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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독립’ 산업체질 개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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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수출규제에 휘둘리지 않게 핵심 소재 국산화 서둘러야

일본은 지난 7월 4일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의 제조에 필요한 플루오르 폴리이미드, 레지스트, 고순도 불화수소 등 핵심 품목 3개에 대해 수출규제를 발동했다. 일본은 8월 1일부터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 여기서 제외될 경우 일반포괄허가에서 개별수출허가를 받아야 해 대상 품목과 소요기간을 특정하기 어렵다.

삼성전자 연구원들이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공정과정을 점검하고 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삼성전자 연구원들이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공정과정을 점검하고 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일본의 수출규제는 단기적으로 불확실성을 키울 수 있지만 일본 업체에 가려진 국내 첨단소재·부품·장비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낙연 국무총리도 지난 7월 10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수출규제에 대응해 “부품·소재·장비산업을 획기적으로 육성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산업 육성에 6조원 정도를 투입하기 위해 예비 타당성 조사를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일본의 수출규제를 한국 산업의 체질을 개선하는 약으로 삼으려면 선결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한국은 그간 소재·부품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성과도 있었다. 2001년 619억 달러였던 소재·부품 수출액은 지난해 3161억8000만 달러로 늘었다. 하지만 반도체·디스플레이의 경우 여전히 핵심 소재의 해외 의존도가 높다. 3개 품목의 경우만 봐도 레지스트와 플루오르 폴리이미드는 90% 이상을 일본에 의존한다.

대·중소기업 간, 산업 간 칸막이 허물어야

일본은 경쟁력이 떨어지는 완제품 생산 대신 부가가치가 더 높은 소재와 장비를 특화했다. 한국이 석권한 디스플레이 패널의 경우도 완제품 마진은 기껏해야 5~10% 정도지만 소재의 경우 독점이면 이익률이 50% 이상이 된다. 제품을 만드는 회사라면 매년 신제품을 개발하는 데 비용이 들지만 레지스트와 같이 핵심 소재를 생산하는 기술을 갖고 있으면 그 기술만 가지고 계속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반도체 공정의 경우 어느 나라도 전체 부품을 모두 국산화하기는 어렵다. 특허 장벽이 있는 데다, 모든 걸 국내에서 생산할 경우 비용을 맞추지 못해 경쟁에서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곽정훈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이에 대해 “원천기술의 난이도 때문에 개발하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비용면에서 더 합리적이기 때문에 일본산을 쓴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대기업은 선진산업을 재빨리 추격하기 위해 핵심 소재와 장비·부품을 국산화하는 데 시간을 들이기보다 해외에서 들여오는 방식을 주로 택했다. 중소기업은 기술인력과 자본이 부족해 생산성으로 승부를 보려고 했다.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국제 분업체계가 완성됐고, 지금까지 문제 없이 작동했지만 이젠 수정이 불가피하다. 일본이 국제 분업체계의 신뢰를 훼손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일본이 한국 산업의 목줄을 쥐고 흔들 수 없도록 핵심 소재를 국산화하는 반도체 ‘독립’이 논의되는 시점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위해 지금까지 소재·부품·장비산업의 발전을 가로막았던 대·중소기업 간, 산업 간 칸막이를 먼저 걷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대기업은 계열사나 전속관계에 있는 중소기업이 소재나 부품을 담당하는 수직계열화에 집착했다. 판로가 정해져 있으니 요구하는 품질만 맞추면 되기 때문에 기술개발에 적극 나설 이유가 없었다. 이는 전체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다른 부품회사도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중소기업의 기술력을 높이기 위한 중장기 협력관계를 만드는 데도 소홀했다.

국내 경쟁 기업의 물건을 쓰는 것도 꺼려한다. 삼성전자가 차량용 반도체를 개발해도 현대차는 독일의 인피니언 칩을 쓰는 식이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모든 책임이 대기업에 쏠려서는 안 되지만 수직계열화, 칸막이 문제는 심각하다”며 “폐쇄적인 생태계가 협력업체의 경쟁력을 약화시킨다”고 말했다.

반도체 독립의 성공 여부는 국내 소재산업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중소기업의 경쟁력 확보에 달려 있다. 이들이 스스로 독자적인 기술과 제품을 개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지원을 집중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정부 일각에서 반도체 종합 연구 플랫폼을 구축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세계적인 종합 반도체 연구소인 벨기에의 아이멕(IMEC) 같은 연구소가 필요하다는 인식에서다.

한국판 ‘아이멕(IMEC)’ 세울까

아이멕은 회사가 설립한 연구소를 제외한 반도체 연구소 가운데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반도체 칩 설계와 소재 개발, 디스플레이, 센서 등 반도체 관련 여러 융합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반도체 소재와 장비를 테스트할 수 있는 최첨단장비를 갖추고 있어 글로벌 기업들도 이곳에서 제품을 실험한다.

한 정부 출연 연구소 관계자는 “소재의 경우 10~20년 안에 금방 치고 나갈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국내 소재분야에서 나름 이끌던 회사들이 있어서 시간과 기회를 주면 국산화가 불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수출규제에 놓인 3개 소재의 경우 길면 2~3년, 짧게 보면 1년 안으로 국산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이런 기술을 개발해도 대기업에 납품해 양산할 때의 품질을 검증할 시설이 없다는 게 문제다. 여기서 아이멕 같은 플랫폼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관계자는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의 선두에 있고, 시스템 반도체와 지능형 반도체 개발에도 나섰다”며 “이 정도면 우리도 충분히 반도체 분야에서 아이멕과 같은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모델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과기부 관계자는 “부품과 소재를 개발하는 것과 실제 제품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면서 “실제와 같은 일종의 예비 생산라인을 깔고 여러 실험을 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자는 건의를 받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플랫폼의 실험을 통과했다고 인증받으면 업체에 납품할 때 훨씬 유리할 것이라고 이 관계자는 설명했다.

한국판 아이멕이 만들어지면 반도체·디스플레이 관련 회사와 정부 출연 연구소, 민간 연구소 등이 공동 투자하는 방식으로 운영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출연연, 기업체, 학계의 의견을 수렴한 후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관련 연구·개발 대응방안을 수립해 공개할 계획이다.

소재 원천기술 확보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에서 대학이나 연구소가 10년 이상의 장기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해야 한다. 요즘은 논문의 편수를 중시하지 않는 분위기로 가고 있지만 결과물을 단기간에 요구하는 풍토는 여전하다는 것이 곽정훈 교수의 지적이다. 그는 “일본은 국가 주도 프로젝트의 경우 한 주제로 기본 5~10년을 잡고 진행한다”며 “우리는 연구·개발 기간이 짧으면 2~3년, 길어야 5년에 불과하고 정권이 바뀌면 또 주제가 바뀌어 중장기적 관점에서 원천기술을 연구하기가 쉽지 않은 구조”라고 말했다. 일본의 수출규제로 반도체 소재산업 육성의 호기를 맞았지만 단기 성과만 노리면 돈만 쓰고 과거와 같은 실패를 답습하는 꼴이 될 수 있다는 경고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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