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동포와 월남민은 다 어디로 갔을까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이범선의 소설 <오발탄>에 생생히 묘사

해방촌은 돌연한 광복과 분단과 전쟁, 그리고 일자리를 찾아 농촌을 떠나야 했던 산업화의 시대가 만들어낸 공간이다. 이곳이 또 다른 해방의 시대를 바라는 새로운 공간이 될 수 있을까.

조국이 광복되자 마을이 생겼다. 해방촌이다. 귀국동포들이 일본군 관사에 임시거처를 마련했고, 일본 호국신사가 있던 자리에 대부분 평북 선천군 출신의 월남민들이 천막을 치고 터를 잡았다. 남산 아래 행정구역상 용산2가동인 해방촌은 그렇게 시작됐다. 오늘의 해방촌은 영문 약자를 따서 HBC라 부르고, ‘리틀 이태원’으로 알려졌다. 70여년을 두고 해방촌도 여러 겹의 옷을 갈아입었다.

해방촌은 해방공간에 생긴 마을이다.

해방촌은 해방공간에 생긴 마을이다.

아무런 예고도 대책도 없이 해방을 맞았듯이 해방촌도 대책 없이 생겼다. 남산 서남쪽 가파른 경사를 따라 천막이거나 미군부대에서 주워온 박스로 대충 지은 집들이 경계 없이 들어섰다. 당시 해방촌은 이범선의 소설 <오발탄>에 생생히 묘사돼 있다. “산비탈을 도려내고 무질서하게 주워 붙인 판잣집들이었다. 철호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레이션 곽을 뜯어 덮은 처마가 어깨를 스칠 만치 비좁은 골목이었다. 부엌에서들 아무 데나 마구 버린 뜨물이, 미끄러운 길에는 구공탄 재가 군데군데 헌데 더뎅이 모양 깔렸다”던 해방촌의 모습은 지금은 그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세월의 먼지가 쌓여 조금 낡았지만 사람들이 부지런히 살아가는 마을과 골목이 오늘의 해방촌이다. 옛 모습이 궁금하다면 김수용 감독의 흑백영화 <혈맥>(1963)이나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를 보면 이범선이 표현한 것보다 더 참혹한 당시를 감상할 수 있다.

주변 조건으로 보면 해방촌의 환경은 아름답고 편리하다. 남산 그늘을 머리에 이고 남향으로 한강을 내다보며 경사진 비탈을 따라 집들이 들어섰고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았다. 위로는 남산공원이, 아래로는 용산공원이 거대하게 펼쳐졌다. 교통도 좋아 어디든 가고 오기가 편하다. 인근엔 남산도서관과 용산도서관, 독일문화원과 식물원이 있고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산책하기에도 편리한 곳이다. 그럼에도 오래된 마을의 숙명을 안고 있어 주민들은 점점 떠나고 그 빈자리는 어제의 피란민처럼 오늘의 이방인들이 메우고 있다.

해방촌을 50년 이상 지켜온 골목의 여왕들.

해방촌을 50년 이상 지켜온 골목의 여왕들.

오래된 주택가인 만큼 해방촌의 골목길은 얼기설기 얽혔다. 용산고 쪽에서 올라가는 신흥길이 해방촌 정상인 해방촌오거리에서 잠시 쉬었다가 이태원으로 통하는 해방촌길과 만난다. 신흥길과 해방촌길은 한길이지만 두 방향의 모습은 많이 다르다.

신흥길에서 가지를 뻗어 가파르기로 악명 높던 108계단은 이제 근사한 경사로 엘리베이터가 생겼다. 더 이상 집으로 가기 위해 다리를 두드리고 숨 고르며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된다. 골목골목 낡은 벽들이 새로 칠해지고 그림이 그려졌다. 곳곳에 공방과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장,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공간이 자리 잡았다. 해방촌길은 새로 들어선 카페와 이색 식당들이 젊은이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빈집’이라는 아주 낯선 형태의 주거 공유실험도 이루어지고 있고, 스스로 출자하고 대출받는 금융 공동체도 시도되고 있다. 해방촌에서 젊은이들의 시도는 도발적이고 새롭다. 해방촌은 그만큼 밝고 색다르게 변하고 있다.

큰길에서 한 발 비켜 들어가 골목에 들어서면 해방촌의 고요함이 기다리고 있다. 대개 1970년대 이후에 지어졌을 집들은 이제는 많이 낡아 보인다. 어느 집 배수관이 망가졌는지 오토바이 탄 수리공이 쏜살같이 달려와 주인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잘 아는 고장인 듯 수리공은 장비를 내리면서 “고칠 수는 있는데, 싹 뜯어서 새로 하기 전에는 또 고장 난다. 이 기회에 싹 바꾸는 게 어떻냐”고 말을 건넸다. 골목 사이사이 길은 새로 포장했지만, 집들은 그리 쉽게 바꿀 수 없는 법이다. 해방촌 일대는 남산 아래 고도제한과 기타 도시계획상의 제한에 걸려 높고 큰 건물을 짓지 못한다. 덕분에 싹 다 밀어버리고 고층아파트를 짓는 파괴적 재개발도 불가능해 서울시의 일반형도시재생활성화 지역으로 묶였다.

마을버스 종점이 있는 해방촌5거리가 해방촌의 중심이다.

마을버스 종점이 있는 해방촌5거리가 해방촌의 중심이다.

마을과 골목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오래도록 터전을 지킨 토박이의 불만도 들을 수 있었다. “젊은이들에게 가게 빌려주고, 하는 일은 좋아 보이지만 주민에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괜히 시에서 개입해서 더 나빠졌다. 젊은 사람들은 훌쩍 왔다가 가버리지, 여기서 과일 하나 과자 하나 사가지 않는다”는 것이 30년째 과일장사를 하는 이의 말이다. 사람들이 모여 들면 마을이 살아날 것 같아도 주민 입장에서는 그저 이방인과 구경꾼만 오갈 뿐이라는 불편도 있다.

사람들이 몰려든 신흥시장

해방촌에 처음 자리를 잡았던 귀국동포들과 월남민들은 세월을 따라 조용히 퇴장했다. 그러나 그들의 오래된 흔적은 해방촌의 푯말로 남았다. 해방촌 정상에 우뚝 선 해방교회와 보성여중·고는 해방 직후 예수교 박해를 피해 남으로 왔던 평북 선천군 사람들의 자취다. 평양과 더불어 이북에서 가장 개신교 신자가 많았다던 선천 출신들이 북한 정부가 생기고 박해가 예상되자 고향을 떠났다. 그들이 처음 자리를 잡았던 곳은 영락교회 근처. 1947년에 정부와 협상을 벌여 해방촌 일대에 400여가구가 천막을 쳤다. 낯선 땅에 예배당을 세우고 고향에 두고 온 학교인 보성여중·고와 숭실중·고등학교를 남한 땅에도 만들었다. 이역에서 자리 잡고 사는 일이 쉽지 않았을 터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해야 할 바를 분명히 알았던 것이다. 그 덕에 한동안 해방촌에는 선천 출신 외의 월남민들은 얼씬거릴 수 없었다. 이미 그 세대는 떠났지만 그들의 자취는 아직도 해방촌 정상에 남아있다.

해방촌 주택 대부분은 1970년대 이후 지은 2층 벽돌집이다.(사진 위) 길에서 만나는 이들이 모두 알아보고 반갑게 안부를 나누는 동네가 해방촌이다.(사진 아래)

해방촌 주택 대부분은 1970년대 이후 지은 2층 벽돌집이다.(사진 위) 길에서 만나는 이들이 모두 알아보고 반갑게 안부를 나누는 동네가 해방촌이다.(사진 아래)

학교와 예배당을 짓긴 했지만 선천 사람들에게 해방촌은 뿌리를 내릴 곳은 아니었다. 언제나 때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잃어버린 토지와 믿음을 되찾고 싶었다. <오발탄> 속 철호의 어머니는 인사불성의 병석에서도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해 “가자 가자”를 외쳤고, 월남민 대부분은 해방촌 토지불하를 거부했다. 어떤 곳도 고향을 대신할 땅이 아니라는 생각이 이 땅에서 활착하길 마다했을 것이다.

지금 이 골목을 가장 오래도록 지키고 있는 이들은 1960년대 농촌을 떠나 서울로 밀려왔던 세대들이다. “처음 왔을 때는 전부 판자촌이었다. 참 많이 변했다. 여기 산 지만 50년이 됐다”는 노인은 경기도 안성에서 왔다고 한다. 그의 곁에서 “내가 제일 멀리서 왔다”는 95살의 노인은 1964년에 강원도 강릉을 떠나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모두 일자리를 찾아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해 제 살던 곳을 떠나온 사람들이다. 대충 자리 잡아 살던 무허가 판잣집이 불하와 재건축을 거치면서 오늘의 해방촌을 만들었다. 판잣집은 번듯한 2층 벽돌집으로 변했다. 사람이 겨우 다녀야 했던 좁은 골목길도 정비가 됐고, 이제는 차 한 대는 지나갈 만큼 넓은 길로 변했다.

인간의 땅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시장이고 해방촌에도 신흥시장이 있다. 신흥이란 말 자체가 월남민들의 마을이라는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새로 번창하는 땅’이라는 뜻으로 지었다는 설도 있지만, 그와 무관하다는 견해도 있다. 신흥시장은 해방촌 사람들의 먹을거리를 대부분 공급했다. 이름 탓인지 장은 번창하고 사람들은 몰려들었으며 경기는 술술 풀렸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시장은 주변에 생긴 편의점과 마트에 밀려 벌써 죽었다. 요즘엔 새로 들어온 젊은이들이 명맥을 지키고 있다.

만국의 모든 식재료를 파는 해방촌 골목가게.

만국의 모든 식재료를 파는 해방촌 골목가게.

낡은 가게, 젊은이들이 활착 시도

당시 해방촌은 편물공장들이 바쁘게 돌아가던 곳이다. 소위 ‘요꼬’라는 편물기로 실로 스웨터를 짜던 공장들이 해방촌의 주인이었다. 집집마다 남대문시장에서 받아온 일감을 밤을 새워 짜서 돈을 벌었다. 한때 전국 수요의 3할 정도를 해방촌에서 만들었단다. 아직 해방촌 골목골목엔 그 시절부터 문을 연 봉제공장이 남아있다. 봉제공장 주인은 “여기 온 지 20년 됐다. 공장이 다 떠나고 이제 몇 만 남았다. 앞집도 공장이었는데 얼마 전 문 닫았다”고 말한다. 꾸준히 줄어들다가 해방촌에서 봉제공장 씨가 마른 것은 대략 5년 정도 됐다는 것이 그의 기억이다. 공장을 유지할 정도의 일은 있지만 이제 큰 재미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탄식이 그가 내뿜는 담배연기에 섞였다.

해방촌 골목의 가게는 다루는 물건들이 다양하다. 필리핀 맥주부터 베트남 쌀국수, 미국산 닭고기수프 통조림과 인도산 카레가루까지 좁은 가게 안이 만국박물상이다. 리틀 이태원이라 부르는 것도 이방인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정류장에는 피부색 다른 승객들이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골목엔 국적을 구분키 어려운 아이들이 섞여 한국말로 잡담을 하며 놀고 있다. 엄마 등쌀에 학원 갈 푸념을 친구에게 늘어놓는 아이는 어딜 봐도 이방인의 얼굴이다.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낯선 조화가 해방촌 골목을 걷는 색다름이다.

해방촌이 외국인들이 살기에 어려움이 없는 이유는 산 아래 용산 미군기지 덕분이었다. 미 군속과 미군부대에서 삯품을 파는 이들이 많이 살았던 터라 해방촌에서 외국인은 주목거리가 되지 않았다. 해방촌을 떠난 이들의 빈자리를 이방인들이 쉽게 메우고 있다. 해방촌이 외국인들에게 매력 있는 이유를 부동산 주인은 “방값이 싸다. 월세 방도 많고 서로 룸셰어도 많이 한다. 쉽게 들어와서 쉽게 떠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적의 편중 없이 다양한 나라 사람들이 해방촌 골목골목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요즘 해방촌에는 젊은이들이 활착을 시도하고 있다. 낡아 폐허로 방치됐던 신흥시장 가게들을 고쳐 일터를 열고 자신의 개성을 뽐낸다. 방송에 비친 화제의 가게를 찾아 객들이 줄을 잇고, 그런 낯선 모습을 나이든 주민들은 놀란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다. 젊은이들의 시도가 신기하기도 하고 소외될까 두려운 마음도 있다고 했다.

어느 시대나 그 정황에 맞는 공간이 열린다. 해방촌은 돌연한 광복과 분단과 전쟁, 그리고 일자리를 찾아 농촌을 떠나야 했던 산업화의 시대가 만들어낸 공간이다. 이제는 또 늘어나는 노년층과 산업의 변화, 젊은이의 모호한 미래라는 시대가 닥쳤다. 이곳이 또 다른 해방의 시대를 바라는 새로운 공간이 될 수 있을까. 해방촌의 가파른 골목들을 걸으면서 어떤 시대와 변화를 기다리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도 있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골목내시경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