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군-아직도 모르는 5·18의 총체적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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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모르지만 고아원 출신으로 넝마주이를 했던 김군.

영화는 당시 같은 고아원 출신으로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추적하지만 쉽지 않다. 그리고 드러나는 뜻밖의 진실.

제목 김군 (KIM-GUN)

감독 강상우

출연 김군, 주옥, 양동남, 지만원, 이창성 외

장르 공개수배 추적극

제작 1011필름

제공·배급 영화사 풀

상영시간 85분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19년 5월 23일

영화사 풀

영화사 풀

김준태 시인이 그랬다던가. 1980년 광주 이후, 너도나도 ‘80년 5월’ 이야기를 하면서 한 삽 두 삽 무등산에서 창작 재료를 퍼가서 이제 남아있는 게 없다고…. 그랬다. 1980년 이후 5·18과 관련한 수많은 서사들이 나왔다. 386세대의 부채의식이고, 시대정신이었다. 39년이나 지난 마당에 더 할 이야기가 남아있을까. 있다. 아니 많다.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을 본 감상이다. 놀랍다. 진부한, 다 아는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우리가 도달하지 못한 1980년의 ‘진실’은 여전히 숭숭 뚫린 빈 구멍으로 남아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난 39년간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는 사실.

영화가 지난 3년 8개월간 추적해온 시민군 ‘김군’에게 붙여진 다른 호명이 있다. 광수 1호. ‘북한특수군 광주 잠입설’을 제기한 군사평론가 지만원씨와 재미교포라는 닉네임 ‘노숙자 담요’에 따르면 극우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게시판에서 어느 일베 회원이 선구적으로 이 ‘5·18의 진실’을 포착했다. 사진 속 무장시민군의 생사를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는데, 알고 보니 30년 후 평양에서 열린 군중대회에 영웅 칭호를 받은 당 간부로 참여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즉, 80년 5월의 광주 ‘무장봉기’를 주도한 시민군의 실체는 북에서 내려온 특수부대원들이었으며, 그들은 성공적으로 ‘한국 사회 교란’이라는 임무를 마친 후 귀환해 영웅 대접을 받고 북한 사회의 엘리트로 지난 30여년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5·18 기록사진 속 인물들의 사진에서 광대뼈 등 주요 특징의 선을 연결해 3D화하고, 그것을 북한 매체 등에 보도된 사진에 맞춰 동일 인물임을 ‘증명’해내는 것이 이들이 주장한 ‘광수 찾기’의 과학적 방법론이다.

39년 후 만연한 ‘광수 찾기’의 희극

80년 5월 ‘북한 특수부대 광주 침투설’은 이 ‘광수 찾기’에 맞춰 산으로 가고 있었다. 나중에는 남쪽으로 망명한 황장엽 선생이나 80년 당시 9살짜리 꼬마였던 탈북자까지 수백 명이 광수 칭호를 부여받았다. 일방적으로. 애초 저 ‘설’의 아이디어가 나왔던 일베에서조차 진지하게 믿는 소수를 제외하면 다수는 블랙유머쯤으로 생각이 선회한 지 오래다. 왜 인터넷에서 닮은꼴로 화제를 모은 주석궁에서 박수를 치던 방송인 ‘송해’나 김정일 사망 소식에 눈물을 흘리던 인민군 복장 차림의 가수 ‘박진영’은 광수 칭호를 받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을까.

실제 광수 1호로 지목된 인물을 찾기 위한 감독의 집요함은 놀랍다.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이다. 일단 확인된 것은 사진이 찍힌 날짜다. 5월 23일 오전 10시쯤, 당시 <중앙일보> 사진기자였던 이창성씨가 자신이 찍은 사진의 네거필름을 살펴보며 내린 결론이다. 이씨는 공개된 사진들 이외에도 트럭10호에 타고 총기 수습에 나섰던 동일인물의 다른 사진들을 확인한다. 단서는 늘었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 확정하기엔 아직도 많은 크로스체킹이 필요하다. 관련 역사를 정리하는 연구소가 애당초 사진 속 인물로 지목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감독이 찾아가 만난 그 사람은 사진 속의 인물이 자신인지에 대해서는 자신 없어 한다. 하긴,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그 10여일의 항쟁에 앞장선 대가로 그가 지난 수십 년간 당해야 했던 고통, 트라우마는 너무나 컸다.

항쟁이 끝나기도 전에 묻혀버린 ‘진실’

당시 시내에서 탁주집을 했던 주옥씨의 아버지는 사진 속의 인물이 자신의 가게에 드나들던 넝마주이 김군이라는 것을 기억해낸다(정확히 따지면 김군을 먼저 기억해낸 것은 딸 주옥씨였고, 아버지는 딸의 기억에 대해 확인해준다). 이름은 모르지만 고아원 출신으로 넝마주이를 했던 김군. 영화는 당시 같은 고아원 출신으로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추적하지만 쉽지 않다. 그리고 드러나는 뜻밖의 진실. 시 외곽으로 나간 ‘김군’ 일행은 외곽으로 후퇴해 있던 계엄군과 조우한다. 계엄군은 오인사격으로 서로를 쏴 사망자가 발생했다. 보복은 트럭을 타고 지나가다 민가로 도망친 시민군들이 당했다. 끌려 나간 시민군은 사살당해 암매장됐다, 한 달 뒤 다시 돌아온 군인들이 그 시신을 파내 어디론가 싣고 갔다. 그리고 그때 마당에서 맨 앞에 손을 들고 항복했던 시민군. 관자놀이에 총을 맞고 즉사한 시민군이 바로 그 ‘김군’이었다는 유력 증언. 진실은 5·18 항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묻혀버렸던 것이다.

“지난 수십 년간 내가 이 사람이라고 나선 사람이 없다”고 지만원씨가 자신만만하게 ‘광수1호’ 칭호를 부여할 수 있었던 사정의 진실이다. 어렵게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그날의 진실을 털어놓은 시민군 동료들은 거의 40여년 만에야 한 자리에서 다시 만난다. 언론의 탐사취재와 달리 다큐멘터리 영화가 할 수 있는 긴 호흡의 서사, 그 모범을 보여준 영화다. 극장에서 많은 관객들이 함께했으면 좋겠다.

카메라를 바라보는 시민군의 불편한 시선

영화에서 눈에 밟혔던 것은 39년 전 광주에서 총을 들었던 시민군들의 ‘현재 삶’이었다. 항쟁의 마지막 날 끌려 나갔던 전라남도 도청 건물의 관리인, 39년 전 넝마주이였던 청년의 현재 직업은 고물상이다. 트라우마 센터에서 도수치료를 받는 노인은 80년 이후 지금까지 이발소에 가면 자기 손으로 머리를 감는다고 말한다. 영화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사건 후 끌려간 영창에서 받은 물고문의 트라우마다.

이창성

이창성

“5·18 유공자 보상으로 특혜를 받았다”며 유공자 명단을 공개해야 한다는 삐뚤어진 주장을 낯빛 하나 안 바꾸고 내놓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지난 39년간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던 서민들의 민낯을 영화는 기록하고 있다.

시사 후 이뤄진 기자간담회에서 사진을 찍은 이창성씨는 당시 취재의 어려움을 털어놨다. 도청 상황실로 찾아가 “당장 보도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역사의 기록을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지도부를 설득해 지프까지 할당받았는데, 한때는 계엄군의 프락치로 의심을 받기도 했다. 무장한 시민군은 사진을 찍는 자신들을 향해 총을 쏘기도 했다. 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사진을 찍는 것과 총을 쏘는 것이 동일한 단어(shot)를 쓰는 것을 예로 들며 두 행위의 본질적 유사성을 지적했다. 사진 기록으로 남은 ‘김군’의 얼굴 표정은 자신을 향해 셔터를 누르는 사진기자를 향한 불편한, 적대적 감정이 스치는 순간이었다. 그 복잡미묘한 표정이 어떤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에겐 북에서 내려와 시민군으로 위장한 특수작전부대원이 순간적으로 드러낸 살의(殺意)로 해석되었다. 그 상상력의 바탕에 깔린 게 악의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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