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금리인하 앞두고 “고민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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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연준 금리인하 시사…호주·브라질·인도 등 줄줄이 내려

“새가 몇 종류나 되나 검색해봤더니 9000가지나 되더라. 우리가 관심을 갖는 매와 비둘기 말고도 엄청나게 많다는 얘기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3월 21일 한국은행 본관에서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통화정책회의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 결과와 국내에 미칠 영향 등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3월 21일 한국은행 본관에서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통화정책회의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 결과와 국내에 미칠 영향 등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7월 3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관 17층에서 열린 오찬간담회. 고승범 금융통화위원은 금리에 대한 입장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같이 에둘러 말했다. 통화정책에서 매파는 금리를 올려 물가를 잡는 ‘금리인상파’를 말한다. 비둘기파는 금리를 내려 경기를 부양하자는 ‘금리인하파’다. 최종적으로는 금리인하냐, 금리인상이냐로 나뉘지만 그 사이에는 수많은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물가와 경기, 성장률 같은 거시경제 상황과 가계부채 증가에 따른 은행의 시스템 리스크 확대 등 금융 안정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이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 위원은 “금통위에는 매파와 비둘기파가 있다. 하지만 매파와 비둘기파가 다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고 말했다. 금융을 안정시키고, 적절한 성장을 도모하는 데는 매파와 비둘기파가 따로 없다는 얘기로 들렸다. 금리인하 여부를 놓고 고민하고 있는 고 위원의 심정이 그대로 묻어났다. 고 위원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금리인상을 지지하는 매파로 분류됐다.

한국 금리인하 여력 적어 딜레마

한은이 또다시 통화정책을 수정해야 할지를 판단해야 하는 기로에 섰다. 이번에는 금리인하냐, 동결이냐를 결정해야 한다. 한은은 매번 늑장 금리대응에 나섰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지난해 11월 금리인상도 그랬다. 시장에서는 연초부터 금리인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한은은 11월에 가서야 금리를 한 단계 올렸다. 좋을 때 금리를 올려놔야 어려울 때 통화정책을 펼 여지가 생긴다는 주장도 많았지만 한은은 신중했다. 그러면서 올 초 추가로 금리를 올릴 수 있다는 시그널을 보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경기는 꺾였고 글로벌 흐름은 어느새 금리인하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한은의 기준금리는 1.75%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미국의 정책금리(2.25~2.50%)보다 최고 0.75%포인트가 낮은 금리 역전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인하는 시기만 남겨놓은 상태다. 6월 20일(현지시간) 열린 6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는 기준금리 인하 신호를 강하게 보냈다. FOMC 위원 17명 중 8명은 연내 금리인하가 필요하다고 밝다. 이 중 7명은 두 차례 인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연준의 새 이사로 비둘기 성향의 인사 2명을 지명할 예정이라고 7월 2일 자신의 트위트를 통해 밝혔다. 연준의 금리인하 기조에 쐐기를 박겠다는 의미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과 유럽은 미국과 경쟁하기 위해 대규모 환율 조작 게임을 하고 있으며, 그들 시스템에 돈을 쏟아붓고 있다”면서 “우리도 이에 맞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장에서도 7월 30~31일(현지시간) 열리는 FOMC 회의에서 금리를 내릴 것으로 보는 의견이 70%를 넘어서고 있다. 이를 신호로 연준이 올해 안에 세 차례까지 금리인하를 단행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금리인하에 대한 기대감이 이미 반영돼버려 금리를 소폭 내리는 정도로는 시장이 만족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미국 채권의 벤치마크인 10년물 금리는 2016년 이후 약 2년 8개월 만에 처음으로 2% 아래로 내려갔다. 달러화 약세도 지속됐다. 반면 완화정책에 대한 믿음은 주가를 밀어올렸다. 뉴욕 증시에서 다우존스 30 산업평균지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 지수, 나스닥 지수 등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주요 국가의 중앙은행들도 선제대응에 나서고 있다. 지난 7월 2일 호주 중앙은행은 두 달 연속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해 1%까지 낮췄다. 1%는 역대 최저 수준이다. 호주 중앙은행은 연내 한 차례 더 금리를 내릴 것으로 시티그룹은 추정하고 있다. 브라질 중앙은행에서는 연내 네 차례 금리인하설이 퍼지고 있다. 현재 브라질 기준금리는 연 6.5%로 1996년 이후 최저 수준이다. 이를 5.5%까지 낮출 수 있다는 얘기다. 인도, 말레이시아, 뉴질랜드, 필리핀, 아이슬란드, 스리랑카 등도 5월 이후 금리를 줄줄이 내렸다.

소폭 인하하면 자산시장만 자극

한은의 입장도 금리인하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6월 25일 기자간담회에서 “미·중 무역분쟁과 반도체 경기 등 우리 경제에 크게 영향을 미칠 만한 대외여건 불확실성이 한층 높아졌다”며 “(이런 상황이) 경제의 성장과 물가 흐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면밀히 점검하면서 통화정책 방향을 결정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5월 말까지만 해도 금리인하에 부정적이었다. 지난 5월 31일 금융통화위원회 회의에서 2명의 금통위원이 금리인하 소수의견을 제시한 데 대해 이 총재는 “(금리인하) 소수의견은 말 그대로 소수의견”이라며 일축했다. 당시만 해도 하반기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가 여전히 있었다.

신호가 바뀐 것은 6월 12일 한은 창립 69주년 기념사다. 이 총재는 “경제 상황 변화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해 나가야 한다”고 밝히면서 금리인하 가능성을 처음으로 시사했다. 국내 시장도 이미 금리인하에 ‘베팅’한 상태다. 국고채 3년물 금리는 1.4%대로 하락했고, 10년물도 1.5%로 낮아졌다. 장기채인 국고채 30년물도 1.6%를 소폭 상회하는 수준에 머무르며 모든 국고채 금리 수준이 기준금리(1.75%)보다 낮아졌다. 한은이 금리인하를 따르지 않을 경우 시장에 불확실성을 줘 금융시장이 되레 불안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한은도 고민은 있다. 쓸 수 있는 통화정책 여력이 적다는 것이 문제다. 역대 최저 수준의 기준금리까지 여유는 50bp(100bp=1%)밖에 없다. 두 차례 금리를 인하하면 최저 수준에 닿는다. 이 총재가 기자간담회에서 “과거 기준으로 보면 현 수준에 여유가 많다고 볼 수는 없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소폭의 금리인하는 시장에 경기부양에 대한 과감한 시그널은 주지 못한 채 자산시장만 자극할 우려가 크다. 한은의 6월 소비자동향조사 결과를 보면 소비자심리지수는 97.5로 전달보다 0.4포인트 하락했지만 주택가격전망 CSI는 97로 4포인트가 상승했다. 서울 강남구와 송파구는 집값 하락이 멈추고 상승세로 반전하는 등 서울 부동산시장은 벌써부터 꿈틀대는 분위기다. 하반기부터는 최대 90조원에 이르는 토지보상금도 순차적으로 풀린다.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한은의 금융통화위원회는 7월 18일, 8월 30일, 10월 17일, 11월 29일 등 총 네 차례가 남아있다. 앞선 네 차례 금통위에서 내렸던 금리동결 카드를 또 꺼내들기는 힘들어 보인다. 금리를 내린다고 해서 곧바로 실물경제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통상 6개월 정도 시차를 두고 시장에 반영된다. 고승범 금통위원은 “통화정책은 사후적으로 비난받기 딱 좋은 정책”이라고 말했다. 금리에 손을 대야 하는 금통위원들의 고민이 그대로 묻어나는 대목이다.

<박병률 경제부기자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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