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에르도안 대통령, 정치인생 최대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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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최대도시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 제1 야당인 공화인민당(CHP) 후보 에크렘 이마모을루가 승리했다. 이로써 여당인 정의개발당(AKP)은 수도 앙카라 포함 주요 5대 도시 중 4곳을 CHP에 내주게 됐다.

터키 이스탄불 시장 재선거에서 승리한 야당 공화인민당(CHP) 후보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베일리크뒤쥐 구청장이 6월 23일(현지시간) 이스탄불에서 자축 집회를 갖고 지지자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터키 이스탄불 시장 재선거에서 승리한 야당 공화인민당(CHP) 후보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베일리크뒤쥐 구청장이 6월 23일(현지시간) 이스탄불에서 자축 집회를 갖고 지지자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부정투표 의혹으로 6월 23일(현지시간) 다시 치러진 터키 최대도시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 제1야당인 공화인민당(CHP) 후보 에크렘 이마모을루가 재차 승리했다. 이로써 여당인 정의개발당(AKP)은 수도 앙카라 포함 주요 5대 도시 중 4곳을 CHP에 내주게 됐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을 총리에 오르게 했던 2002년 총선 이후 모든 선거에서 승리했던 AKP의 불패신화는 깨졌다.

무엇보다 총리와 대통령을 오가며 16년 장기 집권한 에르도안의 리더십에 치명타를 안겼다. 이스탄불은 에르도안이 시장을 역임했던 곳으로, 그의 정치적 고향으로 평가받는다. 에르도안은 1994년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된 뒤 정계 주류로 진입했다.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전환된 이후 처음 이곳에서 치러진 선거에서의 패배는 에르도안 리더십에 대한 심판으로 볼 수밖에 없다. 에르도안은 지난 3월 선거유세 때부터 “이스탄불의 승자가 터키 전체에서 승자가 될 것”이라며 총력을 기울였음에도 패했다. 에르도안의 리더십은 타격이 불가피하며 그의 정치인생에서 가장 뼈아픈 패배로 기록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마모을루 시장 당선자는 이번 선거에서 앞선 선거보다 더 큰 격차로 승리했다. 3월 선거에서는 0.16%포인트 차이로 신승했지만 이번에는 10%포인트 가까이 격차를 벌리며 여유있게 이겼다. 표차는 1만3000표에서 약 80만표까지 늘어났다.

예전 같지 않은 에르도안 인기

여당과 에르도안 대통령이 줄기차게 부정투표 의혹을 제기하며 물고 늘어졌는데도 오히려 대승을 거뒀다는 점에서 에르도안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AKP는 3월 선거에서 이을드름 후보가 2만7000여표 차로 패하자 터키 최고선거위원회(YSK)에 재검표를 요구했다. 재검표에 들어갔지만 표차만 줄어들었을 뿐 승패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자 일부 개표 감시위원들이 선거법이 정한 공무원이 아니었고, 일부 투표용지에 서명이 없었다면서 YSK에 재선거를 요구했다. 에르도안도 나서 “국민이 이스탄불 재선거를 원한다”면서 YSK를 공개적으로 압박했다. 결국 YSK가 이를 받아들여 재선거에 들어갔는데 오히려 야당에 대패한 것이다. 특히 이을드름이 AKP 창립멤버로 교통부·소통부 장관에 총리까지 지냈던 거물이었다는 점에서 더 충격적인 패배다.

당장 에르도안 대통령의 독재를 끝낼 때가 됐다는 말이 나온다. 이스탄불 시민 굴칸 데미르카야는 로이터통신과 인터뷰에서 “이번 시장 재선거는 독재를 끝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새 대통령으로서 이마모을루를 (2023년 대선 때) 다시 보고 싶다”면서 “한 사람이 지배하는 나라는 이제 끝내야만 한다”고 덧붙였다. 군부 쿠데타 저지 이후 무차별적인 반대파 탄압·숙청 등 공포정치에 대한 반감이 적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이마모을루 승리를 반기는 사람들이 우르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6월 19일(현지시간) 이스탄불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 사건과 관련해 발언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6월 19일(현지시간) 이스탄불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 사건과 관련해 발언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조짐은 지난 5월 YSK의 재선거 결정 직후부터 감지됐다. 이스탄불 시민들은 그때도 거리로 나와 냄비와 프라이팬을 두드리며 항의시위를 벌였다. 당시 CHP 소속 한 의원은 현지 언론에 “AKP가 YSK 법관들에게 반대표를 던지면 구속될 수 있다고 협박했다”고 주장했다. 이마모을루는 YSK 결정으로 시장 당선이 무효가 된 뒤 “저들은 우리가 이긴 선거를 빼앗으려고 하지만 희망을 잃지 말자”며 지지여론을 결집시켰다. 재선거에서 이을드름 후보가 대승하지 않는 이상 에르도안 대통령의 무리수는 거대한 반대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경제난이 장기화되는 데 따른 성난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권위주의적 통치 행태를 이어나가면서 뜻밖의 대패에 직면하게 됐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터키는 지난해 3~4분기 연속으로 역성장을 기록했다. 리라화는 연초부터 계속해서 떨어져 약 20% 하락했고, 물가상승률은 20% 안팎을 기록 중이다. 실업률은 13%로 10여년 만에 최악이다. 경제난에 신음하는 유권자들이 더는 에르도안 정부의 권위주의적 행태를 묵과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에르도안, 이번 패배가 더 뼈아픈 이유

에르도안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가능케 했던 전략들이 이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됐다. 에르도안은 과거 경제호황을 발판 삼아 강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쿠르드족을 정치·군사적으로 탄압하고, 이슬람 색채를 강화하며 ‘술탄’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서구 강대국에도 할 말은 한다는 인상을 심어줬다. 최근에는 러시아산 방공미사일 시스템 S-400을 구입하는 것을 두고 미국과 갈등하고 있다.

이마모을루 시장 당선자는 사업가 출신에 이스탄불 서부 베일리크뒤쥐 구청장으로 재직했을 뿐 이렇다 할 정치경험은 없다. 하지만 에르도안 대통령과 반대로 화합을 강조하는 전략을 택해 성공을 거뒀다. 이슬람 금식성월 라마단 기간 동안 금식을 하고, 유세연설에서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인용하면서 이슬람 색채를 강화하고 있는 AKP의 지지층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파이낸설타임스>는 세속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AKP처럼 쿠르드족을 배척하며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기존 CHP 노선과도 다르다고 평가했다. 이마모을루는 종교나 이념보다는 시민 전체의 빈곤율 낮추기, 학생 교통비 인하 등 민생경제 문제에 집중하겠다고 밝히며 유권자들에게 희망을 제시했다. 그는 승리 연설에서도 지진에 대비하고, 50만명에 달하는 이스탄불 시내 시리아 난민을 지원하는 등 시민들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에 있어 중앙정부의 협력을 촉구했다. 또 “나는 당신(에르도안)과 조화롭게 일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히면서 “이번 선거는 한 사람, 한 정당, 혹은 한 분파의 승리가 아니라 이스탄불, 터키 전체의 승리다”라고 덧붙였다.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이번 패배가 더 뼈아픈 이유는 한화로 4조6000억원이 넘는 이스탄불 시정 예산을 야당에 내주게 됐다는 것이다. 주요 외신들은 AKP가 수년간 이 예산을 독점하며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넓히는 데 이용해왔다고 지적했다. 25년 만에 야당이 이스탄불 시장 자리를 가져가면서 AKP와 에르도안은 이제 더 이상 그 도구를 쓸 수 없게 됐다.

<박효재 국제부 기자 mann616@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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