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와’에 거는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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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에서]‘레이와’에 거는 기대

정말 난감했다. 날짜를 기입하는 난에 서기 ‘2006년’ 대신 ‘헤이세이(平成) ○○년’이라고 쓰란다. 2006년이 헤이세이 몇 년이지? 물어물어 ‘헤이세이 18년’이라고 적었다.

일본에 1년간 연수 갔던 시절,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기 위해 찾은 도쿄 신주쿠 구청에서 겪은 일이다. 일본에서는 거의 모든 공문서에 ‘연호’를 쓴다고 했다. 그때 특파원을 하고 있던 선배로부터 ‘쇼와(昭和) 몇 년’인지를 알려면 “서력 연도에서 1925를 빼면 된다”는 팁을 받았다. 1984년이면 ‘쇼와 59년’이 되는 셈이다. 헤이세이는 1988을 빼면 된다.

연호란 왕정국가에서 한 군주의 치세에 붙이는 칭호다. 중국에서 시작됐고 그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일본, 베트남 등에서 사용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연호는 아마도 중국 당나라 때 ‘정관(貞觀)’일 것이다. 당 태종 이세민(598~649)의 치적을 ‘정관의 치(治)’라고 하는 것도 연호에서 따왔다. 당나라 사관 오긍이 당 태종의 정치 사례를 모아 펴낸 <정관정요(貞觀政要)>는 ‘제왕학의 교과서’로 불리며 후대 왕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기도 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영락(永樂)’, 고려 태조의 ‘천수(天授)’ 등이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연호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에는 ‘광무(光武)’와 ‘융희(隆熙)’라는 연호를 쓰기도 했다.

86세 고령의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물러나고 나루히토(德仁)가 새 일왕에 즉위한 지난 5월 1일 0시를 기해 일본은 연호를 ‘레이와(令和)’로 바꿨다.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세대로 ‘리셋’한다는 의미 때문인지 열도 전역이 떠들썩하다. ‘레이와’를 이용한 마케팅이 백화점·상점가에 줄을 잇고, 새롭게 출발한다는 다짐에서 혼인·출생신고도 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의 ‘연호 변경’과 관련한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착잡한 심정이 들었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한 21세기에 과거 군주시대의 케케묵은 유물인 연호를 사용하다니…. 게다가 새 일왕의 공식 즉위식은 오는 10월 22일에 열릴 예정이다. 앞으로 6개월 동안은 ‘레이와 이벤트’와 함께 온통 일본 왕실의 권위나 신성을 부각시키는 행사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우익들이 반기는 상황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아베 신조 정권이 첫 ‘전후(戰後) 세대’ 일왕의 즉위를 계기로 우경화 흐름을 가속화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아베 총리는 지난 4월 23일 “새로운 시대의 출발선에 서서 어떤 나라를 만들지 이 나라의 미래상에 대해 정면으로 논의해야 할 때가 오고 있다”고 밝혔다. 새 시대와 새 국가,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일본의 ‘미래상’은 미뤄 짐작컨대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일 것이다. 그런 상황으로 치닫게 되면 가뜩이나 악화된 한·일관계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 뻔하다.

‘레이와’는 ‘봄철 매화처럼 희망의 꽃을 피워 나가자’는 뜻이라고 한다. 그 의미처럼 ‘레이와’ 시대가 한·일관계의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홍민 에디터 겸 편집장 dury12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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