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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한 개씩만이라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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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미니멀리즘 도전기, 점점 버리는 데 익숙해지고, 없다고 생활하는 데 불편 없어

‘미니멀리즘’은 1960년대 시각예술 분야에서 최소한의 도구를 이용해 본질만 남기자는 의도에서 출발한 트렌드다. 2010년대 들어 단순함을 추구하며 인테리어, 패션, 살림 등 생활의 여러 부분으로 영역이 확장됐다. 특히 일본에서는 곤도 마리에, 사사키 후미오 등의 미니멀리즘 관련 책이 수년간 베스트셀러를 차지했다.

물건을 버리고 정리하는 법을 알려주는 넷플릭스 프로그램 <곤도 마리에 :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화면.

물건을 버리고 정리하는 법을 알려주는 넷플릭스 프로그램 <곤도 마리에 :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화면.

이들은 현대인들이 지나치게 많은 소비를 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풍족이 아니라 오히려 물건에 압도돼 산다는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물건을 줄여나가면서 시간, 돈, 에너지에 여유가 생기고 나아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까지 좋아졌다는 ‘간증’이 쏟아졌다.

기자가 물건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한 건 지난달이다. 4월 어느 주말, 옷장 깊숙한 곳에서 태그가 달린 니트 몇 벌이 나왔다. 지난해 가을에 사서 고이 접어 옷장에 넣어둔 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재질과 길이가 조금씩 다른 짙은 남색 슬랙스는 8벌이나 됐다.

짙은 남색 슬랙스만이 아니었다. 사방에 똑같은 물건이 여러 개씩 있었다. ‘여러 개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사거나 모았던 것들이다. 최악은 스타벅스 다이어리였다. 스타벅스는 일정 기간 동안 15잔 가량의 음료를 마시면 다이어리를 준다. 올해 받은 스타벅스 다이어리는 10권이 넘는다.

주방 찬장을 열어보니 텀블러가 넘쳐났다. 여행지에서 기념으로 산 텀블러, 커피 브랜드 한정판으로 나온 텀블러, 압도적으로 가볍다는 친환경소재의 텀블러, 사은품으로 받아온 공짜 텀블러…. 만화가 주호민은 “텀블러가 2개 이상 있는 사람은 환경파괴자”라며 “이제 텀블러가 인류보다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환경파괴자였다.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작은 삶을 권하다>의 저자 조슈아 베커는 집안에서 자주 활용하는 공간부터 정리하는 게 좋다고 권한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을 정리하면 작은 삶 혹은 미니멀리즘의 장점을 금세 실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침대와 옷장, 그리고 화장대 겸 작은 책상이 있는 방부터 시작했다.

곤도 마리에는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고 했다. 미국 가정집을 방문해 정리를 도와주는 넷플릭스 리얼리티쇼에서 곤도 마리에는 물건을 하나씩 안아볼 때 설레는지를 묻는다. 설렘을 주지 않는다면 “그동안 고마웠다”는 인사와 함께 작별을 고하라고 했다. 물건에 인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곤도 마리에의 조언은 효과적이었다. 좋아하거나 어울리는 것, 그리고 실용적인 것만 남겨두기로 했다. 가격은 고려하지 않기로 했다. ‘비싼 건데’라는 생각이 매번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짙은 남색 슬랙스는 3개만 남기고 처분했다. 자주 입는 것 2개와 예뻐 보이는 것 하나를 남겼다. 이외에도 어울리지 않는 옷 중에서 깨끗한 것은 기부하고, 조금 낡은 건 헌옷수거함으로 보냈다. 잠옷은 10벌이 넘었다. 계절별로 각각 2벌씩 남기고 버렸다. 화장품은 거의 전부를 버리다시피 했다. 언젠가 쓰겠지 싶어서 쌓아둔 매니큐어는 ‘투명’ 하나만 남기고 다 버렸다. 그 언젠가를 기다리다가 이미 굳어가는 중이었다.

또 다른 난관은 책이었다. 책장에는 700권 가까운 책이 있었다. 소설과 만화책 등 이미 읽어서 줄거리를 아는 책부터 뺐다. 몇 년 동안 읽지 않았고 앞으로도 읽지 못할 것 같은 책도 뺐다. <자본>, <자본론의 세계> 등이 여기 해당됐다. 책장에 꽂아두면 예쁠 것 같아 샀던 세계문학 시리즈는 부모님댁으로 보냈다.

옷장의 3분의 1 가량이 비워졌다. 자주 입는 옷은 상의, 원피스, 겉옷 등으로 분류해 모두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외출하기 전 준비시간이 확실히 줄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옷을 찾느라 옷장을 헤집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빨래를 하고 난 이후에도 옷걸이에 걸어 옷장에 넣으면 끝이다. 미국의 미니멀리스트 조슈아 필즈 밀번은 옷장 정리의 효과 중 하나로 “매일 좋아하는 옷을 입을 수 있다”고 말한다.

책은 200권 가량 정리했다. 겹겹이 쌓여 뒤에 무슨 책이 있는지도 몰랐던 상황에서 벗어나게 됐다. 옷장과 마찬가지로 한눈에 책이 보이니 필요한 책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됐고 책장 정리와 청소도 전보다 수월했다. 대신 동네 도서관에서 대출카드를 만들었다. 화장품은 몇 개만 남겼음에도 이전과 달라진 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야말로 쟁여두기만 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에코백도 거의 모두 버렸다. 10개 이상 쌓여 있는 에코백은 ‘에코’와 거리가 멀었다.

“오직 최고만 남겨두라”

혼자 사는 집이 아니기 때문에 사건도 있었다. 색이 바랬고 재미도 없을 것 같아 버리려고 했던 만화책은 동생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한 번도 입지 않아 중고로 팔아버리려 했던 코트 역시 동생은 자주 입는다고 했다. 이 때문에 물건이 없어지면 제일 먼저 용의선상에 올랐다.

처분하기 전 정리정돈의 단계가 있었다. 정리만으로 상황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잉여를 해결하지 않은 정리정돈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고 입을 모은다. 정리정돈은 기본적으로 물건의 자리를 바꾸는 것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물건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정리정돈은 끝이 없다.

한 달이 됐다. 버리기에 익숙해지다보니 옷, 책, 화장품, 그릇 등은 오히려 처음보다 처분하기가 쉬워졌다. 없어도 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덩달아 물건을 쉽게 사지 않게 됐다. 인터넷 쇼핑몰을 둘러보는 시간이 절반 이상으로 줄었다.

다만 친구나 가족으로부터 받은 선물, 지인의 청첩장, 고등학교 시절 주고받은 손편지, 대학시절 필기노트 등은 만지작거리다 다시 서랍에 넣기 일쑤다. 조슈아 베커는 “쌓아놓은 물건들을 관리하느라 불필요한 스트레스와 금전적인 압박에 시달리면 그 추억을 현실에서 재현할 수 없게 된다. 감정적으로 애착이 있는 물건이라도 오직 최고만 남겨두라”고 조언하지만 처분하기는 쉽지 않다.

미니멀리즘에 대한 기준은 다 다르다. 실용적이지 않은 물건은 곧 쓰레기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름다움 자체가 실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들은 미니멀리즘을 유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이사를 다닌다. 이사만큼 물건을 처분하기 쉬운 기회도 없기 때문이다.

한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집에는 물건이 쌓여 있다. 다만 물건을 살 때 기준은 정해졌다. 어울리는가? 당장 필요한가? 정서적 만족이 큰가? 이미 같은 용도의 물건이 있지는 않은가? ‘하루에 하나씩은 버리자’는 계획도 세웠다. 버리기를 시도하지 않았다면 정하지 못했을 것들이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어쩌면 영원히 미니멀리스트는 못될지도 모르지만 버리기를 통해 자기만의 세계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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