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약자에 대한 기술 강자들의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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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주행차가 언제쯤 택시를 대체할 수 있을까? 의견은 분분하다. 굳어지는 명제가 하나가 있다면, 기대만큼 이르지는 않다는 것이다. 몇몇 경험 없는 미래학자들이 대충 던져대는 예측이 아니다. 자율주행차를 개발하고 있는 최고책임자들의 목소리기에 힘이 실린다. 포드 최고경영자(CEO) 짐 해킷은 지난 4월 “산업계가 자율주행차의 도래 시기를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했다. 현업에 종사하는 최고기술책임자들도 ‘자율주행 시대가 언제쯤 도래할 것인가’ 따위의 질문에 조심스런 태도를 취한다.

일러스트 김상민

일러스트 김상민

이유는 간단하다. 웨이모의 CEO 존 크라프칙이 강조하듯, 모든 자율주행차는 제약조건 하에 개발되기 때문이다. 미국 자율주행 기업들이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배경을 알면 이해는 빨라진다. 이 두 곳은 기후 변동성이 낮은 따뜻한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자율주행차는 눈과 비, 안개 등 날씨에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 고성능 카메라에 의존하는 자율주행 모델일수록 오류 확률은 높아진다. 눈은 차선 인식을 방해할 뿐 아니라 카메라의 인식을 교란한다. 레이저 센서의 라이트빔도 눈덩이 앞에서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차선의 표준화 부재도 장벽이다. 국가별·지역별로 차선의 상태는 천차만별이다.

불량도료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자체의 관리 소홀로 특정 국도의 차선 구분이 불명확한 지점이 등장하면 자율주행차는 중앙선을 넘나들 수도 있다. 앞서 제시한 이러한 치명적인 문제가 10년 안에, 전세계적으로 동시에 해결되길 기대하는 건 과도한 낙관이다.

기술에 대한 낙관은 폭력의 담론으로 쉽게 변질된다. 언제 도래할지 모르는 먼 미래를 두고 당장 오늘의 택시 문제를 압박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게 대표적이다. 10년, 20년 사이에 기술이 어느 방향으로, 어떤 형태로 변형될지 예측하기조차 어려운 판에, 관련 엔지니어들조차도 미래를 확담하지 못하는 판에, 어설픈 기술지식으로 무장한 호사가들이 ‘택시는 곧 사라질 것’이라고 운운한다는 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풍경인가. 자율주행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네이버랩스의 엔지니어들조차도 “교통지옥 부산에서 자율주행차가 운행되는 건 내 생애에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기술이 곧 무엇을 대체할 것’ 등의 기술결정론적 담론은 그것에 대한 비판을 기술에 대한 무지로 배척해 버린다. 기술이 제도의 개입에 의해 재구성될 수 있는 가능성도 닫아버린다. 사용자들의 기술 해석과 수용 가능성은 애초부터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인터넷의 등장 초기 민주주의 확대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낙관이 20여년이 지난 지금 가짜뉴스 앞에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자율주행차 시대의 도래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기술이 어떤 모습으로 사회로 다가올지, 단정적이고 기술결정론적인 태도를 걷어내자는 뜻이다. 결정론으로 현재의 기술 약자를 겁박하지 말자는 얘기다. 기술은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행위자들에 의해 갈등하고 조정되고 변형되며 재생산된다. 그것이 기술과 사회의 공진화를 설명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논리다. 기술에 대한 과도한 낙관은 기술 약자들에겐 기술 공포와 위협으로 수신될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 과도한 낙관을 펼치는 기술 강자들도 실은 기술에 대한 깊은 이해가 결여된 경우가 적지 않다. 혹은 자사의 생존을 위해 마케팅으로 포장하는 경우도 상당하다.

<이성규 전 메디아티 미디어테크 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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