔 것이다.

3월 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성별 임금격차 해소를 위한 ‘3시 STOP’ 조기퇴근시위 중 참가자들이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3월 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성별 임금격차 해소를 위한 ‘3시 STOP’ 조기퇴근시위 중 참가자들이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고용노동부 업무계획에 도입 검토

기업 내부와 외부를 가리지 않고 연봉이나 월급 등 급여수준을 밝히는 것은 한국뿐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에서 ‘금기’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임금 투명성 수준을 높이는 것이 기업과 구성원들에게는 물론 사회 전체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특히 다양한 이유로 생겨나는 임금격차의 폐해가 더욱 심각해질 경우 특정 연차와 직급, 직종에서 어느 정도의 임금을 받는지를 공개하는 ‘임금분포공시제’를 시행하면 임금격차를 완화할 수 있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지난 7월 12일 최저임금위원회는 2020년 최저임금을 올해보다 2.87% 오른 시급 8590원으로 결정했다. 1998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역대 세 번째로 낮은 인상률이었다. 월급으로 환산하면 179만5310원, 연봉으로 따지면 2154만원을 조금 넘는다. 반면 지난해 결산보고서를 바탕으로 국내 시가총액 기준 100대 기업 임원 중 상위 100명의 연봉을 집계해 나온 평균 액수는 41억6700만원에 달했다. 격차가 193배를 넘는다.

보유한 자산에서 나오는 막대한 자산소득이나 배당금에 더해 고액 연봉까지 받아가는 재벌 총수 등 대기업 고위 임원과의 임금격차는 언뜻 피부에 와닿지 않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규모다. 이에 비해 같은 업종의 원청과 하청, 정규직과 비정규직, 같은 기업 안에서도 계약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임금수준은 오히려 더 큰 저항감을 부른다. 그래서 임금분포공시제 도입 여부가 아직은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여론이 가세할 경우 대중적인 호응을 부를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한 노동단체 활동가는 “사람들이 아예 동떨어진 세계에 대해서는 차별받는다는 인식조차 잘 갖지 않지만 바로 옆 동료와 비교할 일이 생기면 작은 차이에도 더 크게 분노하는 게 사실”이라며 “그래서 노동계 안에도 임금분포공시제가 노동자의 단결을 저해할 가능성이 있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이 있다”고 말했다.

당초 임금분포공시제 도입 논의는 문재인 정부 출범 전 대통령 공약 단계에서 그 단초가 나온 바 있다.

정부는 2017년 7월 발표된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서는 성별 임금격차 문제에 초점을 맞춰 ‘성평등 임금공시제’를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임금격차를 심화시키는 더 많은 요인들을 감안해 임금분포를 더욱 폭넓게 공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고용노동부가 2019년 업무계획에 처음으로 (가칭) 임금분포공시제 도입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노동부 관계자는 “아직까지는 관계부처와의 협의와 사전점검 때문에 구체적 방안을 밝힐 단계는 아니다”라면서도 공시제 추진이 사실상 중단됐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는 “정책을 진행 중인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공시내용과 공개범위는 확정하지 못한 상태지만 임금격차 해소를 위해 노동계와 여성계, 학계 일각에서도 임금분포공시제가 필수적이라는 주장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다만 전문가들은 개별 직원들의 월급명세서를 모두 공개하는 수준이 아니라 고용형태, 성별, 직종·직급·직무별 기준에 따라서 임금이 어떻게 분포해 있는지만을 공시하는 제도라고 설명한다. 당장 옆자리 동료나 상사가 얼마를 받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비슷하게 묶일 수 있는 직원 집단 안에서 과도한 격차가 발생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보여주자는 취지인 셈이다.

기재부 내년부터 직무별 임금 공시

국회 입법조사처 환경노동팀 신동윤 입법조사관이 쓴 <임금분포공시제의 쟁점과 과제> 보고서를 보면 해외에서는 임금격차에 관한 정보를 공시하는 정책이 정착되어 있다. 오스트리아는 2011년 개정된 평등대우법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노동자를 상시 고용하는 기업은 2년마다 임금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이 임금보고서에는 작업집단별, 근속연수별 등의 구분에 따른 남녀 노동자 평균임금과 중위임금 수치를 집계해 포함시킨다. 지난해부터 성별 임금격차 정보를 공시하고 있는 영국은 임금격차의 중위값과 평균값, 상여금 격차의 중위값과 평균값 등의 항목들을 의무적으로 공시하도록 해 누구나 성별격차가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신 조사관은 “이와 같은 추세에 발맞추어 국내에서도 남녀 임금격차 해소를 위해 임금분포공시제도의 도입을 전향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다만 구성항목, 공개방식, 적용대상 등은 심도 있는 논의와 합의를 거쳐 결정될 사안”이라고 밝혔다.

부분적이지만 임금격차 정보를 확인할 수 있게 임금분포 공시를 앞둔 공공기관과 지방자치단체도 있다. 공공기관 임금공시제도를 개편하겠다고 밝힌 기획재정부는 업무 성격, 난이도, 책임 정도에 따라 급여를 달리 결정하는 직무급제 도입을 위해 내년부터 직무별 임금을 공시하겠다는 방침이다. 서울시는 남녀 간 임금격차가 생기는 구조를 파악하고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서울시 투자·출연기관의 성별 평균임금부터 올해 10월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직무나 성별에 따른 임금 차이만 확인할 수 있어 제한된 범위에 그치지만 한편으로는 그동안 명시되지 않고 있던 임금분포 자료를 공식적인 데이터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가장 핵심이 되는 민간기업에 대한 공시제 적용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미 익명의 이용자들이 활동하는 기업 급여정보 공유 게시판에는 신입사원 초봉부터 각각의 직무와 직책에서 받는 기본급과 수당, 상여금에 이르기까지 임금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정보들을 각 기업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정승국 중앙승가대 교수(사회복지학)는 “현행 임금체계는 근속에 따라 인건비를 상승시켜 고령자 조기퇴직을 유도하면서도 신규채용은 감소시키고 비정규직을 확대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며 “임금분포공시제가 이런 이중적 노동시장에 균열을 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경영계는 민간기업에까지 공시제를 확대하는 것은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며 경계하고 있다. 김동욱 한국경영자총협회 사회정책본부장은 “임금분포공시제는 격차를 해소하기보다는 경영활동을 제약하고 오히려 노노·노사 갈등을 심화시키며 사회적 위화감을 증폭시키는 등의 부작용만 부를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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