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옛 모습·현대 모습이 조화로운 왕궁 옆 동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한옥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현대식 쇼윈도를 볼 수 있는 놀라움. 계획하지 않은 것이 계획한 것보다 더 다양하고 아름다운 조화, 혼돈 속의 평화가 서촌 골목길의 생명이다.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한 서촌 골목.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한 서촌 골목.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의 흔적들을 가로지르면 서촌마을의 골목길이 있다. 인왕산 아래 경복궁 서쪽의 마을, 행정구역상 종로구 체부동 통의동 옥인동 신교동 효자동 궁정동 등을 아울러 서촌으로 통칭한다. 지도를 보면 하나의 모둠으로 엮기에는 거대한 지역이다. 왕궁의 옆이라 세도가들이 살았다 하고 우대 또는 웃대, 북리 또는 장동이라는 오랜 이름도 갖고 있었다. 요즘에는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이 그 어름 어디쯤이라는 이유로 세종마을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을 얻었다.

서촌은 요사이 가장 번화한 마을로 주목받는다. 역사문화지구로 가꾸려는 노력도 꾸준하고, 한옥이 무려 722채나 밀집해 있어 새로운 관광지로 떠올랐다. 우선 골목길 어디를 걸어가도 작은 미술관이며 문학가를 기념하는 공간을 만날 수 있다. 경복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가 청와대 앞 분수대를 거쳐 효자동까지 가는 길은 청춘남녀의 흔한 데이트코스로 유명하다.

골목은 온전히 마을 사람이 주인이다.

골목은 온전히 마을 사람이 주인이다.

체부동 통의동 옥인동 신교동 효자동

한동안 이 오래된 마을은 달처럼 기울어 쇠락의 행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역사는 먼지 덮인 골동품에 불과했고 한옥들은 불편한 낡은 집으로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다. 사람들이 떠나가고 노인들만 왕년의 엘레지를 부르고 있었지만 고궁과 청와대 옆이라 싹 밀고 아파트단지로 개발될 일도 없었다. 서촌의 어제와 오늘을 견줘보면 마을을 어떻게 가꾸는가에 따라 모습과 의미와 역할이 달라짐을 깨닫게 된다.

골목에는 학원에 가는 초등학생과 청소년들도 쉽게 볼 수 있다. 마을이 예전보다 젊어진 것이다. “10여년 전부터 빌라들이 들어서면서 젊은 사람들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다. 청와대나 인근 정부청사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이 많이 산다”는 것이 20년째 신교동에서 살고 있는 주민의 이야기다. 경복궁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 있는 북촌이 진열장 같다면 서촌은 그야말로 사람 사는 냄새가 짙다.

마을 복판에 주민이 쉴 수 있는 정자가 있다.

마을 복판에 주민이 쉴 수 있는 정자가 있다.

골목길엔 애써 키운 화초들이 자라고, 길을 걷던 행인은 활짝 핀 접시꽃에 감탄하고 있었다. “싱싱한 오징어가 왔어요”라고 외치는 생선장수 트럭에 저녁 준비하는 주부들이 구경 나오고, 포도며 수박을 실은 과일장수 트럭에서 귀갓길의 가장이 제철과일을 고르고 있다. 한눈에도 골목길을 채운 인간사의 평온함이 와닿는다. 하늘을 막은 고층건물도, 환락을 파는 유흥가도 볼 수 없는 곳이다. 요즘 찾기 어려운 동네 빵집이 문을 열어 주민을 기다리고 있고, 그 벽에는 단골 어린이가 썼다는 손편지가 붙어 있다. 물건을 팔고사고, 주인과 손님 사이에 마음의 교감도 있다는 것일까. 커피 볶는 카페 간판에서 흔하디 흔한 프랜차이즈 상표는 볼 수가 없다. 이런 곳이 서촌 골목이다. 군데군데 색다른 가게들도 눈에 띈다. 수제신발도 팔고, 손수 바느질한 옷도 걸렸다. 이국풍의 음식점과 독특한 장식의 카페도 골목 사이사이에 숨어 있다. 그 중에는 이미 소문난 명소도 있었고, 스마트폰으로 장소를 찾아오는 손님들도 있었다.

살아난 통인시장은 관광명소가 됐다.

살아난 통인시장은 관광명소가 됐다.

문학가와 화가의 흔적 즐비

평소의 서촌은 이처럼 평안하지만 갈등의 시간이 오면 이 마을도 평화롭지 못하다. 미국산 소고기 반대시위 때나 탄핵정국의 촛불시위 때 청와대 옆 마을인 탓에 서촌 골목도 시국의 소란을 겪어야 했다. ‘청와대로 가자’는 시위대는 경찰 버스 바리케이드를 피해 사직동 주민센터 골목길을 따라 종종 청운파출소 앞에서 진을 쳤다. 때때로 서촌마을은 구호와 충돌의 중심에 서야 했다. 그런 사태야 10년에 두세 차례 있을 법한 일이고 일상의 서촌은 고요하다.

서울과 같이 개발의 속도가 빠른 도시는 옛 기억과 자취를 보존하기가 쉽지 않다. 서촌은 인근에 청와대가 있는 덕에 개발의 파괴를 비켜갈 수 있었다. 요즘 다시 가치를 주목받는 한옥들은 새로 단장해 처음 지었을 때처럼 곱고 환하다. 아이들이 인터폰을 누르며 친구 이름을 부르고, 마을 터줏대감 할머니들이 끼리끼리 이웃의 흉을 보는 정경은 마치 1960년대의 영화를 다시 보는 느낌이다.

골목 곳곳에 유람객이 찾는 명소가 숨어 있다.

골목 곳곳에 유람객이 찾는 명소가 숨어 있다.

“살기가 불편하다는데 워낙 오래 살아서 이젠 불편할 것도 없다. 지원받아서 안팎으로 싹 다 고쳤다. 보일러도 새로 놓고 요즘 짓는 집들과 별다를 것 없다”는 것이 동네 할머니의 이야기다. 사직단 뒤편에서 누상동까지 골목길에 박혀 있는 한옥들은 1970년대 이후의 양옥들보다 오히려 말끔해 보인다. 한옥은 수리하고 보수하기에 따라 가장 현대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이 되어버렸다. 한옥을 고친, 뜰 깊은 카페도 들어서 있다. 전면을 터서 바깥이 시원하게 내다보이는 고깃집도 한옥에 묘하게 어울렸다. 전직 대통령도 단골이었다는 삼계탕집은 한옥 여러 채를 줄지어 터서 만든 독특한 공간이다. 빵집도 요릿집도 심지어 일본요리를 파는 집도 한옥에 어울리는 역설은 서촌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서촌에 유독 많은 것은 문학가와 화가의 흔적이다. 인왕산과 북악이 맞닿는 서촌의 맨 윗머리에 윤동주 문학관이 있고, 그를 따라 송강 정철의 시비, 김상헌의 시비가 있으며, 박노수의 집터에 미술관이 들어서 있다. 그 아래로 이중섭의 집터와 노천명의 집터, 날개의 시인 이상의 집터가 있다. 그밖에도 알 듯 모를 듯한 누구누구의 집터며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으나 누군가가 하숙을 살았던 집터, 화실과 산장터, 누구누구가 모여서 놀던 자리 따위의 미묘하고 거창한 푯말들이 서촌 일대를 채우고 있다. 서촌 입구에서 이 복잡한 터와 터들을 그린 지도를 얻을 수 있으니 역사·문화 마니아들은 부디 한 장씩 지녀 서촌 유람에 유용하게 쓸 수 있으리라.

수리한 한옥과 양옥의 조화가 새로운 골목길.

수리한 한옥과 양옥의 조화가 새로운 골목길.

서촌의 역사적 의미 중에도 가장 무게가 나가는 것은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이라는 사실이다. 그 덕에 골목길엔 한글길이란 이름도 붙었고, 세종마루라는 정자도 생겼다. 서촌이라는 아주 오랜 통칭 대신 세종마을이라는 무거운 이름도 얻었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의 탄생지가 준수방 잠저라고 기록되어 있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니 티끌만한 근거를 대며 여기저기 장소가 맞다는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아무튼 그 준수방 잠저가 자하문로 어딘가에 있었다고 한다.

정작 서촌을 걷는 유람객들은 역사·문화지도와 푯말 따위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 보인다. ‘무엇이 볼 만하냐’는 질문에 친구끼리 나들이 왔다는 젊은이는 “마을 분위기가 색다르다. 차분하면서도 옛 모습과 현대적인 모습이 잘 섞여 있다. 서울 어느 골목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색깔이 있다”고 했다. 반면 마을주민은 역사적·문화적 유적지에 대한 자긍심이 높았다. “아주 오래된 마을답게 주변에 크고 작은 역사적 의미의 명소들이 있어 자랑스럽다. 가까이서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것이다. 나이 많은 이들일수록 마을 환경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는 주민은 “조용하고 크게 시끄러울 일 없어서 좋다. 문화시설과 도서관이 많은 점도 다른 마을에 비할 바 없는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서촌 일대는 골목길의 거의 모든 모습을 볼 수 있다. 차가 다니는 큰길에 이어진 사잇길과 사람만이 걸어다닐 수 있는 골목길이 모세혈관처럼 연결됐고, 그 사이 모퉁이로 접어들면 구불구불 샛길의 끝에서 막다른 골목을 만나게 된다. 무수한 골목과 막다른 길의 미로가 서촌의 지형을 따라 빼곡하다. 자를 대고 그어 길을 만들고 효율을 계산해 상자집을 쌓아 올린 신도시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혼돈과 무질서가 서촌 골목길의 다양성에 깃들어 있다. 역사는 계획대로 전개되지 않을 터이고 인간은 시키는 대로 길을 만들지 않는 법이다. 서촌 어디에도 가로세로 반듯한 골목을 찾아볼 수 없는 까닭에 더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다. 한옥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현대식 쇼윈도를 볼 수 있는 놀라움. 계획하지 않은 것이 계획한 것보다 더 다양하고 아름다운 조화, 혼돈 속의 평화가 서촌 골목길의 생명이다.

놀러오는 시장 통인시장

도시가 오래되면 사람들이 떠난다. 가장 먼저 학교가 떠나고, 시장이 사라지고, 주민들이 늙어간다. 서촌마을이 오래도록 겪었던 일이다. 서촌의 불편한 점에 대해 주민은 “교육열 높은 젊은 엄마들의 불만은 강남처럼 번듯한 학원가가 없다는 점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골목길에 군데군데 학원이 보이지만, 대부분 작은 규모라서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강북지역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인근에 오래된 명문학교들이 남아있어 좋다고 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교육이라는 점을 서촌 골목길에서도 만날 수 있다.

서촌과 함께한 아주 오래된 시장이 통인시장이다. 한때 상인들이 떠나고 줄줄이 문을 닫았던 시장이 요즘에는 나름 유명한 화제의 장소가 됐다. 상인조합이 아이디어를 내고, 젊은이들이 가게를 열고, 여럿이 노력해 이룬 성과다. 시장 골목에는 과거를 재현한 시설물도 만들었고, 시장은 장보는 장소를 넘어 놀러오고 즐기러 오는 곳으로 다시 태어났다. 옛 번영만은 못하겠지만 통인시장은 확실히 살아나고 있었다. 젊은 상인은 6시가 되면 가게문을 닫고 자신의 저녁시간을 즐기러 갔다. 손님이 많으냐는 질문에 살짝 웃으며 “그렇다”고 답하는 모습은 함께 기뻐할 만하다.

오래된 장소에는 오래된 기억이 있다. 개인의 추억일뿐더러 집단의 공감이고 역사이다. 기억은 공동체가 갖는 심정의 유전자이다. 경복궁 옆 서쪽마을 서촌의 골목골목은 아마도 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은 공감의 기억이 묻혀 있는 장소일 것이다. 한글을 쓰는 민족이라 이 마을을 두고 굳이 세종마을이란 이름을 붙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다행한 일은 서촌이 기억만을 가진 마을이 아니라 오늘의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되찾았다는 점이다. 서울에서는 보기 드물게 가족이 단위가 되는 문화가 서촌에는 남아있다. 골목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아침엔 그 골목을 걸어 일터로 향하며, 저녁엔 다시 가정이라는 평화를 향해 걸어가는 골목길. 삶이 선물하는 평화와 건강한 행복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서촌 골목길을 걸어도 된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골목 내시경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